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남자, 장진우 성공 스토리

15개의 F&B(Food and Beverage) 매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이고 포토그래퍼이며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기도 한 장진우. 나이 서른에 자기 이름으로 된 ‘거리’가 있는 남자, 그가 살아 온 방식을 보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Issue Maker] 겨우 나이 서른에 자기 이름의 거리를 가진 남자
몇 년 전 장진우라는 이름이 홀연히 떠올랐다. 젊은 포토그래퍼인데 요리도 잘해서 그의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몇몇 트렌드세터들 사이에, 혹은 블로거들 사이에 오르내리던 그 이름은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모두가 아는 이름이 됐다. 이제는 ‘식상’하다고 할 정도로 이미 뜬 동네가 돼 버린 이태원 경리단길은 그렇게 그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지난 7월 중순, 경리단길에서 기자가 목격한 풍경도 일상적이니, 주택가 골목골목에 들어선 레스토랑 혹은 카페를 찾아갈 때 ‘장진우 식당’과 그가 운영하는 다른 가게들이 ‘이정표’가 되는 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리단길의 일명 ‘장진우 거리’라 명명된 골목에서 그가 운영하는 가게만 10개. 그 첫 시작이었던 동네 목욕탕 옆 간판도 없는 ‘장진우 식당’부터 장진우 다방, 문오리, 방범포차, 경성스테이크, 프랭크, 마틸다, 그랑블루, 장스시, 장진우 국수 등이 일가를 이루고 있다. ‘장진우’를 연결고리 삼은 이 가게들은 각자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 아닌 공통점. 물론 콘셉트부터 인테리어까지 공간 디렉팅은 그의 몫이다. 최근에는 경리단길 밖으로 확장돼 갤러리아 고메이494에도 ‘장진우 식당’이 입점하고, 대구에도 마린타코 가게를 여는 등 명실상부한 F&B그룹의 면모를 갖춰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이블 딱 하나 들어선 작디작은 식당 주인이던 그가 이 많은 일을 해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믿기 어려운 건 이 모든 게 불과 5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경리단길에 장진우가 나타난 지 5년, 이제 그는 새로운 ‘가치’의 척도가 됐다. 누군가 성공을 말할 때도 창업을 말할 때도 심지어 부동산 시장에서조차 장진우란 이름은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용어는 그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5년 만에 경리단길을 바꾸다
사적으로 그의 스토리가 놀랍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미 장진우란 남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뜨면 거의 ‘신상 털기’ 수준으로 정보가 노출되는 요즘이니까. 아주 최근의 것까지 더해진 그 정보의 내용은 이러하다. 포토그래퍼 겸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서재 겸 회의할 사무실이 필요해 식당이 딸린 자신만의 작은 공간을 얻었고 그곳에서 지인들에게 직접 요리해 밥을 먹이다 보니 점점 소문이 나 돈 받고 파는 장진우 식당이 됐다는 것, 거슬러 올라가면 포항에서 나고 자랐고 어릴 때 ‘국악 신동’ 소리를 들었다는 것, 중학교 때 사격을 했지만 대학은 특기생으로 중앙대 국악과에 들어갔고 사진은 복수 전공했다는 것, 현재 이태원 경리단길과 그 외의 곳에서 독자적으로 또는 동업 방식으로 15개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며 연매출은 30억 원에 달한다는 것 등등. 그의 식당에서 한 번도 음식 맛을 본 적은 없지만, 가 본 사람들마다 엄지를 치켜드는 걸 보면 성공의 포인트 또한 ‘실력’일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나니 궁금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장진우란 남자에 대해 많은 게 알려지면서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기업가 출신도 아닌, 더구나 이제 나이 서른인 남자의 ‘현재’에 대해, 그리고 현재가 있기까지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 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좋은 얘기도 있었고 나쁜 얘기도 있었다. 겪은 일도 있고 들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점심시간 무렵 만난 그는 영락없이 근처에 사는 동네 주민의 모습 딱 그대로였다. 중소기업 수준의 ‘청년 재벌’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치고는 소박해도 너무 소박했지만 여기까지는 예상치. ‘자본주의식 성공’에서 ‘나라 걱정’, 그리고 ‘장진우 방식의 사회공헌’까지 다양한 화두를 넘나드는 동안 때로 그는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허를 찌르기도 했다.


장진우 대표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네, 맞아요. 욕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저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건물이라도 몇 개 갖고 있다고 하면 또 몰라요. 임대료 꼬박 꼬박 내고 세금도 잘 내면서 장사하고 있는데 왜 욕을 먹는지 모르겠어요. 경리단길을 망쳤다느니,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느니 하고 탓을 하는데 낙수효과 노리고 임대료 많이 주고 들어오는 사람들까지 제가 막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자본주의인데 말이에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걸 바꾸기 위해 어떻게 노력할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아무나 욕하고 보는 사람들, 참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누구는 10배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데, 욕할 시간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요.”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들이 많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거예요. 네가 뭔데 패러다임을 바꾸느냐 그거죠. F&B를 하면서 주 5일 근무에 하루 8시간 근무 조건을 준수하기 위해 저희는 저녁장사만 해요. 인건비 기준도 다르니 그런 것들이 싫은 겁니다. 사람들을 데려간다고 하는데, 저는 헤드헌팅을 한 적도 없어요. 그들이 저를 찾아오고 그걸 막지 않을 뿐이죠. 대한민국에서 저만큼의 국민성을 갖고 있으면 아마 지금보다는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요.”

목적을 띤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아뇨, 저는 처음부터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돈을 벌었어요. ‘거리를 바꿀 거야’가 아니라 좀 더 좋은 세상,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오래전부터 고민했죠. 고민의 답이 결국, 자본주의니까 내가 돈을 벌어서 내 돈으로 좋은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한 거예요. 매장이 많아지면 직원들도 많아지고, 그들의 삶이 되는 거잖아요. 작은 가게라 해도 기업윤리가 있어요. 매장 하나가 작은 경제를 만들고 그게 모이면 큰 경제가 되는 거예요. 물론 그 과정에서 제 잘못도 있죠.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아요. 불필요한 과정이라고, 그래봐야 에너지 소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좋은 사람과 나누기에도 모자란 에너지인데요.”

거의 ‘준재벌’로 생각하면서 오해하는 지점도 있을 거예요.
“개수가 많아졌고 그만큼 매출이 많아졌지만 수익이 많아진 건 아니에요. 봉사 활동이나 기부에 쓰는 비용이 훨씬 더 많아졌죠.”

어떤 봉사 활동을 하는데요.
“일주일에 1번 동네 어르신들 식사 대접하고, 지방에 다니면서 다문화 가정, 소외 가정, 빈곤 마을을 재생하는 일 등에 최선을 다하고 있죠. 오래전에 시집 와 이혼하고 혼자 돼 먹고 살기 막막한 아시아 이주 여성들과 같이 식당 만드는 일도 진행 중이에요. 주객이 전도됐다 싶을 만큼 매장 운영에 쏟는 시간보다 그런 데 들이는 시간이 더 많을 거예요. 사람들이 제가 어떤 일들을 하는지 다 알게 되면 부끄러워할까 봐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인데, 반대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이만큼 된다는 건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런 게 참 재밌는 일이죠. 욕했던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응원해 주는 팬이 되기도 하고.”

사업이 확장되면서 책임감, 부담감도 커질 것 같아요.
“그런 거 없어요. 가진 거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설령 내일 다 없어진다고 해도 그다지 아쉽지 않아요. 다만, 우리 직원들이 없어지는 건 아쉽겠지만, 물질적인 건 전혀 미련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 검소하게 살아요. 아직도 지하방에 살고, 혼자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예전과 달라진 것 없이 살죠. 그게 편하기도 하고요. 330㎡(100평) 되는 집에도 살아 봤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드니 편할 리가 없죠. 그래도 망하면 안 돼요. 제 어깨 위에 있는 직원들, 그 식구들까지 하면 몇 명인데요. 제가 망하면 한순간에 다 잃는 거예요. 모두들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주고 있기 때문에 저만 잘하면 돼요.”

사람 부자네요. ‘장진우 사단’이라는 말도 있던데.
“제가 어릴 때부터 먹여 살린 사람들이 많아요.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라 어려울 때 밥 한 끼 사 주고 자장면 한 그릇 사 주면서 응원을 한 건데 그 친구들이 성장하면서 생각보다 잘 된 거예요. 그래서 ‘장진우 사단’이란 말이 나온 거죠. 제가 응원을 참 잘해요. ‘넌 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고 또 잘못된 건 진짜 독하게 이야기하기도 하죠.”

응원의 힘을 믿는 건 본인도 그렇게 자랐기 때문인가요.
“전 반대예요. 질투와 시기로 자란 ‘결핍의 결정체’였죠. 부모님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떨어져 살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리더였기 때문에 아무도 저를 칭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는지도 몰라요. 칭찬받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많아진 거죠. 모자란 사람, 못하는 게 많은 사람인데 노력해서 된 표본이에요, 제가.”


돌아보면 아파서 앞을 향해 달린다
역시나 이미 알려진 대로 그는 중학교 때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었고, 싸움에도 휘말리면서 ‘퇴학’을 당했다. 이후 혼자 살면서 생계를 위해 자장면 배달도 했다. 당시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암흑기’였다. 딱 봐도 단단해 보이는 그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고 할 정도다. 그 시절에 비하면 그 어떤 힘든 일도 절대 힘든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서툴고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에게 주었던 상처를 이제는 그의 방식으로 갚아 나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리라. 그가 앞을 보고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갈 수 있게 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돌아보면 아픈 시간이기 때문에 늘 앞을 향해 있는 것, 지난 5년의 시간도 같은 맥락이다.


경리단길에 처음 ‘장진우 식당’이 생기고 5년 만에 엄청난 일을 해냈어요.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저 스스로도 정말 대견합니다. 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상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과거가 행복했다면 멈춰 있을 수 있는데, 불행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돌아보지 않는 거죠. 오늘이 있기까지 지난 5년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겠어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고, 친구들이 당시엔 저보다 더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기도 했었어요. 결국 제가 이겼지만, 이겨서 기쁜 게 아니라 아픈 거예요.”

어떤 게 제일 힘들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요. 가게 하나 내는 데도 알아야 할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노동법이 뭔지, 건축법이 뭔지 모르고, 식품위생법도 모르지, 임대차 보호법도 모르지, 세금도 전혀 모르지 도대체 대학까지 나와서 왜 이렇게 멍청한가 싶더군요. 원래 있던 가게를 임대했을 뿐인데 무슨 위반이라며 세금만 1000만 원이 나온 적도 있고, 계약서를 잘못 쓴 경우도 있었죠. 아무도 알려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 모든 과정을 몸으로 겪으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게 어디 저만의 일이겠어요. 우리는 아무도 교육받지 못한 채 창업 시장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다 보니 열심히 일해도 보람도 없고 망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거죠. 그래서 학교를 만든 거예요.”

창업스쿨 말이군요.
“네, 맞아요. 그게 제 방식이에요. 제가 뽑은 대통령이든 아니든 대통령이 됐다면 잘 될 수 있게 응원해야 한다는 주의죠. 앉아서 욕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 보고, 그게 성공하면 그걸 가지고 나라 정책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실천하는 겁니다.”

창업스쿨에선 어떤 것들을 가르치나요.
“사람들은 제가 창업 아이템을 알려 주는 줄 아는데, 세금, 임대차, 건축법에서부터 주문받는 법, 서비스하는 법, 상표권 문제까지 실무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다 전문가들이 와서 교육해요. 기수당 25명이 정원인데 일주일에 2번씩 2개월 과정으로 진행되죠. 에너지가 다 빠질 만큼 힘든 일이지만 꼭 해야 할 일이에요. 지금까지 3기를 진행했고, 1기생들 중 이미 창업을 한 친구들도 많아요. 얼마 전에도 1기 졸업생이 매출 6000만 원 올렸다고 연락이 와 얼마나 보람 있었는지 몰라요.”
[Issue Maker] 겨우 나이 서른에 자기 이름의 거리를 가진 남자
장진우 대표가 직접 투자하고 매장까지 임대해서 졸업생들에게 인큐베이팅 장소를 제공한다면서요.
“창업스쿨 수강료가 200만 원이에요. 정당한 페이를 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교육이라도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처음엔 무료로 해 봤거든요. 그랬더니 한 1만 명이 들을 준비도 없이 와서는 제대로 진행이 안 되더라고요. 그 대신 수강료는 강사 섭외를 포함해 100% 투자하죠. 창업스쿨을 졸업한 후에도 인큐베이팅 과정이 필요한데, 천안에 8팀, 경리단길 사무실에 4팀이 시작해 꽤 괜찮게 하고 있어요.”

장진우 방식의 사회공헌이네요. 그것 말고도 새롭고 재밌는 일을 ‘모의’ 중이죠. 제주 펜션도 한창 공사 중이라고 하던데요.
“토리코티지와 손잡고 하는 일인데,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어요.(웃음) 사실 제가 하는 일들은 완성되기 전까진 재미가 없어요. 과정은 정말 힘들고 싫어요. 시도하면 안 되는 걸 시도하니 많은 고민을 해야 하고 당연히 과정이 재미없지 않겠어요. 편하게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어요. 제가 롤 모델인 친구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그 사람들에게 상처주면 안 되잖아요. ‘돈 좀 벌었다고 저러나.’ 그런 이야기 정말 많이 들려요. 그래서 저는 더 잘해야 해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할 때 ‘성공’이란 단어를 빼놓지 않는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못하는 게 많기 때문에 노력해서 얻은 현재’라는 그의 얘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무도 뻔한 진리여서 어쩌다 신빙성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다시 그에게서 확인한 순간이었다.


박진영 컨트리뷰팅 에디터│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