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즐거움을 와인과 함께
약간의 일탈이 삶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 와인은 창조적 영감과 사랑의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묘약이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킴볼도(Giuseppe Arcimboldo)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가 된 후 전에 없이 기발한 인물화를 창조했다. 그의 작품에서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형상은 각종 식물과 동물, 사물들을 조합해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그림은 주로 황제의 취향을 반영하거나 치세의 풍요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제작됐다.‘사계절’ 연작에서는 계절별로 나오는 다채로운 식물로 사계절의 특징을 포착해 인생의 단계와 생명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원리를 암시한다. ‘사계절’ 중 ‘가을’은 풍성한 결실을 맺은 과일과 채소, 곡식을 배치해 사람의 옆모습을 묘사했다. 머리는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와 포도넝쿨이고 몸은 나무를 엮어 만든 술통이다. 가을은 포도를 따서 술을 담그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포도가 술통에서 와인으로 숙성되는 시기, 가을은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과 와인을 상징하는 신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포도 재배법과 와인 제조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이미지는 대개 포도나 와인과 함께 표현되며, 풍요와 쾌락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여겨진다. 그를 기념하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심리적 해방을 통해 집단적 공포를 해소하려는 광란적인 의식으로, 여기에는 와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로마시대에 바쿠스 축제로 발달해 더욱 광기를 띠며 성행했다. 바쿠스에 대한 제의적 숭배의 의미는 삶의 기쁨과 열락, 현실을 벗어난 황홀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와인은 바쿠스의 술이기에 그와 더불어 도취, 흥분, 광기, 관능과 같은 감각적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와인은 방탕과 타락으로 이끈다는 부정적 의미도 있지만 마음을 안정시키고 휴식과 위안을 주며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긍정적 의미도 지닌다. 그렇기에 많은 미술가들은 와인을 마시거나 잔을 들고 있는 바쿠스를 묘사해 인간의 내면에 대한 다층적 상징으로 삼곤 했다.
세속적 욕망에 대한 경고 메시지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 angelo Merisi da Caravaggio)는 ‘젊은 바쿠스’라는 의미심장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머리에 포도넝쿨을 두르고 넓은 술잔을 내밀고 있는 청년은 주신(酒神) 바쿠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신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세속적이고 인간적이다. 얼굴은 술기운으로 붉게 상기됐고, 상체는 의복을 반만 걸쳐 건강한 근육과 피부가 확연히 노출돼 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은 검정 끈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는데, 그는 언제라도 풀 준비가 돼 있다는 듯 매듭에 오른손을 대고 있다. 그가 관람자에게 내민 술잔은 그저 술만 권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유혹을 던지는 것이다. 투명한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것으로 보아 손의 미세한 떨림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관능적 표현은 화가가 경험에 따라 대상을 직접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라바조는 서민들의 일상을 주로 다뤘고, 그들처럼 자신도 선술집이나 매음굴에 자주 다녔다. 술잔을 든 바쿠스의 손은 손톱의 때가 보일 만큼 자세히 그려졌는데, 더러운 손은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적 묘사의 특징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육체적 쾌락의 결과를 의미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전경에 놓인 바구니에 가득 담긴 과일들은 썩은 부분이 꽤 많이 보이는데, 이는 부패나 더러움은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이 그림에서 와인은 바쿠스가 들고 있는 술잔뿐 아니라 배경 왼쪽 구석에 놓인 투명한 유리병에도 들어 있다. 그런데 최근 와인의 짙은 물감층 밑에서 한 얼굴이 발견됐다. 조사에 따르면 그것은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아마도 화가의 자화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카라바조는 왜 자신을 와인 속에 감춰 놓았을까? 술에 취하듯 거침없이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뜻인가, 아니면 술에 의지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것인가? 와인 속 이미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확실하다면 카라바조는 화가의 입장에서 술과 예술, 자신을 동일선상에서 다뤘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바쿠스의 추종자임을 밝히며 그 초능력을 빌어 창의적 영감을 구하고 예술적 파격을 시도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정도에 따라 와인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와인은 훌륭한 사랑의 묘약으로 남녀 간에 애정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감정을 자극하며 욕망을 부추기는 효과가 있다. 더 나아가 술은 간음, 방탕, 매춘과 같은 부도덕한 행위를 위해 남용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와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져 있었고 특히 여성의 음주에 대한 폐단을 경고하는 서적이나 그림들이 상당수 제작됐다. 네덜란드 풍속화가 피터 데 호흐(Pieter de Hooch)의 ‘정원의 세 인물’도 와인을 마시는 여성을 그린 많은 그림들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주택의 안뜰에 테이블을 놓고 세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들 중 젊은 여성은 와인 잔에 레몬즙을 짜 넣는 중이며, 마주 앉은 남성이 이를 조급하게 바라보고 있다. 뒤에 서 있는 나이 든 여성은 미소를 띤 채 맥주잔을 들고 젊은 여성의 행동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인물화는 네덜란드 회화에서 전형적인 매춘 장면을 나타낸다. 두 남녀 사이에 있는 나이 든 여성은 이들을 연결하는 뚜쟁이 역할을 한다. 젊은 여자는 곧 와인을 마시고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와인이 성욕을 자극해 여성의 정숙함을 해치고 타락으로 이끈다는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른쪽 배경에는 혼자 그릇을 닦고 있는 여성이 보이는데, 부지런히 가사에 열중하는 여성의 미덕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그림은 매춘부로 보이는 여성의 부도덕함과 근면한 주부의 미덕을 대비시켜 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권유하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크 시대의 그림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는 서민이나 여성들은 와인의 상징을 빌어 명백한 도덕적 교훈을 던진다. 그런데 그 공언보다 앞서는 것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애정이다. 바쿠스가 들고 있는 술잔은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풍요로운 세상을 구가하며 한바탕 놀아보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다. 또한 일상생활 장면에 와인이 흔히 등장하는 것은 실제로 그와 같은 광경이 자주 벌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와인은 의무나 규제로부터 일탈을 도와주고 해방감을 안겨주며, 창조적 영감과 사랑의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묘약이다. 그림 속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은 세속의 일탈을 즐기면서 그로 인한 불안감을 동시에 나타낸다. 와인이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는 아마도 이에 대한 상징적 방어막이자 안전장치가 아니었을까.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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