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베트남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한 지 20주년이 되는 가운데 전방위적으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양국은 과거 전쟁까지 벌였지만 이제는 친구가 된 셈이다. 그 배경은 뭘까.
[Global Monitor] 미국과 베트남의 전략적 악수
미국은 1960년 12월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봉기하자 남베트남에 군 병력을 파견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민간인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군 병력 55만3000명을 파견했고, 이 중 5만8000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1975년 베트남에서 완전 철군했고, 남북 베트남은 통일되면서 공산국가가 됐다. 남베트남에선 민간인 43만 명이 사망했고, 남베트남 정부군 22만 명, 북베트남 정부군과 남베트남 비정규군인 베트공은 110만 명이 숨졌다. 베트남 전쟁은 사실상 미국으로선 패배한 전쟁이다. 베트남이 공산국가가 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베트남 양국은 그동안 관계를 단절해 오다 1995년 7월 11일 다시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당시 베트남과 수교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선 사상 처음 베트남을 방문해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이후 양국은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긴밀하게 협력해 왔다. 특히 양국은 서로 총칼을 겨눴던 과거를 청산하는 조치도 취해 왔다. 양국은 2011년 방위협력 강화 양해각서(MOU)를 교환했고,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 6월 베트남을 방문해 방위협력 공동비전 성명에 서명하기도 했다.

양국은 경제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해 왔다. 베트남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하고 있는 12개국 중 하나다. 베트남은 TPP 참여를 통해 미국과의 교역을 확대함으로써 30%에 달하는 중국에 대한 교역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TPP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대항하는 성격의 조약이다. TPP가 타결될 경우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의류 수출국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베트남 기업들은 중국보다는 기술이전을 통해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미국의 다국적기업들과의 생산 협력을 선호하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교역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양국 교역 규모는 2004년 62억 달러에서 지난해 377억 달러로 10년간 6배 이상 늘었다.


베트남, 미국의 다국적기업 선호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은 지난 7월 6일부터 10일까지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을 방문한 것은 수교 이후 처음이다. 이에 앞서 쯔엉 떤 상 베트남 국가주석이 2013년 7월 미국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국가원수는 국가주석이지만 공산당 서기장은 권력 서열 1위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다. 따라서 쫑 서기장의 방미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쫑 서기장은 지난 7월 7일 백악관을 방문해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다. 오벌 오피스는 상대국 정상이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거나 예우를 갖출 때 회담장으로 사용하는 장소다.

오바마 대통령은 “양국은 상호 신뢰를 통해 건설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쫑 서기장도 “양국은 과거를 극복하고 적에서 친구가 됐다”면서 “양국 관계는 앞으로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쫑 서기장은 TPP 조기 체결을 비롯해 군사협력 문제 등을 논의했으며, 양국의 우호 협력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로 합의했다. 특히 두 지도자는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등에 대한 대응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베트남은 그동안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과 인공섬 건설에 강력 반발해 왔다. 이 때문에 베트남의 입장에선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도 중국의 해군력 증강을 견제하고 남중국해를 비롯해 동남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베트남과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전략적 이해관계를 볼 때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는 앞으로 밀월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친미·반중 정서 뚜렷
미국과 중국 모두와 전쟁을 벌였던 베트남이 미국과는 화해하면서도 중국과는 사이가 나쁜 이유는 역사적인 앙금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중국의 고사성어인 ‘칠종칠금(七縱七擒)’에 나오는 국가다.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 준다’는 뜻인 이 고사성어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남만의 왕맹획을 사로잡은 얘기에서 비롯됐다. 남만은 중국의 역대 왕조가 남방 민족을 멸시해 일컫던 명칭이다. 남만은 현재로 볼 때 베트남과의 접경 지역이다. 베트남은 과거부터 중국과는 앙숙이었다. 베트남은 지난 1000여 년간 중국 역대 왕조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배, 조공을 바치는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복종하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 왔다. 베트남에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두 명의 영웅이 있다. 한 명은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이고, 다른 한 명은 해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쩐흥다오(1228~1300년) 장군이다. 쩐 장군은 원나라의 세 차례에 걸친 침입을 물리친 인물이다. 특히 쩐 장군은 1287년 원나라의 3차 공격 때 현재의 하롱베이 부근 바익당 강 전투에서 원나라 군대를 전멸시켰다. 베트남 국민의 가슴 속에는 이런 역사적 긍지와 자부심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양국은 1979년 2월 17일부터 약 한 달간 국경 지역에서 전쟁까지 벌였다. 당시 베트남은 이웃나라인 캄보디아를 침공해 친중국 성향의 크메르루즈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에 화가 난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보복으로 국경 지역을 공격했다. 하지만 중국은 베트남의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철군했다. 사실상 베트남의 승리였다. 역사적으로 보나 전쟁했던 관계로 보나 베트남은 현재 아세안 10개 회원국들 중 가장 반중 정서가 강한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은 현재 남중국해에 있는 난사(베트남명 쯔엉사)군도와 시사(호앙사)군도를 놓고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현재 시사군도의 모든 섬을, 난사군도에선 8개 섬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 반면 베트남은 난사군도에 있는 29개 섬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시사군도에서 3개 섬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1974년 중국과의 해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이 섬들을 빼앗겼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군사적으로 볼 때 다윗인 베트남은 골리앗인 중국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고 있다. 양국은 모두 공산당이 일당 지배하는 독재국가다. 이념이나 통치 체제가 같아도 영토 문제에선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과 베트남은 앞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 분명하다. 양국의 관계 강화는 동남아는 물론 아시아태평양 지역 질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베트남 경제 도약의 비결은 도이 머이 정책
베트남은 통일 이후 10년간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 베트남 공산정권이 시장경제 체제를 완전히 부정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에 직면한 베트남 공산정권은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도이 머이’라는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도이 머이는 베트남 말로 ‘새롭게 한다’ 또는 ‘쇄신’을 뜻한다. 응웬 반 링 당시 공산당 서기장은 인플레이션이 587.2%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공산주의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시장경제 체제를 추진할 것을 선언했다. 도이 머이 정책에 따라 도입된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농업 개혁이었다.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가 갖되 농민 개개인에게 장기사용권을 부여함으로써 생산력 향상을 유도하는 토지법을 제정했다. 이후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1988년 3억7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014년 202억3000만 달러로 50배 넘게 불어났다. 경제성장률은 1991부터 2000년까지 10년간 연평균 7.5%대를 기록했다. 베트남 정부는 글로벌 기업들을 대거 유치해 제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등 제2의 도이 머이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베트남 정부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대외 개방과 국제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미국과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물론 유럽연합(EU)과도 FTA 협상을 타결할 계획이다. 베트남 정부의 제2의 도이 머이 정책에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해 각국의 많은 기업들이 베트남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고 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