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리슬·사임당 by 이혜미·기로에 제공
황이슬 ‘리슬’ 대표
“한복은 하이힐과 스키니진과도 잘 어울려”
“한복을 모티브로 한 기성복 형태의 의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복을 바탕에 두거나 한복의 특징을 가미하기도 하는데 쉽게 보면 학교나 직장, 카페, 여행지 등에서 입을 수 있는 패션 한복, 생활한복, 케이패션(K-fashion)을 추구합니다.” 황이슬 리슬 대표가 말했다.
한복의 90%는 예복으로 소비된다. 오늘날 한복은 빌려 입는 옷, 체험하는 옷, 사진 찍기 위한 옷이 돼 버렸다. 리슬은 옛것에 멈춘 한복을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새로운 한복으로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다.
황이슬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한복의 아름다움에 꽂혔다. 2006년부터 전북 전주에 기반을 두고 퓨전 한복 ‘손짱디자인한복’을 창업해 한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2014년 ‘리슬’을 론칭해 생활한복 라인과 한주얼(한복+캐주얼)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황 대표는 “리슬이 만드는 옷은 하이힐과 선글라스, 스키니진에도 어울리는 한복으로 소재도 면 혼방, 폴리에스테르는 물론 신소재를 쓰고 쇼핑몰용 모델 사진도 길거리나 영화관, 카페 앞에서 운동화를 신고 커피를 들고 찍는다”며 “새로운 개념의 패션 카테고리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리슬의 인기 아이템인 허리 치마는 조상들이 한때 저고리를 길게, 치마를 짧게 입었던 데서 착안했다.
익숙한 조선 후기의 치마 및 저고리의 형태를 물세탁이 가능한 소재로 만들거나 착용법을 간소화시키기도 한다. 액주름포, 당의, 배자, 철릭 등 익숙하지 않은 한복의 형태를 응용해 믹스매치하면 낯설지만 익숙해서 멋진 새로운 한복으로 재탄생한다. 옷고름 대신 단추를 다는 식의 미세한 차이에서 변화는 온다고 한다.
“한복을 입고 생활하면서 하나씩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아 나갔는데 1년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한 결과 100개 이상의 문제점이 나왔습니다. 치마 길이가 발목을 완전히 덮는 형태로는 계단을 오르내리기에 불편하고, 속치마는 부피가 커서 통행에 용이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소재, 디자인, 문양, 색깔, 판매 방식, 가격, 생산 원리 등 모든 부분에서 개선점을 파악해 지금의 리슬이 탄생했다. 맞춤 제작이 아닌 기성복 형태로 사이즈를 표준화해 주로 온라인과 팝업스토어에서 판매한다. 1인 기업에서 시작해 11명 직원을 두고 해외 진출 성과도 내는 어엿한 한복 브랜드로 성장했다.
“한복은 단순히 옷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거울 같은 존재죠. 이것을 보고 역사를 떠올릴 수도 할머니나 엄마를 떠올릴 수도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박물관 유리 너머가 아닌 옷으로 소품으로 문화로 존재해야 한국의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지 않을까요.”
사임당 by 이혜미
“한복은 인본주의 옷, 세계화 가능성 높다”
“개화기 시대의 신여성 복식부터 오늘날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모아 전시를 했는데 엄마와 딸이 함께 와서 대학생 딸에게 선물해주기도 하고, 연세가 많으신 분이 오셔서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하시기도 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오셔서 관심을 보여주셨어요.”
<한복, 시대를 이야기하다: 엄마의 엄마, 딸의 딸> 전을 마치고 지난 9월 중순 만난 이혜미 디자이너가 말했다. 돈의문 박물관마을 공공전시장에서 약 3주에 걸쳐 열린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이 디자이너는 벽면 한쪽 행거에 걸린 신한복들을 꼽았다. 실제로 입고 체험해보라며 만든 장치였다.
“전시였지만 옷가게에 걸려 있는 것처럼 연출했어요. 한복에 대해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사람들도 입고 보면 일상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거든요. ‘이거 팔아요’라는 묻는 분들이 많아서 의외로 꽤 많이 판매가 됐어요. 판매가 기준으로 약 3000만 원가량, 감사한 마음에 50% 할인된 금액으로 드렸죠.”
이혜미 한복 디자이너는 자칭 ‘한복계의 금수저’라고 했다. 그는 시어머니가 공들여 일군 한복집 ‘사임당’을 이어받고, 서울시 무형문화재 박광훈 침선장과 한국 복식사의 대가인 박경자 교수에게 사사했으며, 전통 복식과 복식 미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은 전통 한복의 장인이다. 그런 그가 24년의 한복 인생에서 최근 4~5년간은 신한복 연구에 매달렸다. 전통 한복 전문가들은 요즘 한복을 터부시하기도 하지만, 이 디자이너의 생각은 달랐다.
“옷은 사람에게 입혀졌을 때 생명력을 얻고 사람에 따라 조신해 보이기도 단아해 보이기도 섹시해 보이기도 하는데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고 얘기하는 한복은 일상에서 입을 수 없을뿐더러 행사나 예의를 차리는 자리에서도 그나마 대여해서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복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나라의 옷이 진짜 없어지겠구나 생각했어요.”
이 디자이너는 특히 개화기 신여성의 복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복과 양장이 혼재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복이 일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편의성’과 ‘실용성’이 필요하다. 개화기가 시작되고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늘어나면서 활동성이 있는 옷을 필요로 했는데, 갑자기 양장으로 복식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옷이 변화했는지를 보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이 디자이너의 생각이다.
“그 시대 특징을 보면 일단 치마 길이가 짧아요. 구두 위로 약 20cm 올라간 형태예요. 또 저고리는 조선 후기보다 길죠. 저고리 길이가 짧으면 손을 올리고 내릴 때 불편함이 있어요. 실제 15~16세기에는 허리 길이까지 저고리가 내려오기도 했어요. 긴 저고리와 짧아진 치마를 세트로 입어도 예쁘지만, 따로 코디를 해도 잘 어울려요. 저는 개인적으로 청바지 위에 재킷으로 만들어 자주 입었어요. 또 당시 사진을 보면 벨벳이나 레이스 등 다양한 양장 소재로도 많이 만들었어요.”
이 디자이너는 결론적으로 전통 복식의 ‘코스튬’이 아닌 한국인의 특징이 있는 ‘패션’으로 한복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전통의 한복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노하우와 원칙에 대해 물었다. 이 디자이너는 한복과 양장의 가장 큰 차이를 되물었다.
그는 “양장은 입체패턴, 한복은 평면패턴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며 “양장은 예를 들면 예쁜 여성의 신체에 맞는 도자기를 빚어서 사람이 들어가는 구조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44·55·66 사이즈의 경우 더욱 그래요. 한복은 양장처럼 다트도 없고, 바닥에 내려놓으면 평면이에요. 사람의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입체를 만드는, 그래서 가장 인본주의적인 옷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한복의 원리를 살려 전통의 현대화를 하는 게 그게 세운 원칙이다. “곡선의 미학이라고 하는데 한복은 네모와 네모를 이어서 만들어요. 치마도 네모와 네모를 잇고 주름을 잡아서 사람 몸에 걸치면 곡선이 되는 형태예요. 기본적으로는 직선에서 시작한 옷이고 인체의 곡선에 의해 예기치 않은 모양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른 사람이 입으면 입는 대로, 뚱뚱하면 뚱뚱한 대로 잘 어울려요.”
그는 또한 한복은 색의 조화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뿜어낸다고 했다. 이 디자이너는 특히 파스텔 계열, 무채색을 섞은 색감의 조화를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안감은 주로 흰색으로 배차하는데, 색과 색이 겹칠 때 맑아지는 느낌이 좋아서다.
생성공간 여백 & 기로에
“한복 정장의 가능성, 대기업이 먼저 알아봤죠”
박선옥 생성공간 여백 대표는 또 하나의 한복 브랜드로 ‘기로에’를 론칭했다. 남성에게 특화된 한복을 만드는 곳이다. 2004년 한복에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입혀 새로운 창작 한복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여백을 창업한 이후 2015년 한복진흥센터 주최 ‘신한복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점차 남성 한복에 집중하게 됐다.
“신한복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한복을 선보였는데 대부분 여성 한복이었어요. 차별화하기 위해서라도 남성 한복에 역량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중에서도 매일 입을 수 있는 옷을 생각하다 보니 슈트가 떠올랐죠. 그래서 나온 게 ‘한복 정장’입니다.”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고 한국적인 패션디자인을 좋아해 한복을 배운 박 대표는 처음부터 한복에 대한 접근이 달랐다. 전통을 고수하는 장인의 길이 아닌,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는 디자이너로서 한복을 현대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벨벳, 레이스, 데님, 저지 원단 등 한복 소재로 잘 쓰지 않는 다양한 소재로 실루엣이 살아 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예쁘긴 한데, 그걸 누가 사 입겠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고객이 좋아하는 옷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서 2012년부터 만 2년 동안 호주에 나가 있었어요. 그리고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죠. 현대적인 한복 디자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박 대표가 다시 심기일전을 한 뒤, 기로에를 통해 남성 한복을 만들면서 기쁜 소식들도 연달아 들려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우수 문화 상품에서 기로에의 한복 정장과 남자 한복 캐주얼화가 선정이 된 것이다. 또 최근에는 한 대기업에서 기로에에 러브콜을 보내왔다. 기로에가 제네시스 스튜디오의 큐레이터 유니폼 제작 업체로 선정돼 한복을 디자인에 응용한 ‘케이슈트’로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양복에 비해 한복 정장은 구김도 가고 한눈에 떨어지는 느낌은 덜하죠. 하지만 한 번 입어보면 그 편안함과 세련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한복은 한국 사람의 외모가 가장 돋보이는 옷이라고 생각해요. 얼굴이 동그랗고 머리색은 까맣기 때문에 하얀 동정의 깃셔츠가 잘 어울려요. 이제는 남자들도 스스로 본인의 옷을 돈 주고 사서 입는 시대가 됐는데, 지금 신한복을 고르는 세대나 사람들은 사명감으로 입지 않아요. 예뻐 보이기 때문에 입는 거죠.”
그래서 박 대표는 한복의 전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한복집이라는 게 있어서 아이의 돌복부터 결혼 한복과 수의까지 다 만들었죠. 지금은 그 수요가 사라지면서 대부분 혼수 한복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자신만의 전문성을 가진 더 많은 한복 전문가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한복이 더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1호(2018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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