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혜리 아트 앤 컬처 전문 저널리스트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담은 프레스코화다. 밀라노 대성당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다. 유네스코는 1980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과 함께 이 작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와 함께 다빈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임에도 이 그림을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터넷에서 예약을 하거나 일찌감치 일어나 줄을 섰다가 당일 입장권을 받아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입장해도 작품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5분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도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볼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도미니코 수도회에 속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 옆으로 ‘체나콜로(Cenacolo)’라고 쓰인 곳이 입구다. ‘체나콜로’는 수도원의 식당,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한 식당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성경 마태복음 26장)
예수는 이 만찬을 마친 뒤 겟세마네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곧바로 끌려 나가게 된다. ‘최후의 만찬’에서 행한 빵과 포도주의 나눔은 가톨릭교회에서 행하는 영성체 미사의 중요한 의식이 됐다.
이를 다룬 그림을 15세기 로마 교황권에서는 더욱 장려했다. 특히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소재였다. 식사를 묵상의 연장으로 만든다는 기대에서 ‘최후의 만찬’ 장면을 수도원 식당에 실물 크기로 거대하게 그리곤 했다. 다빈치 외에도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 그린 화가들은 많지만 다빈치의 작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과 함께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로 그린 작품(세로 460cm, 가로 910cm)은 도판을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의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의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과 생생한 서사, 우아한 선과 동작의 표현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다.
다양한 등장인물의 내면을
캔버스에 담다
다빈치가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495년 초부터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셋. 피렌체를 근거로 활동하던 그는 밀라노 루도비코 공작의 초대를 받아 밀라노에 와서 ‘궁정 화가이자 공학자’라는 직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렇다 할 걸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다빈치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밀라노공국의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을 받고는 ‘나는 기적을 행하고 싶다’고 수없이 공책에 적으며 ‘천재’의 자존심을 건 일생일대의 역작을 완성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완벽한 ‘최후의 만찬’을 위해 그는 10년간의 연구와 치밀한 준비를 거쳐 작업 시작 3년 만인 1498년 작품을 완성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쭈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태복음 26장)
다빈치가 표현하고자 했던 순간이다. 고정된 이미지의 최후의 만찬보다 더 사실적이고 생생한 작품을 그리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예수와 12제자가 등장하는 그림 안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다빈치의 천재성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마치 환등기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역동적인 상황의 묘사력이다. 각 등장인물의 몸짓과 손짓, 미묘한 속임수와 암시를 통해 예루살렘의 어느 방에서 펼쳐진 역사적 사건을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전체 화면의 조형성이었다.
사실적인 현장감을 중요하게 여긴 다빈치는 종교화의 등장인물들이 달고 있는 후광을 걷어내 버렸다. 제자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베드로와 요한, 유다가 화면상 예수의 왼쪽에 있다. 예수의 오른 팔과 베드로의 말을 들으려고 기울인 요한의 자세가 삼각형을 이룬다. 자세히 보면 베드로의 손에 칼이 들려 있다. 의심이 많은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예수가 체포될 때 로마 병사의 귀를 자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끼어든 베드로 때문에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유다는 오른손에 돈주머니를 쥐고 있다. 그림 속 유다는 치켜 올라간 눈썹에 매부리코, 기다란 턱에 각진 하악골을 가진 노인으로 표현하고 빵을 집으려고 왼손을 뻗다가 소금통을 엎지르는 것으로 설정했다. 왼손잡이는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라는 부정적인 문화적 연관성을 함축하고 있다. 소금통을 엎는 것은 불길함을 의미한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하고 독특하며 내면을 표현하고자 다빈치는 시장과 궁정, 이웃 마을 등 가리지 않고 다니며 수도 없이 많은 스케치를 그리고 고심했다. 유다가 은전 서른 냥에 예수를 팔았다는 사실에 근거해 그의 사악한 성품이 드러나는 얼굴을 찾기 위해 1년이 넘게 밀라노 외곽의 빈민가 보르게토 마을을 찾았다.
긴장이 도는 상황인데도 가운데서도 제자 요한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댄 브라운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옆자리에 앉은 이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 예수의 숨겨둔 아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겠느냐는 상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디까지나 픽션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전개였다. 그러나 학자들 대다수는 예수의 옆자리에 앉은 인물이 여성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다빈치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체적 아름다움은 곱슬머리에 이목구비가 여성적인 청년이나 사춘기 소년, 심지어 사춘기 이전의 소년이었다는 이유에서다.
예수의 얼굴은 누구를 모델로 했을까. 그의 공책에는 예수의 모델로 고려했음직한 사람들의 이름이 몇 개 적혀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크리스티 경매 최고가 경신한
<살바토르 문디>
다빈치는 예수의 머리를 중심으로 정확한 계산에 의한 원근법의 공간을 만들었다. 제자들을 각각 세 명씩 네 무리로 나눠 예수를 중앙으로 각각 두 무리씩 배치해 대칭을 이루게 했다. 그림의 배경에는 세 개의 창이 나 있는데 이것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특히 중앙의 창은 예수의 상반신을 감싸는 후광효과를 절묘하게 낸다.
다빈치는 수도원 식당이 확장돼 보이도록 중앙 투시도법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면 안쪽으로 후퇴하는 천장과 측벽의 선들이 모두 중앙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머리로 집중하면서 인물을 강조했다. 천장의 바둑판무늬는 관람자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축소돼 화면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완벽한 이 그림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다빈치는 작품을 그릴 때에 작품의 수정이 가능하고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템페라와 기름을 섞어 쓰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표현이 가능해졌지만 식당의 습기 때문에 안료가 쉽게 벗겨져 버려 원형을 거의 잃었다.
이 작품은 5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수차례 파괴와 손상을 겪었다. 심하게 손상된 작품은 수차례 복원을 거쳤다. 손을 안 보느니만 못한 복원이 대부분이었다. 마지막 복원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1년간 이뤄졌다. 워낙 손상이 심해서 원래 색깔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던 것을 후배 화가가 당시 작품이 완성된 직후에 베껴 그린 그림이 온전히 남아 있어 이를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로도비코의 통치는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이듬해인 1499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궁정은 해산됐다. 화려한 삶을 살았고 너무나 많은 호기심과 재능을 지녔던 다빈치의 말년은 어땠을까. 피렌체로 돌아가 숨죽이고 있던 그에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중부 프랑스의 루아르 지역에 아름다운 성과 많은 연금을 제공하며 초대했다. 그는 프랑스로 가 3년간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1519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끝까지 자신을 지켜준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그가 지니고 있던 <모나리자>를 왕에게 선물했다.
다빈치의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를 비롯해 20여 점 정도 남아 있다. 이 중 유일한 개인 소장 작품이 지난해 11월 15일 전 세계의 이목을 끈 가운데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구세주)>다.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고 왼손에는 수정 구슬을 들고 있는 예수의 상반신을 담은 그림으로 다빈치가 1500년쯤에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날 경매에서 역사상 최고 가격이자 기존 최고가의 2배를 훨씬 뛰어넘는 4억5030만 달러(약 4978억9000만 원)에 낙찰됐다. 기존 최고가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로 2015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940만 달러(약 1982억 원)에 낙찰됐었다.
<살바토르 문디>는 지금은 최고의 몸값을 기록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 그림은 유럽 귀족들의 손을 거치며 심한 덧칠 등으로 손상됐고,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채 수백 년을 떠돌았다. 1900년쯤 영국의 그림 수집가 프레더릭 쿡 경이 사들였고, 1958년 소더비 경매에서 단돈 45파운드(약 7만 원)에 팔렸다. 당시 이 작품은 다빈치의 공방에서 일하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2005년 그림의 붓질과 안료 등에 대한 정밀 감정 결과 이 그림이 다빈치의 진품이라고 확인했다. 2011년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다빈치의 작품이 처음 전시됐으며 2013년 러시아 억만장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그가 스위스 미술품 딜러인 이브 부비에르에게 지불한 돈은 1억2750만 달러(약 1400억 원)였다. 지난해 세기의 경매에서 약 5000억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작품을 사들인 사람은 사우디의 왕자로 알려져 있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화제가 되는 인물, 르네상스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위력이다. 함혜리 저널리스트는…
30여 년 신문사 기자 경력의 아트 앤 컬처 전문 저널리스트. 서울신문 파리특파원과 논설위원을 거쳐 문화부 선임기자로 미술을 담당했다. 저서로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아틀리에, 풍경>, <미술관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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