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한편에 있는 등나무에서 그와 다시 제대로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그는 명함을 건네며 ‘만돌린 연주가’, ‘한국만돌린협회 회장’ 김병규로 자신을 소개했지만, 만돌린 연주가에 더욱 애착을 보였다.
“아이들이 많이 시끄러웠죠? 이곳 대청중학교에서는 1학년 전체 학급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10시간 정도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 학교는 기타 실습 등 전문 음악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편성할 정도로 예술 분야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흔치 않은 학교죠.”
첫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예전 대기업 연구원 출신이란 얘기부터 왜 기타가 아닌 만돌린 연주가로 자신을 소개하는지 질문을 던졌다.
대기업 기술연구원 출신 만돌린 연주가
“1978년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숭전대학교(현 숭실대학교) 전기공학과 4학년을 졸업했어요. 같은 학교 산업대학원을 1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결국 군대에 갔죠. 이후 1985년부터 일자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제대 후 대성엔지니어링과 예전 삼보전자를 거쳐 1989년 현대엘리베이터에 경력 공채로 입사했다고 밝혔다. 현대엘리베이터에서는 기술연구원으로, 당시 데이터베이스와 전자도면을 관리하면서 전자회로 캐드(CAD) 교육을 담당했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1996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퇴사를 하고 말았다. 본인의 뜻을 널리 펼치고 싶었지만, 당시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조직 환경에서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휴대전화를 보면 위성항법장치(GPS)가 있잖아요. 당시 GPS를 만들었죠.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이를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이 있어요. 센터에서 GPS를 이용해 위치를 파악하고, 근처 보수요원한테 자동으로 어떤 부품과 장비를 챙겨야 하는지 코드를 전송하는 기술이죠. 하지만 선투자 등 검토할 게 많았을 때입니다.”
그는 “상관과 일하는 스타일도 맞지 않아서 고생했고, 이후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은 이유도 컸다”며 “어떤 일을 했을 때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인정을 받지 못해 섭섭한 면도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이후 1년 정도 쉬고, 1997년 돌연 이탈리아 유학을 선택했다. 기술연구원으로서 선진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글로벌 기업에 이직하기 위한 단계였을까.
이러한 질문에 그는 다소 뜬금없는 답변을 늘어놨다. 만돌린 연주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무작정 유학을 떠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결정을 부추긴 것은 그의 부인이었다.
“퇴사를 마음먹기 얼마 전부터 이화여대 만돌린 합주단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1년에 한 번 있는 정기 연주회에 와이프가 와서 보고는 ‘실력도 없고 시원찮다. 가르치려면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니냐. 유학을 가든지 제대로 공부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욱한 마음에 떠난 셈이죠.”
사실 그는 초등학교 때 ‘쎄시봉’을 보면서 통기타를 시작했고, 중학교에 가서는 클래식 기타를 배웠으며, 이후 대학에서도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통기타를 계속 다뤘다. 동아리 이름이 ‘만돌린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기타도 기타지만, 주로 만돌린을 배우며 동아리 활동을 하기도 했다.
결국, 취미 활동은 퇴사 후 빠듯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한 생계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는 “기타와 만돌린 등의 악기도 수입해 주변 지인에게 판매하면서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일 하니 행복” 자선공연 200회 목표
그의 두 번째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유학 생활을 위해 살던 집을 전세 놓고, 그 돈을 은행에 맡겨 받는 이자로 타지 생활을 유지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곤 아내와 당시 초등학생 딸까지 셋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그는 “당시 은행 이자율은 지금 이자율보다 높은 10%였지만, 생활은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후 외환위기가 터져 먹는 것을 반으로 줄이는 등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기타의 경우, 밀라노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배웠고, 만돌린을 배우기 위해 파도바라는 도시에 위치한 ‘파도바 콘소바토’에 들어갔다. ‘파도바 콘소바토’는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음악원 정도 되는 곳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파도바 콘소바토’는 만돌린 세계 최고 연주가고 불리는 ‘우고 오를란디’ 선생이 계시는 곳이에요. 악기를 수입하던 당시, 이탈리아 업자를 통해 교수를 소개받았고, 편지를 보내고 사정을 설명하니 시험을 보고 입학하라고 해서 그런 과정을 거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열심히 만돌린을 배우면서 7년 과정을 4년 만에 이수하게 됐고, 2001년 11월에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 한국에 도착한 후 컴퓨터 기술자로서 해 오던 일을 다시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어느덧 차오른 나이 탓에 복귀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타와 만돌린 레슨을 계속하게 됐다. 그는 “수입은 적었지만, 만족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었다”고 만족해했다.
교회와 학교에 무작정 찾아가 목사와 학교장을 만나면서 레슨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나갔다. 현재는 학교 두 곳과 동사무소 한 곳, 그리고 교회 네 곳에서 수업을 진행 중이다. 이와 함께 서울시립교향단과 지방 오케스트라와 함께 단기간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기타와 만돌린을 선택한 게 너무 좋은 선택이었다”며 “현재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곡을 친구들과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한다. 1년에 한 번이지만, 지난해까지 매년 이탈리아에 가서 그쪽 친구들과 모두 여섯 장의 음반을 내기도 했다.
“좋아하는 취미든, 무언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게임이든, 건축이든, 조경이든, 여행이든 계속 좋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되고, 전문가가 되죠. 그러면 경제적으로도 좋아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그는 “유학 생활 동안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다 보니 나중에는 주변 모든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됐다”며 “현재 시각장애인과 집 없는 아이, 심장병 아이, 가출 청소년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80회 정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자선 음악회를 200회까지 하는 것이다. 해외 공연도 조금 더 가고, 음반도 지속적으로 내겠다는 게 그의 꿈이기도 하다. 예전 직장에 찾아가 음악회를 하고 싶다는 속마음도 털어놨다.
“현대엘리베이터에 다닐 때 와이프가 신장이식 수술을 하게 돼 돈이 많이 필요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잊을 수가 없죠. 그래서 다시 회사에 찾아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음악회를 열고 싶어요. 작은 마음이지만 이것 또한 꿈이라면 꿈입니다.”
나원재 기자(nwj@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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