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어두운데 기타 소리는 더 좋아져요”
[Second Act ]
최동수 수제기타 장인
[한경 머니 = 문혜원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

현대건설 이사 출신의 최동수 씨는 1994년 30여 년 동안 지켰던 건설 현장을 뒤로하고 수제기타 제작가로서 인생 2막을 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쉰다섯. 정해진 정년이 없던 IMF 이전, 그의 결심은 동료들의 귀를 의심케 했다.

기타는 내 인생의 숙명
최동수 씨는 이후 수십 년째 묵묵히 수제기타 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기타에 관한 한 혼신의 열정을 다하는 그의 인생 이야기 속에 장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기자를 자택 지하 자신의 공방으로 안내했다. 나무가 소리를 낸다는 뜻의 목운공방. 볕이 잘 들지 않은 반지하 공간임에도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그득 배어 나왔다. 기타를 만드는 재료들은 모두 그가 현대건설 근무 시절부터 해외 공방을 찾아다니면서 모아온 것들이다. 이미 수십 년은 족히 지난 재료들이다. 이 재료들은 수천, 수만 번 깎고 다듬는 과정을 거쳐 기타로 재탄생된다.

그는 한창 그의 50번째 작품을 작업 중이다. 그가 만드는 기타는 1년에 두어 대 남짓.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 탓에 나무가 상하고 뒤틀리기 쉬운 덥고 습한 여름을 피해 선선하고 건조한 가을, 겨울철에만 작업을 하기 때문이란다.

올해 그가 만든 기타는 류트기타와 19세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헌정했던 작품을 재현한 기타다. “우리나라 기타 장인 중에 누군가는 이런 모양도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걸 만드는 미친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하하하.”

그는 독특한 디자인의 기타를 만들기도 하지만 국내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해외 유명 기타를 내려놓을 만큼 깊은 음색을 내는 악기를 만들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배장흠, 전장수 등 국내 유명 연주가들이 그의 기타를 수년째 연주하고 있다. 기타리스트 전장수는 내년에 있을 카네기홀 연주회에서 자신이 치던 호주산 명기인 스멀맨 대신 최동수 씨의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 한다.

그의 악기가 명기로 대접을 받는 데에는 그만의 견고한 기타 제작 방식과 남다른 튜닝에 있다. 그는 얇게 켠 목재를 2겹으로 붙여 몸통의 틀어짐을 막는다. 나무통 자체가 가진 고유한 울림을 잘 살리기 위해서 살을 붙이고 더한다. 그저 나일론 줄만 매서 하는 튜닝과는 차원이 다른 것. 나무의 앞판과 뒤판의 울림에 따라 소리의 차이를 가늠하기 때문에 튜닝은 짧게는 2주, 길게는 6개월까지 걸리기도 한다. 배장흠 연주가가 쳤던 그의 악기는 튜닝을 위해 3번이나 전판을 뜯을 만큼 공을 들였다.

“도자기는 깨 버리면 그만이지만 기타는 다행히 다시 뜯고 만들 수 있어요. 손을 넣어서 나무를 깎다가 안 되면 기타를 뜯어볼 수밖에. 다른 기타 제작가들은 이렇게 안 하는데 난 그게 더 이상하더라고.”

그는 기타 하나하나에 혼신을 다하면서도 기타 제작에 대한 주문은 일절 받지 않는다. 그저 기타를 보러 온 사람이 와서 기타를 쳐보고 사 갈 뿐이다.

“난 기타에 가격을 매기는 걸 이해할 수 없어요. 그건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야 가능한 거죠. 재료와 디자인들을 주문받았는데 소리가 맘에 안 들면 어떡할 거야. 그래서 난 주문을 받지 않는 거예요.”

가격이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그의 악기는 1000만 원을 호가한다. 그럼에도 그는 좀체 돈에 연연하는 법이 없다. 1년에 단 2대를 만들면서도 헌정하거나 가난한 연주가에게는 절반 값만 받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내 기타를 참 탐내던 사람이 있었어요. 사고 싶은데 돈이 좀 부족하니 깎아 달라고 하더이다. 나는 그냥 주면 줬지 값을 깎아 줄 수는 없었어요.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거든. 그래서 그냥 줘 버렸어요. 그러니 나는 돈을 초월했다고 말할 수밖에요.”
“눈은 어두운데 기타 소리는 더 좋아져요”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하자 장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윽고 “자기 인생이 언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은퇴할 나이인 50대가 되고 보니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60대가 돼서 보니 그때도 아직 젊은 거야. 70대에도 내일 모래 80대가 되는데도 아직 쓸 만하지. 그러니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해요. 길다면 긴 인생 원하는 전공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수 있어도 앞날을 준비해야 한다는 거죠. 어쭙잖게 대학만 졸업하고서 평생을 먹고살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지 않은가?”

그는 기타 제작을 예로 들었다. 당장 기타를 만들고자 해도 명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된 나무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 10년 전부터 기타 만들기를 준비해야 하는 셈이다.

“나는 기타를 만들기 위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냥 공부한 게 아니라 100권이 넘는 기타 제작 관련 책에 빨간 줄이 가득할 정도로 벽돌을 쌓아 나가듯이 준비해 온 겁니다.”

현직에 있을 때도 그랬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던 덕에 쉬는 날이 되면 공방을 찾아가고, 장인을 만나러 다녔다. 클래식 기타의 고향으로 불리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제작 과정을 배우고 미국 힐스버그에 있는 기타 학교를 다녔다.

원래 일흔넷까지만 악기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그였다. 더욱이 2년 전에는 전립선암 선고까지 받은 터였다. 그는 유작을 빚는 심정으로 악기를 만들었다.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도 술, 담배를 피하라는 의사의 권고도 귓등으로 들은 채 하루 12시간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지난해와 올해 사이 평소의 배가 넘는 6대의 악기를 쏟아냈다.

“지금은 암세포가 정상 수치래요. 좋아하는 작업에만 매달려 암을 왕따시키니 암이 자기가 알아서 죽어 버린 거지. 그럼에도 내일모레가 팔십이니 눈이 어둡고 손이 서툴어져 내년까지만 하고 그만 만들 생각이에요. 그런데 기타를 만들수록 자꾸 소리가 좋아지는데 이걸 어쩌면 좋아. 하하하하.”

문혜원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