로마, 이야기 흐르는 ‘분수의 도시’
[한경 머니 기고=이석원 여행전문기자]동이 채 트지 않은 시간,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보르게세 공원(Villa Borghese) 안 한적한 곳에서 내린다. 다니는 자동차도 별로 없고,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산책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 좌우로 누군지는 알 수 없는 동상들이 사람 대신 나를 맞는다. 간혹 운동복 차림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살짝 웃으며 인사를 대신한다.
로마, 이야기 흐르는 ‘분수의 도시’
로마에서 가장 큰 보르게세 공원은 17세기 토스카나의 추기경인 스치피오네 보르게세의 집과 정원이었다.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주차장을 지나 정면에 국립근대미술관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재생한다. 곧 해가 떠오를 듯, 안개에 싸인 깊지 않은 여명의 골짜기에는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고 아주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바쁘지 않다. 관악기와 현악기가 오묘하게 어우러지는 몽환의 분위기. 얇은 굴곡을 그리는 음들은 잔잔한 듯 미세한 파동을 일으켜 아직 채 아침이 오지 않았음을 전해준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년)의 교향시 <로마의 분수(Fontane di Roma)> 중 첫 번째 곡인 ‘새벽 줄리아 골짜기의 분수(La fontana di Valle Giulia all’alba)’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 마치 마티니 잔을 세워 놓은 듯한 두 개의 쌍둥이 분수가 있다. 피르두시 레페나 광장의 양쪽에 서 있는 이 분수에서 레스피기의 <로마의 분수>는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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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피기를 따라간 로마의 분수
레스피기는 로마 사람은 아니다.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음악 공부를 그곳에서 했다. 스무 살이 넘어 레스피기는 러시아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사사하고, 독일에서 부르흐 문하에 있다가 1913년 산타체칠리아 음악학교 교수가 돼 로마로 온다. 그리고 그는 1917년 로마에서 아름다운 연작 교향시 <로마의 분수>를 발표한다.

<로마의 분수>는 새벽과 아침, 한낮과 석양으로 이뤄졌다. 새벽의 청아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이 보르게세 공원 언덕과 파리올리 언덕 사이의 줄리아 골짜기에서 시작했다. 레스피기의 설정은 환상적이다. 거대한 피르두시 레페나 광장의 분수는 이 골짜기의 평온한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로마는 분수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분수가 지천이다. 로마의 분수는 솟구치는 역동성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로마의 분수 중 그 어느 것도 위로 1m 이상을 솟아오르지 않는다. 전기 모터로 분수를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높은 곳에서 흐르는 물이 스스로의 수압으로 분출한다. 그러니 분수에 이르러서도 솟구치기보다는 흐르는 것이다. 아름다운 조각으로 분수를 만들었지만, 물만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내리는 것, 그것이 로마 분수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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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피기가 그린 아침의 분수는 보르게세 공원에서 멀지 않은 바르베리니 광장(Piazza Barberini) 한가운데에 있는 트리토네 분수(Fontana Tritone)다. 여기서 그는 ‘아침의 트리토네 분수(La fontana del Tritone al mattino)’를 연주한다. 강렬한 관현악으로 시작해 목관악기와 하프로 간결하게 정리한 이 곡의 주인공은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어 해신, 트리톤이다.

조개껍질 위에 앉은 해신 트리톤은 하늘을 향해 소라 나팔을 분다. 그리고 소리 대신 소라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물. 이 분수의 조각이 어쩐지 특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조각가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는 1640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를 위해 이 분수를 만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로마의 하늘, 그리고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는 아침의 태양. 트리토네 분수를 올려다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트리톤 뒤로 보이는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예전에 모차르트가 이탈리아 여행 중 연주회를 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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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피기가 바르베리니 광장에서 ‘아침의 트리토네 분수’를 연주했지만, 지금 이곳은 로마 시내 교통의 중심이면서 멋진 호텔들과 노천카페로 하루 종일 볼거리를 준다. 또 광장 한쪽 IBM 건물의 벽에는 베르니니가 만든 작은 분수인 ‘벌의 분수’도 있다. 눈여겨 찾아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로마의 휴일>을 간직한 트레비 분수
레스피기는 로마 한낮의 열정을 안고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évi)로 간다. 빠르지 않은 장중함의 관현악은 팀파니의 가세로 점점 더 격정적이다. 마치 바다의 신 넵투누스(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가 위대한 바다의 전쟁을 벌이기라도 하는 듯, 아니면 거칠 대로 거친 파도를 잠재우려 포효하는 듯 뜨겁다. 교향시의 세 번째 곡 ‘한낮의 트레비 분수(La fontana di Trévi al merrigio)’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다. 콜로세움, 판테온, 포로로마노 등과 함께 필수 관광 코스로 알려진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사시사철 여행자들의 물결이다. 분수 주변은 로마에서 가장 맛있는 젤라토를 먹을 수 있는 곳이라 더 그렇다. 물론 스페인 계단과 더불어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로마의 휴일> 성지 순례의 핵심이기도 하다. 영화 속 햅번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진 적은 없지만, 탈출한 공주가 이 부근 미용실에서 이른바 ‘햅번 스타일’의 짧은 헤어스타일을 선보였기에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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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 분수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 건축물이자 예술품이다. 조개 마차에 서 있는 넵투누스를 중심으로 그의 심복인 트리톤과 해마가 좌우를 이룬다. 기원전 19년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기원하는 트레비 분수는 스페인 계단 앞에 있는 ‘난파선 분수’와 같은 물줄기다. 가장 저지대에 위치해서 로마의 분수들 중 가장 강력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트레비 분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담고 있는 로마 시청이 있다. 카피톨 언덕 위에 있는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 바닥의 연꽃 문양은 미켈란젤로가 아니었으면 생각하지도 못했을 절묘한 작품이다. 광장 뒤쪽에서 내려다본 포로로마노는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볼 수 없는 장대함이 있다. 고대 로마의 위대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공간은 조망하는 것으로 더 큰 감동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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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피돌리오 광장과 어깨를 대고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로마 사람들은 ‘웨딩케이크’ 또는 ‘거대한 타이프라이터’라고 부른다. 반기지 않는 목소리다. 순전히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이다. 이탈리아 통일의 선구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황제의 기마상이 베네치아 광장을 짓누르는 모양이라 여행자의 눈에도 달갑게 보이지만은 않다.

로마 서쪽 바티칸 뒤로 뜨거웠던 태양이 넘어가고, 하늘이 빨갛게 달아오를 무렵 레스피기는 스페인 계단을 올라 삼위일체 교회 앞에서 왼쪽 길을 따라 메디치 궁전으로 간다. 스페인 광장의 격한 분주함을 저만치 하고 도착한 메디치 궁전 앞은 조용한 로마의 석양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서 <로마의 분수> 마지막 곡이 연주된다.

‘해질녘의 빌라 메디치의 분수(La fontana di Villa Medici al tramonto)’. 지난 새벽 줄리아 골짜기에서의 몽환적인 서정이 다시 이어지는 느낌이다. 잔잔하지만 신비로운 음율은 오늘 하루 로마의 태양이 얼마나 뜨거웠을지 알려준다. 그리고 평온한 휴식으로 가는 길목. 사람들은 저 멀리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쿠폴라 뒤로 지는 태양을 말없이 바라본다. 작고 안온한 분수에서 올라오는 물방울 같은 물줄기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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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명품 골목 안 ‘안티코 카페 그레코’
레스피기가 연주한 네 개의 분수 외에도 로마에는 유의미한 분수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에 있는 세 개의 분수인 네투노 분수(Fontana di Nettuno), 피우미 분수(Fontana dei Fiumi), 그리고 모로 분수(Fontana dei Moro)다. 이 중 흔히 ‘4대강 분수’라고도 불리는 중앙의 피우미 분수는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베르니니가 이 분수의 수주를 따내기 위해 교황의 조카를 유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헵번이 젤라토를 먹었던 스페인 계단 아래에 있는 난파선의 분수(Fontana della Barcaccia)도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스페인 계단의 반대편 골목인 콘도티 거리(Via di Condotti)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로마의 명품 골목. 하지만 그 골목의 진짜 가치는 ‘안티코 카페 그레코(Antico Caffe’ Greco)’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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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에 문을 열어 260년이 다 돼 가는,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이 카페에는 괴테와 쇼펜하우어 등이 단골이었고, 사르트르와 피카소, 호안 미로 등도 로마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었다. 특히 안데르센은 이 카페 건물 2층에서 잠시 살기도 했고, 스페인 계단 옆 건물 26번지에서 살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키츠는 26세의 나이로 죽기 사흘 전에도 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로마는 전 세계 여행자 그 누구에게도 가장 애호하는 곳이다. 심지어 로마를 와보지 않은 사람조차 로마는 마치 친근한 옆 동네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로마를 여행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테마들이 있다. 로마 시내에 수백 개에 이르는 분수들은 로마 여행의 또 다른 테마다. 레스피기의 <로마의 분수>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로마를 여행하는 멋진 테마를 전해준다. 숱한 이야기가 거리 여기저기에 서려 있는 로마. 그 로마의 분수들은 또 다른 로마를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 이야기 흐르는 ‘분수의 도시’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3호(2018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