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의 창궐로 도시 전체가 폐쇄된 오랑시. 이 도시 속 인간들은 ‘이별을 기다리는 무미건조한 대합실’에서 살기 위한 이유있는 반항을 모색한다.
일러스트 정재환
일러스트 정재환
이 사건은 ‘194X년 4월 16일’부터 시작된다. 처음 발단은 대수롭지 않았다. 의사 리유가 출근길에 건물 계단 쪽에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발견한 것. 그러나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죽은 쥐 6231마리가 수거됐다. 또 며칠 뒤 수거된 죽은 쥐의 숫자가 8000마리로 늘어났다. 알제리의 작은 도시 오랑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뒤숭숭한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실체를 드러냈다. 바로 끔찍한 전염병의 이름, ‘페스트’. 행정당국은 이 끔찍한 전염병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병의 확산에 백기를 들게 된다.
프랑스에서 ‘페스트’는 14세기 인구의 절반을 앗아간 비극의 이름이다. ‘중세’가 바로 페스트의 창궐로 인해 막을 내렸다는 진단은 우스개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페스트가 1940년대 오랑시에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길거리에 쥐의 사체가 널려 있고 열병이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

시민들은 이 전염병이 페스트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며 불안해했다. 행정당국은 하수도를 소독하고 환자를 격리 조치한다고 하면서 자진신고 명령까지 내렸지만 전염병이라는 것이 단지 나만 조심한다고 해서 예방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결국 결정을 미루었던 도지사는 ‘페스트 발병을 공표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제 오랑 시민은 외부와 연락이 불가능하게 됐다. 물론 전출입도 불가능했다. 페스트가 소멸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를테면 오랑에 잠깐 취재차 왔던 랑베르 기자 또한 전출입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페스트 도시에 갇혀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해서든 이 죽음의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 ‘나는 오랑시 주민이 아니잖아’라는 절절한 외침이 그것, 그러나 ‘페스트 사태’에 예외는 없었다.

시민이든 그렇지 않든 페스트는 ‘지금 여기’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되는 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오랑시의 주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출입이 금지된 성문에서 종종 싸움을 벌이며 페스트 도시에서 도망치고자 하지만 굳이 감찰대가 아니더라도 페스트 사태에서 몇몇 환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주민 전체가 매일매일 이 분위기 속에 압도됐던 것은 아니다. 언제 걸릴지도 모르는 병이기에 끔찍하기도 했지만 오랑시의 주민들 전체가 삶의 활기를 잃지는 않았다. 영화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렸고 식당과 카페에도 예전보다는 적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마트나 상점은 그간의 재고를 갈아치우며 흑자를 기록했다. 또한 이런 현실 이면에서는 북받쳐 올랐던 불안과 분노 등의 감정들이 체념과 좌절로 이어지며 도시 전체가 마치 이별을 기다리는 무미건조한 ‘대합실’을 방불케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루하게 계속되는 비극을 견뎌 내기 어려워 ‘차라리 한번에 무너지는 지진’이 낫겠다는 절망의 소리가 이어지기도 했다.

또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페스트 사태’를 굉장히 악질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코타르라는 사람의 경우인데, 그는 ‘폐쇄적이고 어딘지 약간 멧돼지 같은 모습의 말이 없는 사내’로 페스트가 가져다준 ‘공정한’ 비극성의 사태를 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페스트는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또는 늙었거나 젊었거나 앞뒤를 가리지 않고 걸린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페스트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투자를 통해 짭짤한 수익을 얻게 된다. 그가 원한 것은 공정함이 아니라 실은 자신의 불운을 혼자만의 행운으로 바꾸는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예방’과 ‘단속’을 강조하는 행정당국의 조치도 최선의 방책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포고문이 꼭 필요한 안내문이었다고 해도 이것이 미친 결과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상상력뿐이었다. 사람들은 문을 꽁꽁 닫아걸고 길거리에서 옷깃이 스치는 것도 조심스러워하지만 이는 결국 각자도생의 방책과 맥을 같이 했다.


재앙의 도시가 던진 질문은 ‘삶’
그러나 이 소설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리유’만은 달랐다. 그는 소설 초반부터 행정당국을 설득해서 페스트 사태를 공표하도록 설득했던 인물이다.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문제를 같이 해결하기 위한 일명 ‘보건대’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한다. 보건대란 페스트 사태를 해결해 가는 대책기구다. 페스트 사태에 직면해서 리유가 보여 주는 여러 행동은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선 오통 판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는 어린 아들이 감염돼 가족 전체가 격리되는데 아들이 죽은 후에도 수용소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페스트 사태가 단지 나와 내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소 안 모든 이들과 그를 둘러싼 오랑시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통 판사는 “다시 수용소에 들어가 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러한 선택은 신문기자 랑베르에게서도 보인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인물이었지만 그가 마지막에 내린 결정은 오통 판사와 다르지 않다.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오랑시에 남기로 결정하는 것. 이들의 결정은 페스트라는 재앙 속에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작가의 생각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분명치는 않지만 인간이란 인간들 없이 살아 나갈 수 없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같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은 요컨대 양심을 갖는 것’이라는 생각의 다름 아닐 터.

페스트, 이 창궐하는 질병은 단지 전염병의 이름만이 아니다. 까뮈조차 “소설 ‘페스트’를 통해 그리고자 했던 것이 질병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페스트는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이 마주해야 하는 또 다른 불가항력적인 세계의 이름이다. 높은 과학기술과 무관하게 방어할 수 없는 것, 예측하기 전에 도래해서 압도하는 것, 그래서 재앙 같은 것이지만 예측도 방어도 가능하지 않은 세계.

까뮈는 이런 사태를 두고 부조리하다고 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나 뛰어난 기술로 설명될 수 없는 질서, 그럼에도 부지불식간 인간의 세계를 잠식시켜 버리게 하는 이 거대한 힘을 두고 ‘부조리’라고 부른 것이다. 절망뿐인 세계이지만 그 속에서 붙잡게 되는 희망이 있다는 역설과 모순의 전언, 그러므로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 전체의 문제로 사유한 후 행동하는 것이라는 까뮈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이 현실 속에서 의사 리유가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알레고리로서 페스트 같은 재난에 적어도 각자도생의 방법으로는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것, 다른 이들과 같이 살아남기 위해 사소한 일이라도 같이 해내야 한다는 것, 그럴 때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실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그의 말에서 반항이란 인간으로서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 실존의 한 방법이었음을 한번쯤 새겨 볼 일이다.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