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와 같은 책들을 쓰고, 읽고, 공감하고, 환호하는 것은 앞서가는 청년세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라고 해석하고 싶다. 근면하고 성실한 태도의 장점을 몰라서도 아니며, 고생스럽게 살지 않겠다는 선언도 아니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아무것도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고함이다.
“그날의 사건은 교훈 그 자체였다. 이후 평생토록 내가 살아가야 할 태도를 결정하게 만들었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5년의 겨울, 아버지는 저녁 식탁에서 당신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땐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뭐든 참 귀했지. 어느 날 누가 기부를 했는지 학교에서 볼펜을 나눠주더라고. 한 반에 60명이 있었는데, 거기에 맞춰 우리 반에 볼펜이 딱 60개가 배당된 거야. 그런데 우리 반은 61명이었어. 우린 볼펜을 받지 못하는 단 한 명을 선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거든….”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씀하시고는 잠시 미소를 머금으시고 식탁 위에 놓인 술잔을 비우신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말씀을 참 잘하신다. 가장 절묘한 순간에 말씀을 끊고 간극을 두어서 듣는 이의 귀를 쫑긋하게 만드신다.
“그 한 명이 바로 나더군.”
나는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다. 말씀을 이어가신다. “그날 난 이런 생각을 했다. ‘행운을 바라지 말자’고 말이야. 61명 중에 단 한 명이 받지 못하는 그런 확률에서조차 나에겐 운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운을 바라며 인생을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그날부터 난 ‘무엇이든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반드시 실력으로만 가져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의 말씀은 문신처럼 내 가슴에 새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압권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너는 내 아들이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운은 별로 없을 거란 말이다. 그러니 성실하고 근면하게 실력을 키워라. 그리고 그 실력으로만 살아라!”
논리적 비약이 이만저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때도 알았다. ‘나의 운 없음은 아들인 너에게도 유전될 것이다’라는 말씀 아닌가! 나는 ‘풋’ 하고 실소를 터뜨렸지만, 그날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주 희한한 설득력이 있었다. 세상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국면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이야기는 일종의 도덕론이었다. ‘노력한 만큼만 가지려고 하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날로부터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나는, 그런 잊지 못할 이야기를 해주셨던 그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아졌다. 21세기 ‘성실’과 ‘근면’의 재해석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뭔가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오랫동안 기억하며 살다가 언젠가 나를 다시 찾아와서, 당신 덕분에 인생을 잘 살 수 있었다고 말해주면 정말 기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의 중에 내 아버지와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자기 서사를 신화화하는 것의 효과와 방법론을 설명하던 중에 일례로 들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노오오오력의 자기 신화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아니! 이건 배신에 관한 서사야!” 녀석의 눈빛이 반짝인다. “자신의 운명이 스스로를 배신할 때 그것을 어떤 태도로 감당해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지!”
이후 신화는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으로 완성된다는 이야기로 얼렁뚱땅 넘어갔다. 그 친구의 눈빛이 다시 흐릿해져 갔다. 그날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에 빠졌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다. 자신의 노력이 세계에 의해 눈곱만큼도 인정되지 못하고, 그렇게 끝없이 배신당한다면,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나는 내 아버지가 주신 교훈을 교훈으로 지키며 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날로부터 다음 강의까지 꼬박 일주일 동안 강의록을 다시 썼다. 다음은 그때 고쳐 쓴 강의록의 일부다.
“‘한 우물을 파라’는 20세기까지만 유효했던 구시대적 태도다. 과거의 사람들은 극히 지엽적이고 작은 영역에서라도 양질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 최소한 생존의 위협을 당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20세기까지의 목수는 일평생 목수로만 살아도 됐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고, 존경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MP3 전문가가 목수처럼 장인정신을 실천하겠다며 평생 그 기술 하나에만 매달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MP3라는 제품의 시효 만료와 함께 자신의 노동 가치도 동시에 소멸된다. 이런 경우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식의 성실과 근면은 오히려 스스로의 생존을 위험하게 만드는 태도가 된다.”
지금의 50대 이상 연령의 기성세대에게는 직업이나 직장을 바꾸는 것이 일종의 실패로 인식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명분으로 세상이 바뀐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이런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서 바로 그런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떨려나고 싶지 않은 직장에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 결국 떨려나게 되면, 그때서야 치킨 집을 할까 편의점을 할까 고민하는 중년의 직장인들이 한동안 워낙 많았던 탓이다.
세계의 변화 속도를 감안하면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을 살 수 있는 확률은 이제 거의 없다. MP3 전문가가 직업을 잃은 것은 그가 결코 근면하고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이 MP3를 순식간에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이 이례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명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을 압도적으로 대체해 버리는 기술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베스트셀러의 사회학이라는 말이 있다. 일정 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을 분석하면 시대상, 즉 당대의 사회학적 의미들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사람이 선택하고 읽는 것이지만, 책은 읽는 사람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지금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읽고 호응하는 책들을 살펴보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가령 2016년 출간돼 서점가에서 화제가 됐던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히노 에이타로 지음, 오우아)는 제목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메시지가 됐던 경우다. 신랄한 어투와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를 통해 노동 현실을 유쾌하게 비틀어 풍자하는 내용의 책이다. 책에는 ‘사축(社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회사에 매인 가축’이라는 뜻이다. 한국어판에 들어 있는 양경수 화가의 일러스트도 압권이다. 나이든 양복쟁이가 ‘경영자 마인드로 일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앞에 마주 선 젊은이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럼 경영자 마인드로 일할 테니 경영자의 월급을 주세요.” 읽다 보니,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먹는다’라는 격언 뒤에 누군가가 ‘그럼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빨리 죽겠군’이라고 적어놨던 낙서가 떠오른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가 취하는 이런 식의 신랄한 태도는 우선 감각적으로 매우 통쾌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청년세대가 시대에 던지고 싶은 강렬한 메시지를 더불어 담고 있다.
올해 4월에 출간된 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역시 이 시대 우리 젊은이들의 내면적 정황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열정도 닳는다. 함부로 쓰다 보면 정말 써야 할 때 쓰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는 열정을 쏟을 일이 찾아올 테고 그때를 위해서 열정을 아껴야 한다. 그러니까 억지로 열정을 가지려 애쓰지 말자. 그리고 내 열정은 내가 알아서 하게 가만 놔뒀으면 좋겠다. 강요하지 말고, 뺏어 가지 좀 마라. 좀.”
-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중 ‘내 열정은 누굴 위해 쓰고 있는 걸까’의 한 부분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의 저자는 ‘보람’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열정’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다. 보람이든 열정이든 그게 나쁜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함부로 던질 말도 아닌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강요에 실리는 순간 그것은 무례가 되고 폭력이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무례와 폭력이 용인돼 왔을까. 답은 쉽다. 그렇게 살아야만 대가가 주어졌었기 때문이다.
성실과 근면이라는 인간적 덕목은 농경사회의 오랜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땅은 비교적 정직한 대가를 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때때로 홍수가 나기도 하고 가뭄이 들 때도 있었지만 긴 세월을 놓고 보면 그래도 믿고 따를 만한, 자연의 섭리라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래서 농경사회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한 만큼의 수확을 기대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만든 현대의 사회적 환경은 땅만큼 정직하지 않다. 정직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수탈’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근대적 가치가 전근대적 방식으로 강요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고용이 엄청나게 적체된 환경에서 기업은 여전히 순응형 인간들을 골라 쓸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의 기업들이 급속히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와 같은 책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청년들이 근면하고 성실한 태도의 장점을 몰라서도 아니며, 고생스럽게 살지 않겠다는 선언도 아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미 차고도 넘치도록 근면하고 성실하다. 그 대신 이 책들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아무것도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고함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근면하고 성실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겠는가. 과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겠는가.’
그렇다. 저 책들은 포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배신감에 관한 이야기다. 더 이상 이용당하지도 배신당하지도 않겠다는 것. 그래서는 도무지 미래가 없다는 것. 따라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책으로 전하는 이 시대 청년들의 메시지다. 이 책들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젊은 애들의 투정’ 정도로 여겨진다면,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당신은 불치의 꼰대다.’ 꼰대계량기로서도 그 기능이 매우 훌륭한 책들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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