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이현주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 한국 미술에 대한 세계 미술계의 관심이 뜨거운 요즘, 5월 초 또 하나의 전시가 미국 뉴욕에서 열렸다. 정통 미술 교육을 받은 후 다방면으로 갈지(之)자 행보를 보여 온 작가 박찬경의 티나 킴 갤러리 개인전이다. 미디어 아티스트이면서 평론가, 예술감독, 영화감독 등으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세계에 뉴욕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미국에서 오프닝 행사를 마치고 막 돌아온 박찬경을 5월 17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박찬경의 작업실은 서울 종로구 인왕산 옆 조용한 주택가의 한 연립주택에 마련돼 있었다. 이른 오전의 햇살을 받으며 동료와 담소를 나누던 그는 취재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낮은 톤의 일관된 억양이 먼저 귀에 들어왔다. 환한 미소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는데, 되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하 공간은 하나의 큰 방이었는데, 파티션을 둬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쓰고 있었다. “영화 작업이 없을 때에는 다른 작가들과 공유하고 있고 지금은 세 명이 같이 사용하고 있다”고 박찬경은 설명했다. 올해로 3년째 붙잡고 있다는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이곳은 ‘상업 영화’의 전초기지를 만들 생각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형은 영화감독 박찬욱이다.
미술가의 작업실이라 하여, 미완성 설치물이나 물감 번진 아틀리에를 기대했다가 이내 머쓱해졌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서가를 가득 채운 빛바랜 책들이다. 종류도 예술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 의학 등이다. 그 옆에는 책상이 쭉 놓여 있고 컴퓨터와 모니터 두 개, 영화 <만신> 포스터와 액자 몇 개, 사진 몇 장이 벽면에 붙어 있는 게 전부였다.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철학적 사유로 풀어내는 ‘개념미술가’이자, 미디어 매체를 주로 사용한 ‘미디어 아티스트’인 까닭이라고 함께 동행한 국제갤러리 관계자가 대답했다. 그는 평론가로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영상 및 설치 작품을 주로 했으며 주제로 보면 분단에서 종교로 점차 보폭을 이동해 왔다.
박찬경은 현재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로 지난해 3월, 첫 영국 런던 개인전을 연 이후 해외 전시를 강화하고 있다. 올해 6월 스위스 아트바젤필름프로그램, 9월 타이페이 비엔날레에서 다시 한 번 미술 작가로서의 저력을 보여줄 계획이다.
작업실엔 얼마나 자주 오시나요.
“매일 출퇴근을 합니다. 오랫동안 신작을 작업하지 못했는데, 가을 비엔날레를 목표로 현재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입니다. 장르는 비디오 사운드인데, 스크린 세 개가 붙어 있고 파노라마로 연결되면서 자연 소리, 바람 소리 등이 들리는 겁니다. ‘귀신의 소리’를 전달하려는 건데 듣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뭔가 억울하다든지, 노래를 부르고 있다든지 등의 생각을 하게 하는 사운드를 만들려고 합니다. 또 상업 영화를 목표로 공포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 사이 <곡성>이 나왔다던데 아직 보진 않았어요.”
어떤 곳에서는 작가, 어떤 곳에서는 감독으로 불리는데요. 어느 쪽이 더 맞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문화의 초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초점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태도라서 전통적 의미의 아티스트라기보다는 문화지식인이 정체성에 더 맞는 거 같아요. 여기서 지식인이라는 건 똑똑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적인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최근 1인 시위를 했다든지, 미술제도와 관련한 발언을 한다든지 하는 행동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작가를 둘러싼 학교, 박물관, 언론, 제도 등과 같은 환경이 있는데 작가가 작품만 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형(박찬욱 감독)도 영화를 만들고 또 미대에 가고 싶어하셨다고 하던데요. 어떤 DNA가 있는 걸까요.
“아버지(박돈서 전 아주대 학장)가 아마추어 화가일 정도로 미술을 좋아하셨고 선물 받은 그림도 많아서 집에 걸려 있는 것들이 많았어요. 화가에 대한 로망이 있다 보니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 내용을 소개해주세요. 분단을 주제로 한 2채널 비디오 <파워통로>(2004년) 등이 있는데요.
“저는 한국 사회가 분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죠. 미디어가 우리 생각을 만들어내고 기억에 영향을 끼치는데요. 분단이나 냉전을 어떻게 체험하고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지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미디어를 통해 돌아보는 작업입니다.”
분단뿐만 아니라 종교나 무속 신앙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래 6~7년은 민간 신앙, 무속 문화, 한국의 종교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영화도 찍고 전시도 했어요. 한국 사회가 생각보다 더 종교적인 사회라는 걸 알게 됐어요. 세월호 참사도 종교와 연결이 돼 있죠. 한국의 종교사를 통해 한국을 보면 다른 앵글로 한국 사회가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지난해 3월엔 영국 첫 개인전을 열고, 올해에도 필라델피아, 뉴욕 전시에 이어서 9월 타이페이 비엔날레에 출품하시는데요. 최근 한국 미술에 쏟아지는 해외의 관심을 어떻게 보십니까.
“예전에는 세계화를 하기 위해서는 뉴욕으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요즘은 거꾸로예요. 가 있으면 오히려 눈에 안 띄어요. 한국은 세계적으로 뜨는 나라죠. 케이팝(K-pop)이나 영화도 인기 있는 장르고, 미술 비엔날레도 많고, 굳이 해외에 나가서 작업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됐죠. 한국 미술이 일본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하고 해외에서도 이곳이 되게 재밌는 데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아요.”
전통적이고 한국적 문화 코드로 해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특히 제가 하는 작업의 경우 그들에게 이국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죠.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이 있어서인데, 저는 여기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어요. 현지 반응은 좋았어요. 회화가 아닌 매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한국과 한국의 문화예술을 이해하려는 것 같았고요. 오히려 개인 컬렉터보다는 뮤지엄에서 관심을 보였죠. 분단이라는 주제가 갖는 흥미성도 있어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셨겠어요.
“한국 붐이 일지만 정작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미디어를 통한 표피적인 지식밖에 없죠. 한국이 여러 면에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곳이고 특이한 질서를 만들면서 이상하게 성장한 모델이라서 한국을 통해 미국이나 일본 등을 보는 데도 의미가 있거든요. 인기가 더 있어도 되는 곳이에요. 지금까지 남북이 분단돼 있기도 하고, 더 깊이 있게 봐야죠.”
형과 같이 공동 작업도 하셨죠.
“단편 영화를 다섯 편 만들었죠. 영화감독은 어릴 때부터 선망하던 직업인데 형과 같이 영화도 많이 보고 영화 얘기도 많이 했어요. 대학원 갈 때 영화를 전공할지 미술을 전공할지 고민하다가 포트폴리오도 없고 해서 미술로 정했죠. 꿈이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영화를 한두 번은 하겠지 했어요.”
영화와 미술을 오가는 작가들이 더 있나요.
“요즘에는 꽤 돼요. 젊은 작가 중에 임흥순도 영화를 만들었죠. 영화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도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데 투자자 잘 되지 않을 때 미술 전시장에서 전시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크로스오버가 많아지는 추세인데, 이게 또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아요. 이미 유럽에는 더 많고요.”
과거 대안 공간을 운영하고 비주류에 대해 목소리를 많이 냈는데, 어떤 배경에서입니까.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소외된 것에 관심이 많죠. 변두리로 밀려난 게 무엇일까, 생각해요. 세상에 문제가 많잖아요. 심각한데, 왜 이럴까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보면 중요한 가치가 밀려났고, 억압돼 있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르게 보려고 할 겁니다.”
청년 시절에 비해 지금의 박찬경은 주류에 해당하지 않나요.
“저는 주류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시도 불려 다니고 외국 전시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주류는 시장과 정치권력이죠. 작품이 잘 팔려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아직도 비주류하고 생각해요.”
금수저·흙수저론으로 잘 설명되는 요즘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돼 가고 있죠. 남을 생각할 줄 모르고, 극단적인 자본주의로 가죠. 남을 배려하는 게 없어지고, 정서적으로는 연민의 감정이 없어져요. 그것도 매우 빠르게, 폭력적일 정도로 그렇죠. 위기라고 생각해요. 타인에 대한 연민을 회복하는 것은 자기 존중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해요. 예술은 근본적으로 연민을 어떻게 회복하고 어떻게 재건할지를 얘기하는 것이죠.”
박찬경의 다음 행보는 무엇입니까.
“일단 신작을 내고 전시를 잘 끝내고, 또 올해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상업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형 회사에서 제작해주겠다고 했는데, 올해 안에 끝내고 내년에 촬영해 개봉하는 게 목표이긴 합니다.”
박찬경 작가는
1988년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학과 졸업 후 1996년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작가 이전에 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한 박찬경은 젊은 미술인들의 현대미술담론을 위한 ‘포럼에이’를 결성했고, 비영리 전시공간인 대안공간 ‘풀’의 설립 멤버로 참여했다. 1997년 본격적으로 사진, 텍스트, 사운드를 주요로 하는 매체를 통해 비평적인 작업을 진행해 왔다. 영화 <만신>의 감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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