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성지가 된 에스토니아 성공 비결
[한경 머니 기고=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사진 한경DB]에스토니아는 1991년 독립 당시 변변한 경제 인프라도 없는 빈털터리 상태였다. 하지만 매년 1만 개가 넘는 기업이 문을 열고 그중 200여 개가 스타트업일 정도로 현재는 유럽에서 창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국가다. 이처럼 단기간 내 스타트업의 성지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발트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 국제사회에서 스타트업의 성지(聖地)로 불리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전자정부 시스템에서 최선두에 서 있는 나라다. 에스토니아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전자정부를 추진해 왔고 세계 최초로 전 국민 전자ID 시스템과 전자투표 시스템을 도입한 바 있다. 또 2015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자시민권(e-residency)을 발행해 전 세계인들이 에스토니아의 시민권을 얻어 에스토니아에 회사를 설립하고 금융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전자시민권은 온라인으로 신청한 후, 100유로만 내면 누구나 발급받을 수 있다. 시민권을 받으면 온라인으로 창업할 수 있고, 에스토니아에 머물지 않아도 행정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154개국에서 3만여 명이 전자시민권을 받았으며, 이들 중 5000여 명이 회사를 설립했다. 이 덕분에 탈린은 스타트업의 성지로 등극했다.

에스토니아의 국토 면적은 4만5228㎢로 한국의 절반 크기에 불과하다. 그나마 절반은 숲이어서 임업이 최대 산업이었던 가난한 나라였다. 인구는 130만 명으로 서울의 7분의 1 수준이다. 발트 3국의 일원인 리투아니아(340만 명)와 라트비아(230만 명)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 에스토니아는 1991년 구소련에서 분리 독립할 당시만 해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000달러였지만 지난해 1만8000달러를 기록하면서 북유럽의 강소국(强小國)으로 성장했다.

에스토니아는 국가의 모습을 갖춘 직후인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로이센과 스웨덴,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았다. 1940년 구소련의 16번째 공화국으로 복속됐다가 1991년 독립했다. 독립 당시 에스토니아는 빈털터리였다. 변변한 인프라도 없었다. 에스토니아 정부와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구소련의 계획경제를 버리고 시장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데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에스토니아는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유럽에서 창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핫 스폿’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에스토니아에서는 매년 1만 개가 넘는 기업이 새로 문을 여는데, 그중 200여 개가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의 성지가 된 에스토니아 성공 비결
◆코딩 교육 등 인재 양성에 총력 기울여

에스토니아가 스타트업의 성지가 된 기적의 비결은 정보통신기술(ICT)에 있다. 에스토니아는 독립 직후부터 ICT를 국가 기간산업으로 정해 소프트웨어 인재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에스토니아는 전 세계에서 ‘코딩(coding)’ 교육에서 선두주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1996년부터 전국 초중고교생에게 코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학년별 맞춤형 코딩 교육 프로그램인 ‘프로지 타이거(Proge Tiger)’를 만들었다. 코딩은 컴퓨터가 이해하는 문법으로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인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의미한다.

에스토니아에선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퍼즐이나 블록 맞추기 등의 게임 방식을 이용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원리를 배운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진행되며 독립 교과목 형태다. 초등학생에게 그래픽 관련 프로그래밍 언어, 중학생에게 로봇 교육, 고교생에게는 웹사이트 제작 등을 가르친다. 코딩이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지능형 로봇, 빅데이터 분석 및 활용 등 제4차 산업혁명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 시스템 덕분에 에스토니아는 ICT 인력을 풍부하게 보유하게 됐다.

에스토니아는 또 스타트업 인프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추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전체 가구의 87.9%가 컴퓨터를 갖고 있고, 85%는 광대역 통신망을 활용하고 있다.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림 지역에서도 인터넷이 터진다. 전국에 초고속 통신망이 깔려 있고 금융 거래의 99.8%가 인터넷뱅킹으로 이뤄진다. 2010년부터 원격진료를 시행해 현재 처방전의 95%가 온라인으로 발급된다. 지방선거는 국민의 25%가 전자투표로 참여한다. 이 때문에 에스토니아는 ‘e-스토니아’라고 불릴 정도다.

또 4세대(4G)보다 40~50배 빠른 5세대(5G) 네트워크가 세계 최초로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구축됐다. 에스토니아는 2000년 세계 최초로 인터넷 접속을 (음식과 주거처럼) 기본 인권으로 선언했다. 같은 해 디지털 서명을 필기 서명과 동일한 효력으로 인정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 단일 조치로 종이가 전혀 필요 없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어느 누구도 펜으로 서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금 납부와 계좌 개설, 대출 수령, 처방전 받기 등 그 밖에 대부분의 일반 업무(결혼과 이혼은 예외) 처리 과정에서 종이 서류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기업을 설립하기가 너무나 쉽다. 200유로와 15분만 투자하면 법인을 설립할 수 있다. 온라인으로 모든 절차를 마치기 때문에 관공서를 찾아갈 일도 없다. 초기 창업자금은 ‘창업경진대회’를 활용하면 된다. 우승자에게 상금과 함께 사무실 제공, 경영·기술 멘토 서비스 등의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이 에스토니아 전역에서 매주 열린다.

게다가 법인세율은 0%다. 토종 기업뿐 아니라 외국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한다. 아무리 이익을 많이 내도, 그 돈을 투자하는 데 쓰거나 내부에 쌓아두면 세금을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다. 이익을 배당할 때만 20% 세율로 과세한다. 상속·증여세와 부동산보유세도 없다. 전자시민권 덕분에 외국인도 내국인과 똑같이 에스토니아에 회사를 설립하고 은행 계좌를 열 수 있다.
블록체인 기술 활용, 세계에서 가장 앞서 에스토니아에는 최근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 스타트업이 많이 진출하고 있다. 에스토니아가 암호화폐 사업에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는 블록체인 기술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 2007년 러시아로부터 디도스 공격을 받은 후 일찌감치 보안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게 계기였다.

당시 러시아의 디도스 공격으로 에스토니아의 기간 전산망이 마비됐었다.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은 정부 중앙부처, 총리실, 의회, 은행 등에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다. 급기야 에스토니아 전체 인터넷은 2주간 마비돼 국가적으로 대혼란이 벌어졌다. 이후 에스토니아는 범정부 차원에서 블록체인 기술 개발에 나섰다. 토마스 헨드리크 일베스 전 에스토니아 대통령은 “당시 인터넷 마비 사건 이후 정부의 민주주의 정책 결정 시스템은 물론 정책 집행 시스템을 디지털 기술로 개혁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에스토니아는 2008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한 후 2012년부터는 입법, 사법, 행정 등 정부 업무 영역 전체로 블록체인 시스템을 확대했다.

블록체인은 블록에 데이터를 담아 체인 형태로 연결, 수많은 컴퓨터에 동시에 이를 복제해 저장하는 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중앙집중형 서버에 거래 기록을 보관하지 않고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사용자에게 거래 내역을 보내주며, 거래 때마다 모든 거래 참여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이를 대조해 데이터 위조나 변조를 할 수 없도록 한다.

에스토니아는 지난해 블록체인 시스템을 활용해 ‘에스트코인(Estcoin)’이라는 국가 암호화폐 발행 계획까지 추진했었다. 에스토니아는 에스트코인 암호화폐를 유로화와 연동해 가치를 고정시키고, 자국 내에서 정식 통화로 교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의 강력한 반대로 에스토니아는 국가 암호화폐 발행 계획을 중단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어떤 유럽연합(EU) 회원국도 자국 통화를 도입할 수 없다면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에스토니아는 2010년 단일통화로 유로화를 쓰는 국가들로 구성된 유로존에 가입한 바 있다.

케르스티 칼률라이드 에스토니아 대통령은 “암호화폐를 발행할 계획이 없다”면서 “유로화 사용을 강조하는 드라기 총재와 입장이 같다”고 밝혔다. 에스토니아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너무 빨리 앞서 가려다 제동이 걸린 셈이다. 에스토니아는 에스트코인을 자국에 기업을 설립하거나 전자시민권에 등록하는 외국인들에게 인센티브로 활용할 예정이다.

이처럼 에스토니아는 물론 각국이 블록체인 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개방형 정부 시스템 구축을 위해 블록체인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미국 총무청은 조달 시스템 혁신을 위해 블록체인 적용을 실험하고 있다.

미국의 주정부들도 나름대로 블록체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2016년 6월 버몬트주에 이어 2017년 3월 애리조나주, 6월 네바다주, 7월 델라웨어주 등이 주정부 차원에서 블록체인 거래 시 세금을 면제해주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16년부터 국가 차원에서 블록체인 도입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블록체인 기반 핀테크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스위스는 세계 최초로 제도권 은행에서 가상화폐 거래를 승인한 국가다. 중앙과 지방정부가 가상화폐 허브 국가를 목표로 한다.

중국도 제13차 5개년 국가정보화계획에서 블록체인을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인공지능, 바이오 유전공학 등과 함께 중점 육성할 기술로 명시했다.

에스토니아가 스타트업 강국이 된 또 다른 이유는 2003년 설립된 세계 최대 인터넷 전화 업체인 스카이프 덕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창업 멤버들은 4명의 에스토니아 엔지니어와 스웨덴 및 덴마크 사업가들이었다. 스카이프는 2005년 미국 이베이에 팔렸다. 매각 대금인 26억 달러는 당시 에스토니아 GDP의 18%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스카이프를 공동 창업한 4명의 에스토니아인 엔지니어는 지분을 팔아 번 자금으로 앰비언트 사운드 인베스트먼트(ASI)라는 투자회사를 세워 자국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또 스카이프에서 일했던 에스토니아 출신 엔지니어들은 스카이프가 이베이에 이어 2011년 마이크로소프트(MS)에 팔리자 자기 회사들을 설립했다. 국제송금 서비스를 제공하는 핀테크(금융기술) 업체 트랜스퍼 와이즈가 대표적인 회사라고 볼 수 있다. 트랜스퍼 와이즈는 2011년 영국에서 출범해 현재 세계 1위 온라인 송금 서비스 업체로 우뚝 섰다. 기존 은행보다 해외송금 수수료가 최대 10분의 1 정도로 저렴한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사용자가 늘면서 급성장했다.

이런 기업들을 세운 에스토니아 출신 엔지니어들은 스스로를 ‘에스토니아 마피아’라고 부른다. 이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진출해 네트워크를 쌓고 이를 고국에 있는 후배 창업자에게 연결해준다. 일부는 탈린으로 돌아와 고국 스타트업에 경험과 지식을 전수하고 있다.

이런 스타트업의 성공 덕분에 에스토니아의 ICT 분야는 전체 GDP의 7%를, 수출의 14.2%를 책임지는 핵심 산업으로 성장했다. 작지만 강하고 잘사는 나라가 된 에스토니아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려는 국가들이 줄을 잇고 있는 이유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