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없는 가족의 상속·증여 딜레마
[한경 머니 = 한용섭 기자]해외 유학과 이민, 국제결혼이 잦아지며 이제 가족들의 국적도 다양해지고 있다. 또 국내외에 재산이 산재해 있는 경우 상속·증여 문제는 마치 난수표 풀기처럼 복잡해져 국제적 고민거리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해 오던 A씨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상속인들은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한국 과세당국이 A씨를 한국 거주자로 보고 중국에 있는 재산에까지 상속세를 부담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

하지만 A씨는 대부분의 사업 기반을 중국에 두고 있어 중국 거주자로도 분류돼 있었던 상태다. 중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는데 상속인들은 중국에 있는 재산에 대해서는 한국 과세당국에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B씨는 오래전에 자녀와 아내를 캐나다에 보낸 채 이른바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해 오고 있다. 가족들이 현지 거주자로 인정받으면 교육비가 싸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근 영주권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향후 자신도 가족들이 있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현지 거주자로 인정받을 경우 높아지는 소득세와 캐나다와는 달리 상속세가 존재하는 한국에서의 세금 부담 중 어느 것이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처럼 각 나라의 법령에 따라 거주자 판단 기준이나 세금이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국제 상속·증여 문제는 시름을 더해가고 있다.

거액의 역외탈세 논쟁으로 관심을 모았던 선박왕(권혁), 완구왕(박종완), 구리왕(차용규) 사건도 거주자 인정 문제가 논란거리였다. 박종완 씨의 경우는 2001~2002년 한국으로 주거를 옮기면서 170여억 원 상당의 탈세 혐의가 있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지만, 권혁 씨는 ‘탈세 고의성 입증 실패’로, 차용규 씨는 ‘국내 거주자 불인정’으로 세금 추징이 유야무야됐다.

이들을 옭아매었던 것은 소득세 문제였지만 이후 상속세 논쟁으로 번지면서 국경을 넘나드는 세금 문제는 또 다른 분쟁의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경 없는 가족의 상속·증여 딜레마
◆당신은 어느 나라 상속세 국민입니까?

“납세자들이 오해하는 가장 큰 부분이 국적과 거주자를 동일시하는 거죠.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지만 둘의 관계는 별개로 봐야 해요. 재산이나 법인의 대부분이 한국에 있다면 국적과 상관없이 거주자로 분류돼 국내외 재산에 대한 상속세를 내야 해요.”

국세청에서만 21년 동안 근무한 김진규 EY한영회계법인 상무의 말처럼 상속·증여세 부과의 기준이 되는 거주자와 비거주자 판단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적어도 상속·증여세와 관련된 납세자의 국경선은 거주자 판단 여부에 따라 달리 그어질 수 있다는 소리다.

통상 증여세는 수증자, 상속세는 피상속인 입장에서 거주자 여부를 판단하게 되는데 단순히 해당 국가의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해 외국의 거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생계를 함께하는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인적·경제적 관계가 밀접한 국가가 어디인지 등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우선 거주자 여부는 국내 소득세법상 판단 기준을 따르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국내에 거소를 둔 기간이 2년에 걸쳐 183일 이상이거나, 국내에 생계를 같이하는 가족이 있고 직업 및 자산 상태에 비추어 계속해 183일 이상 국내에 거주할 것으로 인정되는 때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해외로 출국한 경우도 그 목적이 관광, 질병의 치료 등 일시적으로 인정되는 때에는 출국 기간도 국내에 거소를 둔 기간으로 본다.

거주자의 판단 기준은 국가 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일본의 경우 상속 당시 일본 내에 주소나 일본 국적이 없더라도 상속 개시 전 5년 이내에 일본 내에 주소를 두거나 일본 내에 거주했을 시 ‘비거주 무제한 납세의무자’로 보아 일본 내외 소재의 모든 자산을 과세대상으로 삼고 있다.

미국은 최근 3년간 체재 일수의 합계가 183일을 넘으면 미국 거주자로 보는데 해당 연도의 체재 일수에 전년도 체재 일수의 3분의 1, 전전년도 체재 일수의 6분의 1을 더한 체재 일수가 183일을 넘으면 미국 거주자로 보고 있다.

이중 거주자인 경우 국가 간 조세협약을 따르게 돼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조세 협약상 거주자 판단 기준과 관련해 항구적 주거, 중대한 이해관계의 중심지, 일상적 거소 등 다소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세 협약을 토대로 어느 나라 거주자인지 여부를 가리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국가 간 상호 합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세금 문제가 걸려 있다 보니 국가 간 이견이 생길 소지가 크다.

구상수 법무법인 지평 회계사는 “현재 국가 간 맺어진 조세 협약은 소득세를 기준으로 돼 있는데 상속세와 관련된 협약은 거의 없다”며 “호주, 스웨덴, 뉴질랜드 등 상속세가 없는 나라가 있고, 상속세를 두고 있는 미국, 일본, 독일 등도 상대국과 협약을 맺을 만큼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다 보니 이중 과세 등의 우려가 항시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일본에 주소지를 두고 50년 넘게 양국을 오가는 ‘셔틀경영’을 해 온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주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양국 세무당국은 신 총괄회장을 이중 거주자로 판단하고 있는데 현재 양국은 개인 소득세와 관련해서는 자국에서 얻은 소득에만 과세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상태다. 하지만 이는 소득세와 관련된 합의 사항이고, 차후 상속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 양국 간 상호 합의가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소득세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거주자 판단과 관련된 대법원의 최근 판결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9월 2일 대법원 2부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업체를 운영하는 C씨가 서울 삼성세무서장을 상대로 낸 종합소득세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이중 거주자인 C씨를 한국 거주자로 판결했는데 국내에 머문 체류 일수가 1년 중 절반 이상인 188일에 달하고, 사우디 법인이 맺은 주된 계약 및 의사 결정이 C씨가 국내에 있는 동안 이뤄진 데다가 사우디 법인의 주요 거래처가 한국 기업이 설립한 사우디 현지 법인인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서울지방국세청은 2012년 4월부터 7월까지 C씨 업체에 대한 자금출처 조사를 벌여 C씨가 사우디 법인으로부터 받은 급여 44억7300만 원을 비롯해 기타소득, 금융소득 등 63억여 원에 대한 종합소득세 신고가 빠졌다며 2007~2010년 귀속 종합소득세 23억여 원을 결정, 고지했었다.

거주자 여부에 대한 판단이 중요한 것은 그에 따라 과세당국에 내야 할 상속·증여세가 크게 달라질 수 있어서다. 국내 거주자인 경우는 국내외 모든 재산에 대해 상속세를 납부해야 하지만 비거주자인 경우 국내 소재 재산에 대해서만 상속세 납부 의무가 주어진다.

국내 상속세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동일한 재산에 대해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상속하는 것이 상속세 측면에서는 유리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국내 비거주자가 상속·증여세 측면에서 유리한 것은 아니다.

국내 재산이 많을 경우 비거주자라도 해당 재산에 대한 상속·증여세를 납부해야 하는데 거주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각종 공제 혜택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재현 EY한영회계법인 매니저는 “비거주자라고 하더라도 국내 자산에 대해서는 국내 세법에 따라 상속세를 납부해야 하는데 국내 거주자의 경우 기초공제 2억 원, 배우자공제 최대 30억 원, 금융재산공제 2억 원, 가업상속공제 등을 적용받지만, 비거주자의 경우 기초공제 2억 원에 대해서만 공제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국외 전출과 관련해 달라진 세법도 유념해야 한다. 현재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국내 거주자(대주주에 한정)가 이민 등 국외 전출로 비거주자가 되는 경우 전출일에 국내 주식을 양도한 것으로 보고 양도소득세(일명 국외전출세)를 과세키로 하는 등 과세권을 강화하려는 추세다. 정부는 국외 전출 시 양도소득세 과세 특례를 신설하고 국외 전출일에 국내 주식에 대한 양도소득세(세율 20%)를 오는 2018년부터 과세할 계획이다.

상속이나 증여를 앞둔 경우 국내외 자산 등을 고려해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신중하게 거주지 국가를 결정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경 없는 가족의 상속·증여 딜레마
◆상속세 국경선은 스스로 그어라

최근에는 자녀들의 해외 유학 등으로 유학비나 생활비를 보낼 경우가 많은데 어느 정도 금액을 초과하면 증여세를 내야 하는지도 고민거리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해외 송금에 한도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연간 미화 10만 달러 이상을 송금할 경우 해당 기관에 통보를 해야 하며, 이는 세무조사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일상적인 학비나 생활비 정도라면 증여세를 고민할 필요는 없지만 해외에 있는 자녀가 송금 받은 돈으로 부동산을 구매하거나 투자를 할 경우 증여로 판단될 수 있다. 이 경우 아예 한국은행에서 승인을 받은 후 증여송금을 실시할 수도 있는데 송금 자료를 근거로 3개월 내 증여세를 신고 납부하면 된다.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자녀들에게 증여를 할 경우 비거주자인 자녀는 증여재산공제 혜택(성년 자녀의 경우 5000만 원)을 보지 못해 납부할 세액이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비거주자인 경우 부모가 자녀 대신 증여세를 납부해줄 수 있는 연대납세가 가능하기 때문에 자녀의 세금을 줄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제상속에서 유류분(遺留分: 법정상속인을 위해 법률상 유보된 상속재산의 일정 부분) 문제는 어떻게 기준을 잡아야 할까. 유류분제도를 두고 있지 않은 나라들이 많고, 미국 등 상당수 국가에서 배우자에게 상속재산의 절반을 남겨주도록 하고 있어 배우자와 자녀들이 1.5대1대1로 나누도록 한 한국의 유류분제도와 부딪힐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제사법에 의거해 피상속인 국적이 어디냐에 따라 유류분 청구 여부가 결정된다. 미국 시민권자이면서 한국 국적을 가졌다면 한국 상속법에 따라 자녀들이 유류분 청구를 할 수 있으며, 상속인과는 무관하다.

고연기 EY한영회계법인 상무는 “지난 9월 7일 한·미 금융정보자동교환협정(FATCA)의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미국과의 금융정보 교환이 이뤄지게 됐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 내 은행에 연간이자 10달러를 초과하는 예금계좌를 개설한 한국 국민의 금융정보를 제공받고, 한국의 경우 국내에 개설된 5만 달러 초과 미국인 계좌정보와 함께 연말부터 2014년 이후의 은행, 보험, 증권사 등 모든 금융 회사의 계좌정보를 공유하게 된다는 것. 또한 2017년 이후부터 다자간 금융정보자동교환협정(MCAA)에 따라 스위스, 싱가포르, 홍콩, 케이맨제도 등 100여 개국과 금융정보가 공유되는 만큼 국제상속에 대한 과세당국의 그물망은 더욱 조여 올 수밖에 없다는 전언이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