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미술관, 코리아나화장박물관 탐방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전통문화와 예술,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의 공간이 있다.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에 위치한 ‘스페이스 씨’다. 코리아나화장품이 세운 복합문화공간으로 코리아나화장박물관과 코리아나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기업 사설 미술관(예술 후원)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예술과 기업의 이유 있는 만남에 대해 들었다.사진 서범세 기자·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전문가 도움말 박신의 경희대 교수 “국내 미술관 구도에서의 경쟁으로 봤을 때, 코리아나미술관은 여성성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풀어 오면서 도발적이고 수준 높은 작품들을 올려 왔다는 데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어요. 일반 대중뿐 아니라 평론가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다녀가는 미술관으로 꼽을 만하죠.”_ 박신의 경희대 교수
“요즘에는 페미니즘 미술의 재조명이 일어나지만 2013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관련 전시를 할 때 관심 있게 보는 작가들을 섭외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어려움이 많아서 내부적으로 볼멘소리가 나올 때 ‘그거 안 하면 문 닫을 거야’ 하면서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_유승희 코리아나미술관장
기업이 운영하는 사설 미술관 중 코리아나미술관은 독자적인 지형을 형성한다. 대규모 컬렉션으로 미술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대기업 소속의 미술관이 아니면서도 기획전 하나로 만만치 않은 미술 동네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서울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 갤러리가 인사동을 중심으로 강북에 포진해 있을 때 문화의 불모지 강남에 터를 잡고 건물을 올린 게 지난 2003년의 일이다. 지금은 호림아트센터, 아뜰리에 에르메스, 송은아트스페이스 등이 일대에 강남아트밸리를 형성하고 있다면 당시만 하더라도 약도에 ‘삼원가든 옆 미술관’이라 표기할 정도로 황량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5년, 코리아나미술관은 어떻게 주목할 만한 화두(주제)를 던지는 곳이 됐을까. 정체성, 그리고 차별성과 탁월성. 세 가지 키워드를 따라 미술관 탐방을 나섰다.
기업 예술 후원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지하 2층, 지상 8층(옥상정원)으로 이뤄진 스페이스 씨는 건축가 정기용(1945~ 2011년)이 만든 서울 내 유일한 건물이다. 콘셉트는 ‘도심 속 정원’이다. 각 층의 유리벽 한쪽에 미니 정원을, 건물 꼭대기에 옥상정원(설계 당시만 해도 이런 방식이 드물었다)을 가꾸고 있다.
생태 건축가인 정기용은 ‘무주 공공프로젝트’, ‘순천 기적의 도서관’, ‘김제 지평선중학교’, ‘김해 봉하마을’ 등 주로 지역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을 해 왔는데 문화의 불모지 강남에 스페이스 씨를 설계하며 지역의 삭막한 느낌을 없애줄 수 있는 생명의 숲이자 살아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 미술관 측 설명이다.
옥상정원에는 화장품과 향수의 원료가 되는 소나무, 자작나무, 히어리, 천리향, 미스김 라일락 등이 심겨져 있다. 코리아나화장품 식물원에서 연구원이 직접 키운 것을 가져다 심은 것들로, 화장품회사로서의 정체성을 미술관 정원에 새겨 넣은 셈이다.
또 ‘소통’을 콘셉트로 복층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하 1층~지하 2층, 5~6층, 7층~옥상이 각각 연결돼 있다. 전시 공간으로 봤을 때 지하의 층고가 4m 30cm에서 최대 8m(대개는 4, 5m 안팎)로 주요 미술관급에 해당하는 높이를 자랑한다. 또 전시에 따라 가변적으로 칸막이를 조정할 수 있어 효율적인 공간 운영이 가능하다.
코리아나미술관이 대지 561.9㎡의 공간에 현대미술 전시에서 중요한 ‘높은 천장’과 ‘변용 가능한 전시실’을 다 담아낸 것은 설계 계획을 할 당시 운영의 방향을 명확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회화 중심이 아닌 설치미술, 미디어·퍼포먼스를 포함한 컨템퍼러리 아트의 다양한 실험과 다른 장르와의 연계를 모색한 결과다.
그렇다면 기업이 사립 미술관을 운영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예술과 기업의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최근 추세는 일방적인 예술 후원에서 상호수혜적인 관계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역사적으로 예술이 자본(후원) 아래 성장했다면, 최근에는 기업도 예술을 필요로 한다. 정체된 성장 동력을 창의와 혁신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상품이 아닌 문화를 파는 기업으로 발돋움하려는 의지에서다.
박신의 교수는 “미국의 경우 문화부가 없고 기업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면 우리는 프랑스식으로 정부가 주도하는 예술 지원을 해 왔지만 이제는 기업이 성장한 만큼 기업의 예술 후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달리 가질 필요가 있다”며 “투명하게 운영한다면 예술 후원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한국도 이제는 기업 대외 이미지 성장과 직원 조직문화 개선의 차원에서 문화의 발전이 함께 이뤄져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코리아나미술관의 문화 마케팅은 몇 가지 시사점을 가진다. 모기업을 가진 기업 미술관으로서 기관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미술관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 15년 동안 일관된 방향으로 한 길을 걸으며 시간의 축적에 따른 문화의 축적을 일궜다는 점. 그것이 더 효과적인 자사 브랜드 이미지 제고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의 정체성 고려한 차별화 ‘눈길’
수집가들의 오랜 꿈이 박물관을 갖는 것이라면, 1970년대부터 매일같이 인사동을 배회하며 수집을 해 온 유상옥 회장도 소장품을 담아낼 공간을 갖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물관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함께 운영키로 결정한 이후 현실적인 고민에 부딪혔다. 외부 자문을 거쳐 관객 개발을 위해 미술관을 추가하기로 했지만, “남들 다 하는 전시를 우리도 쉽게 하면 누가 강 건너 전시 하나를 보러 여기까지 오겠느냐”는 고민이었다. 동시에 기업과의 연관성도 필요했다. 코리아나미술관은 별도의 재단을 설립하지 않고, 코리아나화장품 소속의 한 부서로 존재하고 있다.
먼저 박물관은 화장이라는 테마를 담았다. 수집한 관련 유물이 많을뿐더러, 기업의 정체성을 분명히 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코리아나화장박물관. 미술관의 경우 기업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대미술에서도 중요한 테마인 여성을 핵심으로 삼았다. 소장품 리스트 가운데 동서양 ‘미인도’가 국내 최고 수준(150여 점)으로 많다는 점, 다른 기업 미술관이 잘 다루지 않는 차별화된 주제라는 점 등도 고려됐다.
기업 미술관을 어떤 성격으로 운영할 것인지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초심을 잃거나 성격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리더십이 바뀌고 색깔이 불분명해지거나, 혹은 자체 기획전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기보다 기업과 관계없는 대관 전시를 하는 식으로 운영되곤 한다. 또 미술관이 아닌 기업홍보관이라는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경쟁력은 우리만의 차별화된 주제를 가지고 심도 있게 연구를 통해 전시를 개최한 것인 거 같아요.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그렇게들 인정해주실 때마다 힘이 났어요. 돌아보면 제일 잘한 건 방향을 잘 잡은 것, 여성과 여성성이라는 주제를 잡고 초반에 생각했던 대로 쭉 끌고 왔던 것, 누가 뭐라고 해도 주변을 설득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요.”_유승희 관장
여성성 등 주제 탐구
15년 꽃을 피워
코리아나미술관은 개관 이래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원한다는 방침에 따라 동시대 미술의 주요 이슈와 함께 여성, 여성성, 신체, 퍼포먼스 등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조명하는 기획전을 총 49회에 걸쳐 선보여 왔다. 또 시각예술 영역뿐 아니라 음악, 연극, 무용, 문학 등 인접 예술을 아우르는 프로그램 기획으로 다른 영역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다. 15년에 걸쳐 한 우물을 판 결과 페미니즘 전시의 메카 역할을 하게 됐다.
특히 여성과 여성성을 테마로 다뤘던 전시로 2004년부터 5회에 걸쳐 미술관 소장의 ‘미인도’와 여성 관련 작품을 선보인 전시 ‘자인’ 시리즈를 비롯해 박영선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박영선을 회고한다’(2009년), 여성 삶의 내러티브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한 ‘텔 미 허스토리’(2013년), 여성의 해학적 퍼포먼스를 다룬 ‘댄싱 마마’(2015년), 그리고 여성의 가려진 노동을 조명한 ‘히든 워커스’(2018년) 등이 호평을 받았다.
최근 우리 사회 페미니즘 이슈와 맞물려 지난 4~7월 초까지 열린 ‘히든 워커스’ 전에는 전에 없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의 화장품 만들기나 향 체험을 위해 외국인이나 아이와 함께 오는 엄마들이 주요 관객층이었다면 가장 관객 개발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여성과 남성들이 많이 방문해서 의미가 있었다”고 유 관장은 말했다.
박신의 교수는 “현대미술은 꾀를 부려서 되는 게 아니고 경쟁력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며 “화장품회사가 가진 여성성이라는 이미지를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도 일관되게 주제로 끌고 왔고 마사 로즐러나 바바라 크루거와 같은 교과서에 나올 법한 작품이나 작가들을 데려오는 국제 교류 역량이 돋보이는 전시를 많이 했다”고 평가했다.
여성과 여성성에서 몸과 신체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몸은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깨트리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통념을 깨기 위한 도발적인 작품들도(예를 들면 이중의 성을 가진 사람들의 누드 사진)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선보였다. 이러한 파격적인 작품들은 국립미술관에선 쉽게 볼 수 없어 의미가 있다.
유승희 관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2013년에 진행한 ‘텔 미 허스토리’로, 박물관과 미술관의 공간을 합쳐서 공간 전체에서 현대 여성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냈고, 미술관 운영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결과적으로 상도 받으면서 다시 힘을 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깊이 있는 연구 또한 전시의 탁월성을 위해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2017년부터 시작된 ‘c-랩(c-lab)’은 창작자와 기획자, 이론가, 연구자 등 문화예술계 및 연계 영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매년 선정된 주제에 대해 함께 사유하는 연간 프로젝트다. 동시대 시각예술 문화에 대한 연구, 전시, 교육, 아카이빙을 포괄하는 ‘c-랩’을 미술관의 중심에 두고 장기적인 시선으로 주제에 대한 심화된 접근을 탐색하기 위해 강화한 부분이다. 지난해 c-랩 1.0에서 ‘아름다움, 친숙한 낯섦’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결과자료집으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올해는 ‘감각 ± sense ±’를 탐구한다.
코리아나미술관의 연간 운영비는 약 10억 원에 이른다. 반면 임대료 수익과 티켓 판매료는 건물 유지비를 충당하고 조금 남는 정도라고 미술관 측은 설명했다. “회사가 어려울 때도 연구·개발(R&D)과 스페이스 씨 예산만큼은 아끼지 않고 배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업 미술관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데는 파운더의 의지 또한 중요하다. 유상옥 회장은 자신이 평생 모은 소장품을 지난 4월 미술관 및 박물관 측에 모두 기증한 바 있다. 이로써 스페이스 씨는 7800여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게 됐다.
지난 15년간의 미술관 운영을 통해 얻은 건 무엇일까. 가장 먼저 기업 및 제품의 브랜드 이미지 상승을 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인’ 전시를 시리즈로 하는 동안 화장품 브랜드 중 ‘자인’의 한방 라인을 함께 홍보할 수 있었다. 또 직원들의 자부심을 고양시킨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한 부분이다.
유승희 관장은 “화장품을 먼저 문화로 이해하는 게 중요해서 신입사원 교육을 미술관에서 하는 게 다른 회사와 차별점이 될 것 같고, 외국계 화장품 기업을 비롯해 다른 회사들의 직원 교육 의뢰도 종종 오는 편”이라며 “무엇보다 ‘우리 회사의 자산은 무엇이냐’는 설문조사 결과 스페이스 씨의 활동을 언급하는 결과가 가장 많이 나와 직원들의 자부심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예술 후원을 통한 기업문화 마케팅의 성과를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다. 회사가 제품을 직접 홍보하지 않더라도 현대미술의 주제를 집중 탐구함으로써 얻는 외부 마케팅 효과가 있다면 못지않게 구성원들을 향하는 내부 마케팅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박신의 교수는 “미술관 프로그램을 이용하게 만들거나 봉사활동을 하게 하는 식으로 직원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15년 한 길을 달려온 코리아나미술관의 향후 15년의 꿈은 무엇일까. 유 관장은 “꾸준히 진지하게 활동을 해 오고 있는 미술관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각인되면 좋겠다”며 “멈추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실험하는 장, 여성주의라는 고루할 수도 있는 주제를 더 집요하게 탐구해서 가치 있는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미술관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코리아나미술관 주요 여성 미술 기획전
히든 워커스 Hidden Workers
2018. 4. 5. ~ 6. 16.
더 보이스 THE VOICE
2017. 4. 20. ~ 7. 1.
댄싱 마마 Dancing Mama
2015. 10. 8. ~ 12. 5.
텔 미 허스토리 Tell Me Her Story
2013. 10. 17. ~ 12. 14.
자인(姿人) 근·현대 미인도
2013. 1. 17. ~ 2. 28.
마스커레이드 Masquerade
2012. 8. 30. ~ 11. 10.
자인(姿人) 근현대 미인도
2011. 12. 15. ~ 2012. 3. 31.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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