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언젠가 함께 올라가 주겠니?”
“언제?”
“글쎄….”
“한 10년 뒤쯤?”
“약속해 주겠어?”
“좋아. 약속할게.”
이 짧은 영화 대사는 이후 피렌체를, 특히 피렌체의 심장인 두오모(Duomo) 쿠폴라를 ‘연인들의 성지’로 만들어 버렸다. 두 남녀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의 동명 소설을 나카에 이사무 감독이 2001년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아픈 사랑을 하는 연인들에게 바쳐진 영화 같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이라는 대사로 영화가 시작하면 조용하고 낮게 깔리는 피아노 소리. 영화의 테마곡인 요시마타 료의 ‘더 홀 나인 야즈(The Whole Nine Yards)’가 이내 관현악으로 바뀐다.
남쪽에서부터 항공 촬영된 피렌체의 전경은 왜 사람들이 그 많은 세월 동안 피렌체를 꿈꾸고, 또 그곳에서 사랑하고자 하는지 보여준다. 붉은 도시의 지붕들을 지나 카메라가 아르노 강을 비추면서 피렌체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면 정체 모를 깊은 탄식의 신음을 내뱉게 한다.
아일랜드 분위기가 물씬 나는 몽환적인 엔야(Enya)의 ‘더 켈츠(The Celts)’가 깔리면서 남자 주인공 준세이는 자전거를 타고 피렌체 곳곳을 달린다.
하늘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는 피렌체의 골목들은 아름답게 퇴색된 돌바닥과 건물 외벽으로 따스하게 달려든다. 그러다가 갑자기 넓게 트이는 두오모 광장, 사랑스러운 아르노 강변, 그리고 폰테 베키오(Ponte Vecchio)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폰테 그라지에를 건너 다시 좁은 골목들. 준세이를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는 피렌체의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가장 친근한 공간들을 훑어 내린다. [영화 속 준세이와 아오이가 10년 전 약속을 지키며 함께 쳐다보던 그 광경. 많은 여행자들은 피렌체 여행의 이유를 이곳에서 찾기도 한다.]
피렌체의 골목이 다른 유럽 도시의 골목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골목 사이사이의 모습들 때문이다. 중앙역(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에서 천천히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쪽으로 걸으면 좁은 골목 사이로 보이는 두오모에 가슴이 뛴다. 두오모뿐이 아니다. 골목과 골목에서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마치 그 모습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구성된 그림마냥 아름다워 보인다. [단순한 듯 깊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피렌체의 골목들은 특히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준세이가 자전거와 스쿠터를 타고 피렌체 전체를 훑어 내리던 상징적 공간들이다.]
피렌체의 중심은 두오모 광장이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길고 긴 줄서기, 단테가 세례 받은 곳으로 유명한 산 지오반니 세례당 동쪽 문인 ‘천국의 문’에 부조된 그림을 보자고 몰려든 사람들, 지오토의 종탑 꼭대기를 쳐다보다가 목이 아픈 나머지 아예 바닥에 누워 종탑을 올려다보는 사람들로 언제나 그득한 곳이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해서 피렌체와 피사를 거쳐 지중해와 만나는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 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르노 강. 이 강에 놓인 다리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폰테 베키오다. 하지만 영화는 폰테 베키오를 직접 터치하지는 않는다. 준세이의 자전거는(영화 후반부 스쿠터로 바꿔 탄 준세이도 마찬가지지만) 폰테 베키오 바로 옆 폰테 그라지에를 건넌다. 아마도 폰테 베키오를 그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폰테 베키오는 <신곡>의 저자 단테가 연인 베아트리체와 재회했던 곳. 그의 나이 열 살 때다. 아버지와 함께 피렌체의 실력자인 폴코의 집을 방문했던 단테는 당시 아홉 살의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어린 나이지만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 가슴에 담아 버린 단테. 그리고 9년 후 단테는 폰테 베키오를 걷다가 우연히 베아트리체와 재회한다.
하지만 얼마 후 베아트리체는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폰테 베키오에는 아픈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연인들이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를 아르노 강물에 버리고 있다. 다시 <냉정과 열정 사이>. 1994년 유학 온 준세이는 자전거를 타고 피렌체의 속살인 좁고 깊은 골목을 부드럽게 애무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들은 살포시 잠에서 깬 연인의 귓불을 살짝 물어주고, 준세이의 손길이 닿아 되살아나는 아름다운 미술품들은 깊은 신음을 뱉어내며 피렌체와 깊은 키스에 빠져든다.
1997년 준세이가 피렌체 생활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영화는 이렇게 피렌체를 담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랑하는 아오이를 잊지 못하는 준세이마냥 피렌체를 다녀온 사람들은 오랫동안 피렌체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는다.
아오이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준세이. 2000년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 약속에 이끌려 준세이는 홀로 두오모 쿠폴라로 향하는 464개의 좁고 긴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준세이는 그곳에서 아오이를 만난다.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가 돼 버린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주교좌성당을 두오모라고 부른다.
피렌체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꽃의 성모 대성당’이라는 뜻이다. 피렌체가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 것은 순백의 대리석과 붉은 지붕을 지닌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가 1년 365일 곱고 찬란한 꽃으로 피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교행도 힘겨운 좁고 어두운 계단 464개를 걸어 쿠폴라의 맨 위로 오르려는 것은 꽃봉오리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이며, 두오모와 함께 화사하게 핀 수백, 수천 송이의 피렌체 꽃들을 내려다보고자 함이다. [한 송이 빨간 꽃으로 피어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르네상스 건축의 상징이기도 한 이 성당은 피렌체의 존재 이유일 수도 있다.] 붉은 지붕들이 온 도시를 덮고 있는 것을 보고, 피렌체가 왜 진정 아름다운 도시인지 깨닫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그 꽃봉오리에는 준세이와 아오이의 사랑만큼 곱고 애틋한 사랑이 수없이 많음을 확인하고자 했을 터다. 미켈란젤로 광장(Piazelle Michelan-gelo)에서 카메라 줌렌즈를 당기면 두오모의 전망대가 거의 수평으로 보인다. 그곳에 오른 수많은 연인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식도 없이 464개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올라온 이유를 보여준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피렌체에서 두오모가 신의 공간이라면 시뇨리아 광장은 인간의 공간이다. 이곳은 과거 피렌체 시민들이 토론을 벌이고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하던 곳. 두오모, 지오토의 종탑과 더불어 피렌체에서 가장 높은 탑이 있는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과 함께 광장을 두르고 있는 코지모 데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 넵투누스의 분수, 다비드와 헤라클레스, 그리고 르네상스의 보물 조각들이 인간의 공간을 수놓는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의 이동은 피렌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대문호들, 피렌체에 반하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잃게 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스탕달의 고백이다. 스탕달은 1817년 피렌체를 여행하며 산타 크로체 성당에 들렀다. 그곳에서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이, 마키아벨리의 무덤과 단테의 가묘를 둘러보던 스탕달은 귀도 레니의 그림 <베아트리체 첸치>를 보고 갑자기 다리의 힘이 풀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경을 겪는다.
흔히 뛰어난 미술품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아찔한 기분이 들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심지어는 몸에 통증을 느끼면서 분열 증상을 일으키는 것을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좌)성당 파사드 앞 계단에서 뜨거운 열정에 휩싸인 젊은이들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게 피렌체의 열정이다.
(우)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과 회랑,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여행자들과 함께 휴식하는 공간이다.]
꿈에서 본 것을 말해주랴?
햇빛 반짝이는 고요한 언덕에 어두운 나무숲과 누런 바위, 그리고 하얀 별장, 골짜기에 놓인 도시.하얀 대리석 성당들이 있는 도시 하나가 나를 향해 빛을 발한다.
그곳은 피렌체.
지금 그곳 좁은 골목에 둘러싸인 오래된 뜰 안에서 내가 두고 온 행복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 <북쪽에서>에서 피렌체를 ‘두고 온 행복’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두고 온 행복’이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이 어찌 헤세만의 것일까? 피렌체는 그곳으로 향할 때도, 떠나올 때도 늘 그곳에 나의 행복 몇 개를 두고 오게 한다. 그 ‘두고 온 행복’이 없으면 다시는 그 도시에 갈 수 없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 다시 갔을 때 그 ‘두고 온 행복’을 다시 만난다는 그윽한 설렘 때문이다.
아르노 강 위로 태양이 내려온다. 강 뒤로 끌려 들어가는 태양이 비명을 지른다. 태양의 비명에 놀란 피렌체는 가뜩이나 꽃처럼 붉은 도시의 지붕들이 더 선명하게 소스라친다. 세상에 그 어떤 자연이라서 이처럼 아름다운 황혼을 보여줄까? 사람이 만든 것과 하느님이 만든 것 중 더 아름다운 것을 굳이 찾아야 한다면 하느님이 만드신 것에 사람의 손이 더한 것이라고 얘기하면 위선일까? 하지만 하느님이 만든 자연에 더해진 사람이 만든 피렌체는 감동이 너무 벅차 숨을 쉬는 것이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피렌체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2주 동안 피렌체에 있었던 릴케는 그 짧은 시간이 못내 아쉬웠으리라. 그는 피렌체의 속살을 채 들여다보지 못하고 신음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신을 위한 인간이 아닌 인간 속에서 존재하는 신으로 위대해진 피렌체를 더 그리워했으리라. 피렌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붉게 피어오른 꽃의 도시에 대한 심한 상사병을 앓듯이. 그리고 아련한 스크린 속 준세이와 아오이처럼. [단테(동상)의 가묘를 비롯해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이, 마키아벨리와 로시니 등의 무덤이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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