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지문(指紋)이 똑같은 사람은 없다. 목소리의 파형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콴리(Kwan Lee) 작가는 서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 파형을 조형화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트럼프, 시진핑, 오바마,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지드래곤 등 수많은 유명인사의 목소리가 콴리의 보이스프린팅 기법으로 작품 속에서 재탄생했다. 특히 최근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평화’라는 목소리를 탑처럼 연출한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세계 6개국의 13명 작가가 초대된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2018’에 콴리 작가도 참여했다. 이 전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 바로 인조대리석으로 만든 2018mm 높이의 <평화의 탑-문재인&김정은>이라는 작품이다. 올해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성명에서 언급된 ‘평화’라는 말의 파형을 탑처럼 세로로 세워서 만든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내장된 스피커에서 심장소리가 들리고, 한국전쟁 이후 휴전 65년을 의미하며 65초마다 파란색과 붉은색 내부 조명이 교차로 점멸을 반복한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우리 민족혼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듯 생생하다.
콴리 작가는 일명 이 ‘성문예술(聲紋藝術, voiceprint art)’에 대한 특허도 가지고 있다. 말의 음성 파형은 제각각의 형태를 갖지만, 그 형태는 매우 추상적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형태에 개개인의 말이 지닌 의미와 고민, 철학과 감정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작품 스스로 관람자를 맞아 말을 걸고 공감을 얻어낼 때, 그 작품은 비로소 영원성을 지닌 생명을 얻게 된다. 콴리 작가 역시 이에 대한 고민을 최우선으로 한다. 가령 문 대통령이 판문점 선언에서 총 9번의 ‘평화’라는 단어를 언급했는데, 각각의 음성 파형을 비교하며 ‘과연 어느 파형이 문 대통령의 이미지와 판문점 선언의 정신을 조화롭게 담을 수 있겠는가’를 고민한 결과, 파형의 아랫부분이 하트처럼 생긴 8번째 음성 파형을 최종 선정해 작업에 옮겼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김 위원장은 마지막 6번째의 ‘평화’ 파형을 선택한 것이다.
콴리 작가의 작품이 겉보기엔 추상적 형태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 특정한 인물의 단어와 음성 파형으로 그 인물의 성격과 메시지까지 적절하게 조형화했다는 점이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또한 고유의 형태가 지닌 구상적인 조형미도 철저하게 작가적 고민에서 선택된 결과다. 김수환 추기경의 목소리를 옮긴 작품 <사랑> 역시 각기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8개의 ‘사랑’ 음성 파형 중에서 골랐다. 세로로 세웠을 때 상단 모양이 십자가 형태의 파형을 보인 목소리를 선정함으로써, 마치 ‘김수환 추기경의 목소리 사랑은 하나님의 십자가 정신’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조형물의 높이 역시 88cm로 추기경의 88년 생애를 의미한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그 내용이 아무리 의미 있고 중요하더라도 말하는 순간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만약 그 말을 시각적으로 잡아 우리 눈에 보여준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제 작업의 가장 큰 매력은 중요한 인물 또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조형 작품으로 시각화해준다는 점입니다. 그 존재감을 우리 눈앞에 새로운 형태로 보여줌으로써, 그 말이 행해진 때의 감동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선물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특정한 인물의 특정한 단어를 선정하고, 그 단어들이 말해진 순간들을 채집하고, 그 단어가 말해진 시간과 환경을 기록하며, 이를 다시 시각화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 자체가 제 작업의 시작점이자 끝점입니다.”
인생은 태어나서 죽어 가는 과정이다. 탄생과 죽음은 한 번씩만 허락된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경험은 삶의 많은 방향을 변화시킨다. 콴리 역시 20대 초반에 아버지와 가장 친한 친구를 잃는 경험 때문에 예기치 않은 트라우마와 슬픔, 연민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애절한 그리움은 ‘영원성’에 대한 열망을 품게 했다. 콴리 작품의 조형성이 석탑 모양을 띠게 되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다. 석탑은 1500년이 지나는 동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명멸을 지켜보며, 그네들의 염원을 품고 있는 상징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공에 쉽게 소멸되는 음성 파형을 세로로 세워 ‘탑’의 형태로 만들어 ‘영원성’의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작업 과정은 세밀한 공정을 많이 거친다. 첫째 과정은 작품의 주인공과 여러 번의 인터뷰를 통해 특정 단어의 목소리를 선정한다. 보통은 작가가 감동을 받았거나 시대적으로 기록할 가치가 있는 인물의 목소리를 채집한다. 둘째 단계는 그 말의 다양한 음성 파형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선 인물과 단어의 성격을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 선별한다. 셋째는 선정된 음성 파형으로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형태를 만든다. 이 단계에선 형태를 미리 만들어보면서 모양을 체크해보기도 한다. 넷째는 3D 프린터를 이용해 출력을 하고 여러 번의 세부 수정 과정을 반복한다. 다섯째는 최종 결정된 형태를 3D 프린터로 출력하고, 이를 크롬도금이나 브론즈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마무리한다. 이후에 별도의 크기나 재료 선택은 인물과 단어의 특성, 전시 성격 등을 감안해 제작되는 것이다. 콴리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응용 범위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음성 파형을 조각 작품 이외에도 디지털 프린팅, 주얼리, 렌티큘러 등 다양한 형태의 응용 작업으로 선보였다. 2017년 홍콩의 ‘컨템퍼러리 아트쇼(Contemp orary Art Show)’에는 오드리 헵번과 장국영의 <사랑(Love)>, 존 레논의 <평화(Peace)> 등의 음성 파형으로 만든 각각의 인물 초상 렌티큘러 4점을 선보여 솔드아웃 됐다. 또한 2008년에는 고어 미국 부통령의 <라이브 어스(Live Earth)> 음성 파형으로 만든 콴리의 펜던트가 국제주얼리디자인 공모전에서 특선을 받기도 했다. 콴리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작품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 최근에는 미국 휘트니미술관의 한 큐레이터가 “Outstanding image today”라고 작품평을 올렸을 정도로 해외의 작가나 큐레이터들의 좋은 평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전 세계 주요 분쟁지역에 ‘평화’라는 ‘말의 탑(towers of peace)’을 세워보고 싶습니다. 말의 주인공은 그곳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평범한 시민이나 어린아이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현장과 가장 밀접하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이의 목소리로 설치된다면, 그 ‘평화’라는 말의 존재감이 폭력과 전쟁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효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첫 단계로 먼저 서울과 평양 2곳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공동 발표한 선언문의 ‘평화’라는 음성 파형으로 만든 대형 크기의 조각을 세워보고 싶습니다. 그 ‘평화의 탑’은 두 정상의 말로 시작됐지만, 우리 한민족이 함께 평화를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콴리 작가의 작품이 개인을 넘어 세계 인류의 평화와 상생을 담아낸 것은 이미 수년전에 시작된 일이다. 2016년 G-서울국제아트페어에선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사랑, 빛으로 하나되다>라는 특별전을 선보여 수많은 관람객과 미디어의 갈채를 받았다. 대한적십자를 통해 국내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호주, 덴마크, 일본, 이집트 등 14개국 대사부인이 자국어로 발음한 ‘사랑’의 음성 파형을 바탕으로 입체조형을 만들어 설치한 작품이었다. 관람객이 작품에 다가서면, 각각의 언어로 ‘사랑’이라는 음성이 나오고, 대사부인이 생각하는 사랑의 색깔이 지정된 발광다이오드(LED) 빛으로 발광하는 인터렉티브 아트였다.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깊은 사색과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게 되는 색다른 감동의 연출이었다.
현재 콴리의 작품은 주한미국대사관, 바보의나눔재단, 한국수력원자력(주), 성우기업, 독일, 네덜란드, 홍콩 등 국내외 유수의 개인 컬렉터들까지 소장하고 있다. 단순히 한 점의 작품을 컬렉션하는 것을 넘어, 그 목소리에 담겨 무한하게 공명(共鳴)될 메시지의 참 의미를 공감했기 때문에 선택했을 것이다. 콴리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세계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상생의 방법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한다. 친숙한 목소리로 전혀 색다른 조형 어법을 창안해낸 콴리의 작품 가격은 대략 높이 40cm에 500만 원, 1m 크기는 1000만~ 1200만 원 정도로 형성돼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2호(2018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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