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중년의 한 여성이 하늘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낸 그 여성은 왠지 모를 가슴 아림이 끝없이 눈물 나게 한다며, 옆에 섰던 최은정 작가의 손을 꼭 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이은 뒤 떠났다. 그 한마디는 최 작가에게 다시 작업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올해 국내 최대 조각들의 향연인 서울국제조각페스타에선 인기작가상을 수상했다.
“찬란한 태양을 머금은 구름은 은빛 테두리를 만듭니다. 곧 나올 빛이지요. 지금은 잠시 가려져 있지만 곧 나올 빛. 저는 이 빛을 희망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런 빛이길 희망하며! 지난해부터 시작된 노을 시리즈도 한낯의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고, 지금은 비록 지지만 곧 다시 떠오를 태양 빛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색감에 대한 남다른 욕심을 노을 시리즈로 좀 더 풀어내려 합니다. 그래서 심오하거나 멋진 사상을 앞세우기보다는 작업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하는 작가가 됐으면 합니다.”
최은정 작가에게 ‘하늘 시리즈’ 작업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그녀에겐 종교와도 같은 존재다. 5년 전의 일이다. 순탄했던 삶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갑작스런 집안의 사업 실패로 하루아침에 반지하 집으로 옮겨 가게 된다. 참담한 현실에 맞설 수 있었던 버팀목은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때 ‘지금의 하늘’을 만났다. 그 시기에 ‘올려다보게 된’ 쪽빛 하늘은 너무나 찬란해서 더욱 슬퍼 보인 하늘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나락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빛을 지닌 그것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앞만 보며 무작정 내달리는 이에게 하늘은 제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때여야만 비로소 하늘은 넉넉한 가슴을 펼쳐 보인다. 최 작가도 불행 중 다행으로 늦지 않게 그 하늘을 만난 것이다. 여느 여성처럼 가정과 육아, 작업을 병행하며 종종거리고 살았을 땐 미처 쳐다보지도 못했던 하늘이었다. 그 하늘을 보고 아름다움과 고마움, 희망의 빛을 꿈꾸며 작업 스타일 역시 숙명적으로 바뀌게 됐다. 이전까지의 입체나 설치 작품 위주엔 열정적인 의욕을 앞세웠다면, 새롭게 만난 하늘 시리즈엔 삶의 진정성으로 희망의 꿈을 담아 가고 있다.
작품 제목으로 일관되게 ‘호프(hope)’를 사용하는 것 역시 작가 스스로의 체험을 옮긴 것이다. 절실할수록 교회나 절에 가서 종교적 구원의 기도에 매달리듯, 최 작가에게 작업은 그만의 방식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과정이며, 자가 치유의 힐링 수단이었다. 작품 제작 방식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최근 작품은 일관되게 PUR(Poly Urethane Reactive) 재질의 특수 접착제인 글루(glue)를 쌓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씨실과 날실로 직조하듯, 쉼 없이 반복하는 글루건 작업은 자기 구원을 위한 종교적 구도 행위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작품의 제작 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작가적 집념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선 작품 스타일을 감안해 원하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핫 맬트 글루(PUR)를 중첩해 실타래를 풀어 넣듯 채운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사물을 붙일 수 있는 접착성 PUR를 작품 틀에서 원활하게 분리해내는 건 반복적인 시행착오 덕분에 얻어진 최 작가만의 남다른 노하우다. 그렇게 분리된 PUR 재질의 매스(mass)는 편편한 표면과 반투명의 반짝임을 지닌 꽤나 매력적인 모습이다. 이 위에 원하는 형상을 UV 프린트하는 것으로 1차 완성이 된다. 특히 이 특수 프린트 과정에서 발생되는 열에 PUR 표면이 적당히 녹으면서 분사된 잉크를 잡아주는 코팅 효과로 보존력까지 더하게 된다. 최 작가의 작품은 새로운 재료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력 외에도 몇 가지 특징이 더 발견된다. 무엇보다 장르 간 융합을 빼놓을 수 없다. 처음 출발은 매스 중심의 전통 방식 조각품으로 시작하지만, 완성 단계에선 사진과 회화 기법 등이 혼용된 복합 매체의 작품으로 탄생된다. 이러한 장르 간 컬래버레이션 작업 방식은 그녀만의 남다른 색채 감각을 만나 더욱 빛을 발한다. 작가를 꿈꾸던 학부시절부터 열렬한 지지자였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일본을 왕래했다. 이때부터 이미 우리나라에선 구하기 힘들던 투명 재료인 아크릴을 활용하게 된다. 동시에 유리, 석영, 핫 맬트 글루 등 투명함에 대한 집념이 최근의 빛(lighting) 작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재료 연구의 경험은 지금도 미술대학에서 재료 기법 관련 강의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또한 사진 작업과의 협업 시도는 이미 대학원을 졸업한 2000년 초부터 시작된 것이다. 핫 맬트 글루는 재료적 편의성은 충분하지만, 다양한 색상을 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입체이면서 회화적인 면모를 동시에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사진 작업과의 혼용이다. 평소 사진 찍기를 즐겨하던 최 작가는 자신의 시각으로 포착한 일상의 이모저모를 특수 UV 프린트 방식으로 옮긴 ‘입체평면회화’를 완성한 것이다. 프린팅 될 평면화면을 직접 글루건으로 직조해 만들거나, 간혹 집의 형상으로 꾸민 아크릴판 입체물에도 사진 이미지가 프린트돼 심상 풍경의 옷을 입히기도 한다.
최근 작품 중에 눈길을 사로잡는 예로 ‘하늘을 품은 집’의 설치 작품 시리즈가 있다. 그 작품은 최 작가가 왜 작품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는 평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즐겨한다. 작품을 접하는 모든 이에게 과연 즐거움과 행복을 전하는 작가이고, 그런 작품을 만들고 있는가를 쉼 없이 되묻는다. 그것은 나락으로 꺼졌던 삶의 질곡에서 그를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었던 존재가 지금의 작업이기에, 그 긍정적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순수한 작가적 열망이다.
최 작가의 작품엔 가을하늘을 닮은 하늘색이 많다. 특히 올려다본 그 하늘의 모습은 답답했던 가슴속 깊이까지 후련하게 쓸어주는 청명함으로 가득하다. 간혹 등장하는 저녁노을 진 하늘마저 저물어 가는 시듦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희망의 휴식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따뜻한 감성의 온도를 지녔다. 직접 체감한 삶의 온도를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그럴 듯한 개념적인 철학이나 의미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호소력을 지닌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단한 삶이 아직은 살 만한 가치가 있고, 그 희망은 날마다 만나는 하늘빛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한다. 그에게 작품은 곧 삶의 지혜이며 실천이다.
최 작가는 올 한 해 유독 바쁜 시즌을 보내고 있다. 10월에 펼쳐지는 ‘2018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는 갤러리나우 부스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10월 말엔 ‘2018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인기작가상 수상 기념전을 서울 인사동의 갤러리코사에서 갖는다. 이외에도 여러 개의 기획전에 참가할 예정이어서, 올해는 최은정의 새로운 시즌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작품 가격은 경력에 비해 아직 높지 않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50×50×5cm’ 크기의 작품이 150만~200만 원 선에 판매되고 있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 조각 편집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추천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1호(2018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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