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은 손을 보호하는 단순 기능 외에 다양한 용도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의 장갑은 남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일으키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 기사님, 늘 맹세한 것처럼 나를 열렬히 사랑한다면 저기 떨어진 장갑을 주워주세요!”
프리드리히 폰 실러(Friedrich von Schiller)의 시 ‘장갑’(1797년)에서 쿠니군데 공주는 사자, 호랑이, 표범이 싸우는 경기장으로 장갑 한 짝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자신을 연모하는 기사 데로르게스에게 사랑의 증거로 그 장갑을 주워달라고 한다. 데로르게스는 주저 없이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가 맹수들 속에서 태연히 장갑을 주워 들고 공주에게 가져온다. 그의 대담한 모습에 모든 이가 놀라 칭송하고, 흡족한 공주는 행복한 사랑을 기대한다. 그러나 기사는 장갑을 공주의 얼굴에 던지며 감사의 말을 거절하고 그곳을 떠나버린다.
남녀의 사랑과 계급적 권력관계가 주제인 이 시에서, 여성의 장갑은 중요한 연결고리로 등장한다. 장갑에는 손을 보호하는 단순 기능 외에도 청결, 예절, 지위, 패션 등 다양한 용도와 상징적 의미가 있다. 또한 속옷처럼 인체와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그 소유자를 가리키거나 신체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여성의 장갑은 흔히 남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
실러의 시에서 공주가 장갑을 맹수들 사이에 떨어뜨린 것은 자기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며, 자신을 사모하는 데로르게스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행동이다. 데로르게스는 당연히 기사답게 공주를 구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보여주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신념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공주에게는 가벼운 노리개에 불과한 것을 알았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킨다. 기사의 용기로 사랑의 진실성을 강조하는 한편 봉건귀족의 오만함을 질타하는 것이다.
카롤루스-뒤랑, ‘장갑 낀 여인’, 1869년, 오르세 미술관
카롤루스-뒤랑, ‘장갑 낀 여인’, 1869년, 오르세 미술관
여인의 잃어버린 장갑, 사랑의 매개체
실러처럼 화가들도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소재로 남녀의 애정이나 갈등을 표현했다. 일례로 1869년 프랑스 살롱에서 상을 탄 ‘장갑 낀 여인’이라는 그림은 파리의 인기 초상화가 카롤루스-뒤랑(Carolus-Duran)이 자신의 아내를 실물 크기로 묘사한 것이다. 그림 속에는 회색조의 단순한 배경에 한 여인이 검은 드레스를 차려 입고 서 있다. 유행에 따른 복장과 머리 모양으로 미뤄 그녀가 세련된 취향을 지닌 상류사회의 일원임을 알 수 있다. 무채색의 차분한 분위기에서 관람자 쪽으로 돌린 얼굴과 손동작이 눈길을 끈다. 그녀는 왼손에만 짧고 타이트한 은회색 장갑을 끼고 오른손을 놀려 그 장갑을 벗으려는 듯 매만지고 있다. 미묘하게 구부린 손가락이 남자를 유혹하는 교태의 몸짓을 은근히 드러낸다. 오른쪽 장갑이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무심결에 흘렸을까, 일부러 떨어뜨렸을까? 혹시 누가 장갑을 주워주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남자가 가져가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을까? 장갑으로 인해 고요한 장면에 생기가 돌고 긴장감이 생긴다. 여기서, 장갑은 그녀의 일부로서 몸이자 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떨어진 장갑을 줍는 남자가 그녀와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누가 장갑을 손에 넣을 것인가? 그런데 바닥에 놓인 장갑 밑에 붉은 글씨로 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마치 장갑의 소유권을 명시해 아무도 못 가져가게 지키려는 듯이. 화가는 서명으로써 자신이 그 여자의 주인, 즉 남편임을 공공연히 표시하고 있다.
막스 클링어,‘사건’,‘장갑’연작 중 두 번째, 1881년, 라이프치히 미술관
막스 클링어,‘사건’,‘장갑’연작 중 두 번째, 1881년, 라이프치히 미술관
남자가 여자의 장갑을 취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안전한 소유를 보증할 수 있을까? 그러한 우려가 19세기 후반 독일 화가 막스 클링어(Max Klinger)의 그림에서 현실로 드러난다. 1878년, 클링어는 ‘주운 장갑에 관한 환상: 이것을 잃은 여인에게 바침’(일명 ‘장갑’)이라는 제목으로 10점의 연속되는 소묘를 그려내고, 2년 후에는 이를 동판화로 옮겨 다시 한 번 제작했다. ‘장갑’ 연작에서는 땅에 떨어진 여인의 장갑을 습득한 남자가 치르게 되는 내면의 이야기가 단계별로 여실히 펼쳐진다. 연작의 두 번째 장면인 ‘사건’에서 보듯이 혼자 스케이트를 타던 여자가 장갑을 떨어뜨린 채 지나가고, 뒤따르던 남자가 그것을 황급히 주워 든다. 장갑을 주운 사람은 그녀를 짝사랑하던 화가 자신이다. 그는 장갑을 간직한 채 연모의 감정을 키운다. 그녀에 대한 갈망으로 번민의 나날을 보내는 남자의 폭풍 같은 마음 상태가 장갑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 장갑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화가의 응축된 감정이자 숭배와 두려움과 욕망을 일으키는 여인의 몸이기도 하다. 연속된 장면에서 장갑은 파도에 휩쓸리거나 괴물에게 탈취당하는 등 연약하고 애처롭게 보이다가도 제단에 놓인 신성한 유물처럼 고귀하게 등장하는가 하면, 무섭게 군림하며 위험한 요소를 동반하기도 한다. 영락없이 불안하게 동요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막스 클링어,‘공포’,‘장갑’연작 중 일곱 번째, 1881년, 라이프치히 미술관
막스 클링어,‘공포’,‘장갑’연작 중 일곱 번째, 1881년, 라이프치히 미술관
‘장갑’ 연작의 일곱 번째 장면인 ‘공포’에서는 장갑이 남자에게 끔찍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자가 침대에 파묻혀 누워 있고 머리 위에 거대한 장갑이 위협하듯 그를 압도한다. 스케이트장에서 그가 주워 온 바로 그 장갑이다. 침대를 향해 엄청난 파도가 밀려들며 사람들을 삼키고, 물결을 따라 알 수 없는 두 개의 손이 남자를 향해 움직인다. 물에 빠진 사람들 중 하나가 그 손과 장갑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위기를 알리지만 침대 속의 남자는 장갑의 악몽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한다. 여기서 난데없이 방 안에 들어찬 물은 남자의 넘치는 욕구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왼쪽에서 움직이는 두 손이 남자에게 응징을 가하려고 다가오고 있다. 여인을 향한 욕구와 그에 따른 억압 때문에 남자는 이중으로 고통스럽다. 이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성적 무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는데, 무의식이 작용할 수 있는 환경은 사물들의 낯설고 비합리적인 배치로 꿈이나 환상적 장면을 구성함으로써 조성된다. 이처럼 클링어의 그림에서 장갑은 심오한 정신세계를 가리키며 성적 욕망의 대리물인 페티시 역할을 한다.
19세기 후반 장갑은 ‘모던 스타일’을 추구하는 여성 패션의 일부로 널리 유행했다. 남녀가 모이는 곳에서 여자가 장갑을 흘린다면 그것을 주운 남자와 더불어 사건이 일어날 충분한 실마리가 될 수 있었다. 당시 화가들은 일상의 우연한 단편들을 포착하고자 했는데, 장갑이 그 매개체로서 좋은 모티브가 됐다. 뒤랑이나 클링어가 그랬듯이 화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인과 욕구, 번민의 경험을 여성의 장갑을 통해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한 작품들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모던 라이프’라는 사회현상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심리에 대한 통찰이라는 근대적 자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