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한 사회의 취미 활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회의 경제·문화·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회적 변화와 함께 취미사가 발달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big story]화투에서 골프까지 취미 도구의 변천사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농업 생산성이 증가하고 상공업이 융성했다. 신분질서는 느슨해지고 농민은 빈번하게 봉기하면서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내재적 변동이 도래한 것이다. 잘사는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오랑캐에게 배우는 것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북학파는 개화파에게 바통을 넘긴다. 그러나 일본에 무릎을 꿇으면서 자주적 근대화는 좌절한다.

일제가 강요한 식민지 근대화는 우리 사회를 둘로 가른다. 실력을 길러서 자주적 근대화로 나가려는 계몽주의자와 시대를 잊고자 유행에 몸을 던진 모던 보이로 나뉜다. 거의 모든 근대국민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나뉜 둘은 미디어를 통해 근대를 만난다. 지식인에게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유성기는 지위 상징(status symbol)이면서 동시에 어른용 장난감이다.

식민지 근대화
조선 지식인 근대 미디어에 빠지다
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를 발행하면서 신문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진정한 신문의 역사는 서재필과 함께 시작한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일은 그래서 신문의 날이 된다. 1898년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창간 봇물이 터지던 해에 매일신문에 이어서 독립신문도 일간으로 발행한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신문은 매일신보(1910년)와 조선일보(1920년), 동아일보(1920년), 시대일보(1924년) 등 총독부 기관지와 민간지로 양분된다.

신문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계몽을 위한 수단이었다. 신문도 변화를 겪는다. 근대도시문화의 일부로써 점차 상품화된다. 식민지 지식인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는 손에 항상 신문을 들고 있다.

신문지상 만문만화(漫文漫畫)는 예리하고 풍자적이기는 하지만 심하게 불쾌하거나 잔혹하지 않게 시대의 얼굴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소설과 시 등 근대문학을 접하는 통로 역시 신문이다.
1926년 8월 5일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이 현해탄에 뛰어든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이다. 윤심덕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사의 찬미’를 일본에서 녹음하고 돌아오던 길이다. 이 음반은 조선에서 10만 장이나 팔린다.

유성기도 없으면서 음반을 샀다는 말이 된다. 조선 음반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한 일본 음반회사들은 경쟁적으로 조선에 진출한다. 1928년 빅타 총 대리점, 1929년 콜롬비아 경성지점, 1931년 포리도루 조선영업소 등. 1935년 조선에서 팔린 레코드는 1500만 장, 이 중 조선말로 부른 노래는 40만~50만 장이다. 손에 신문을 든 조선 중년은 집에 유성기를 들인다.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에서 첫 라디오 전파를 송신한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275명밖에 없던 때다. 1933년에는 3만2000대로 늘어나고 1945년에는 22만8000대에 이른다. 읽는 레저 도구에서 듣는 레저 도구로 바뀐다.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레저 세계로 들어간다. 진짜 근대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레저의 상업화가 진행된다.

서구적 근대화(1946~1992년)
화투에서 TV, 마침내 골프로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는다. 자주적으로 쟁취한 광복이 아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지만 곧바로 한국전쟁을 겪는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산업시설마저 파괴된다. 구군부가 주도하는 첫 번째 발전 전략을 실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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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 합판, 신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일으킨다. 경부고속도로, 항구, 발전소 등 산업인프라를 구축한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한 수입 대체 전략을 시행한다. 중화학공업화에는 성공했으나 두 차례 오일쇼크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떠받치고 있던 독재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서울에 봄이 찾아온다. 1979년 서울의 봄은 짧았다. 또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급속한 경제 성장에 성공한다. 정치적으로는 순탄치 않았다. 1985년 ‘학원안정법’을 추진한다. 1986년 수상정부제라는 개헌안을 제시한다. 모두 무산된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더 큰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1993년 2월 민선민간정부 출범으로 결실을 맺는다.

통행금지로 하루 4시간을 빼앗긴다. 장시간 노동으로 탈진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20년 동안 할 수 있는 여가 활동은 거의 없었다. 장시간 노동에 반비례해서 노동생산성은 낮았다. 형식적인 출근시간을 보내고 사우나로 직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점심시간에는 으레 간단한 음주와 화투를 즐겼다.

오죽하면 특급 호텔 사우나에 화투를 칠 수 있는 방까지 만들어서 운영했을까. 한 달에 두 차례 쉬는 일요일에는 계곡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닭백숙과 닭볶음탕은 전국 유명 산에 있는 유원지 단골 메뉴로 등극한다. 또 어김없이 화투를 친다. 이나마도 1990년 11월 1일 유원지 취사를 금지하면서 사라진다.

숨통을 열어준 중년의 레저 도구는 TV다. 1956년 5월 12일 TV 방송국을 설립하고 11월 1일부터 정규 방송을 시작한다. 제대로 운영된다면 기적이다. 1957년 한국일보가 인수해서 대한방송주식회사로 다시 시작한다. TV 수상기 보급 대수는 3000대. 1958년 7000대로 늘기는 했지만 1961년 10월 15일 또다시 폐업한다.

1961년 정부가 나서서 한국방송공사(KBS)를 시작한다. TV 수상기 2만 대를 수입해서 월부로 판매한다. 시장이 작동한다. 1964년 12월 7일 동양방송 TBS가 개국한다. 로터리 채널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중년 가장이었다.

1980년 12월 컬러TV 방송을 시작한다. 흑백TV는 자녀들 방으로 옮기고 컬러TV를 산다. 화질이 정말 좋다는 아남 29인치 컬러TV로 바꾼 데 이어서 화면이 그렇게 크다는 프로젝션TV로 한 번 더 바꾼다. TV에 이어서 중년을 자극한 것은 VCR다. 1979년 삼성전자에서 VCR를 생산하기 시작하지만 1983년까지, 보급률은 1.5%에 그친다. 계기는 ‘88 서울올림픽이다.

중계권료의 상당 부분을 내는 미국 시청자를 위해 서머타임을 실시하고 경기시간도 조정한다. 정작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을 보기 힘들어진다. VCR를 구입한다. 예약녹화 기능을 이용해 녹화해 놨다가 퇴근 뒤 올림픽 경기를 본다. 영화를 보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VCR 보급과 함께 동네마다 비디오대여점이 문을 연다. 굳이 극장에 가지 않고도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올림픽이 끝난 1990년 VCR 보급률은 27.8%로 증가하고 2000년에는 78.6%로 높아진다. 읽는 레저 도구에서 듣는 레저 도구를 거쳐 마침내 동시에 보고 듣는 레저 도구를 손에 넣는다.

1980년을 전후해서 우리나라 레저 산업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1980년 14만 달러에 불과하던 골프용품 수입액은 1981년 312억 달러로 급증한 데 이어서 1983년에는 2574억 달러로 폭증한다. 연평균 164.1%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세다.

스키용품도 같은 기간 136억 달러, 310억 달러, 741억 달러를 각각 기록 연평균 79.7%씩 성장한다. 아웃도어 레저 산업 전체적으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인 것은 텐트를 제외한 캠핑용품이다. 1975년에는 600만 원에 불과했으나 1980년 67억4700만 원을 생산한 데 이어서 1981년에는 171억5400만 원, 1982년에는 254억9100만 원을 각각 생산해 연평균 229.9% 성장을 기록한다.

세계화(1993년~현재)
보고 듣고 느끼고
1993년 2월 25일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군내 사조직 척결,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등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IMF 외환위기의 시기였다. 세계화와 사회적 국유화는 공존할 수 없었다.
[big story]화투에서 골프까지 취미 도구의 변천사
외환위기는 소득과 소비 양 측면에서 양극화를 초래한다. 사회는 둘로 쪼개진다. 고급 소비시장에서는 명품 소비가 이루어진다. 대중 소비시장에서 아웃도어 열풍이 분다. 외환위기와 함께 등산이 아웃도어 레저 활동 1위를 차지한다. 2008년부터는 걷기가 줄곧 1위를 차지한다. 2010년에는 자전거가 처음으로 5위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아웃도어 레저 산업이 변동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패션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 전 세계 2위 시장으로 성장한 한국 아웃도어 레저 시장규모는 2014년 7조 원을 기록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2017년 시장규모는 4조5000억 원으로 연이어 감소하고 있다.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의외의 결과는 골프 산업에서 나오고 있다. 2017년 골프장 이용객 수가 3542만 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골프 인구는 377만 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2015년 399만 명보다 22만 명 줄었다.

하지만 골프 인구 1인당 골프장 이용 횟수가 2015년 8.5회에서 2017년 9.4회로 늘었기 때문에 이용객 숫자가 증가한 것이다. 퍼블릭 골프장이 증가 숫자가 회원제 골프장 감소 숫자보다 더 많고, 스크린골프 이용객들이 필드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가 활동이 변하면 여가 장비도 변한다. 북미나 서구유럽 선진국들은 골프에서 요트와 승마로 레저 인구가 이동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이동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골프가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50~60대 남성들이 대거 골프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 레저 활동은 어떻게 바뀔까. 활동 변화는 어떤 새로운 레저 도구를 도입할까. 가장 큰 변화는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한 디지털화다. 2000년 처음으로 통계청 사회조사의 문화여가 항목에 포함된 컴퓨터 게임 및 인터넷 검색은 줄곧 10%대를 머물다가 2017년 31.3%로 껑충 뛴다.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변동이다. TV 시청도 75.2%로 조사를 시작한 1990년 이래 처음으로 70%대를 돌파했다. 언뜻 보면 비율만 증가한 듯하다. 그렇지 않다.

2008년 IPTV를 도입하고 2010년 아날로그 방송을 중단했다. 2017년 IPTV 가입자는 케이블TV 가입자를 앞질렀다. IPTV, 즉 스마트TV는 이전의 레저 도구와 완전히 다르다. 디지털이다. 스마트폰으로 시청하면 모바일이 된다. 앞으로 레저 활동은 모바일 인터넷에 연결된 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 가상현실(VR)이 결합하면 다시 한 번 도약한다. 보고 듣는 레저 도구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레저 도구로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이 신문을 손에 들었을 때 계몽과 독립을 위한 투쟁은 정점을 향해 달린다. 라디오, TV, VCR 등 아날로그 레저 도구를 섭렵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전통에서 근대로 전환을 완성한다. 골프, 스키, 등산, 걷기, 자전거 등 아웃도어 열풍은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선진 경제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년이 스마트TV, 스마트폰, VR 등 레저 도구를 손에 쥐고 있다. 신경제 정보통신기술로 미래 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모바일과 디지털이 결합된 새로운 세계에서 대한국인이 일어서고 있다.

최석호 연구소장은…
서울신학대 관광경영학과에서 강의하며,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을 지내고 있다. 전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레저경영전문대학원장도 역임했으며, 쓴 책으로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전성시대>, <골목길 역사산책-개항도시편>, <골목길 역사산책-서울편>, <시간편집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