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림의 스타일이 있는 식탁
필자에게 여름은 다채로운 유리그릇을 맘껏 사용할 수 있는 계절이다. 크리스털의 우아하고 깔끔하며 시원한 느낌은 무더운 여름철, 품격 있는 테이블 세팅에 제격이다. 수천 년 전부터 유리는 항상 그 시대 최고 수준의 기술과 연계된 예술 문화를 낳았다.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유리의 제조법과 발색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고 하니 인류는 실로 오래전부터 유리에 매혹돼 있었다.베네치아의 거울, 유럽 귀부인들 열광
문화의 융성기였던 르네상스 시대에도 역시 고도로 발달된 유리 산업이 있었다. 15세기경부터 새로 개발된 베네치아의 거울은 유럽의 귀부인들을 열광케 했다. 종래의 희미했던 금속 거울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평면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리 거울의 가치는 당대의 거장인 라파엘로의 그림보다 3배나 더 비싼 가격이었다고 하니 상당한 가치로 베네치아의 유리 거울이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의 ‘유리의 방’ 역시 이러한 유리의 몸값에 연유해 왕실의 부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거울 이외에도 다양한 유리 기술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척할 수 있었으며 유리 기술의 유출을 우려해서 장인들을 ‘무라노’ 섬에 유폐했다.
19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나타난 아르누보 예술사조는 유리 예술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을 강타했던 자포니즘의 강한 영향 아래 낭시파의 거장 에밀 갈레와 돔 형제는 유리공예의 르네상스를 이끈 위대한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특유의 상감 유리 기법을 통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갈레가 제작한 유리그릇의 특징은 고대 카메오에서 힌트를 얻어 불투명 혹은 반투명 색유리에 층을 달리해 색의 효과가 잘 나타나게 한 데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보석사 티파니 창업자의 아들인 루이스 컴퍼트 티파니 역시 유리공예에 특별한 이정표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중세 고딕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영감을 받아 채색 유리창, 타일, 꽃병, 램프 등 예술성 있는 다양한 제품을 제작했다. 또한 어떤 빛깔의 유리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파브릴(favrile)이라는 유리제품을 만들어 냈다. 그가 특허를 낸 이 유리는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색상을 연출할 수 있었다. 루이스 컴퍼트 티파니의 스튜디오는 당시로서는 역사가 짧았던 미국의 예술 산업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스탠드는 지금도 경매 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낙찰되고 있다.
아르누보를 빛낸 많은 유리공예 예술가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작가는 르네 랄리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보석 세공사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지만 1901년부터는 유리 작업에 몰두해 1910년경에는 주얼리 제작을 중단하고 오직 유리제품의 제작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작품 세계를 전환했다. 유리공예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랄리크의 혁신적인 행보는 그가 프랑수아 코티로부터 향수병 디자인을 주문 받은 1908년에 이루어졌다. 랄리크가 새로 고안한 유리 제조 방법은 정밀한 조각이 필요한 향수병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다. 당시 향수병은 손으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값이 비싸서 귀족층만의 애용품이었다. 랄리크는 그의 서정성 있는 표현과 모던한 용기 형태에 힘입어 곧 세계적으로 팬을 갖게 됐다. 그의 유리 제조 사업은 확장을 거듭했고 특히나 크리스털은 반짝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우아한 크리스털 제품의 제작에 몰두했다. 프로스티드(frosted) 크리스털 볼이나 오팔레슨트(opalescent) 볼은 랄리크의 독특한 유리공예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랄리크는 여체를 외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고혹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랄리크처럼…즐거운 일은 행복해지는 첫걸음
필자는 아르누보의 많은 작가들 중에서 특히나 랄리크를 좋아한다. 랄리크는 이미 보석 공예가로서 명성이 정점에 닿아 모든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을 때 홀연히 유리공예로 그의 작품 세계를 과감하게 전환했다. 당시로서는 꽤 많은 나이였던 50세 무렵에 그는 새로운 작품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우리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바로 현재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다짐할 때인 듯하다. 랄리크처럼 거창한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아니더라도 오늘의 나를 소중히 하고,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부터 행복해지는 첫걸음을 떼어 보자. 1. 아르데코 시대의 카메오 디저트 접시.
2. 손잡이 부분이 프로스티드 크리스털로 처리된 너트 디시(1920년).
3. 에칭 처리된 문양이 아름다운 르네 랄리크의 병마개(1920년).
4. 은을 상감한 아르데코 시대의 샐러드 접시(1930년).
5. 컵 부분의 조각이 아름다운 아르데코 시대의 칵테일 글라스(1930년).
6. 살구빛 카메오 장식이 포인트인 르네 랄리크의 물병(1920년).
여름철 크리스털 테이블 세팅 TIP
1. 테이블 세팅에서는 색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질감의 조화도 중요하다. 조각이 화려한 크리스털 접시를 낼 때 비슷한 질감의 접시나 컵을 함께 레이어드한다.
2. 시원한 느낌을 주고자 너무 블루를 많이 쓰다 보면 오히려 답답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블루와 깔끔한 클리어 유리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시원한 느낌을 더하자.
3. 여름철에는 평소보다 큰 물 잔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물을 많이 먹게 되므로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테이블 세팅의 느낌도 더 시원해질 수 있다.
4. 냅킨 링을 함께 세팅할 경우에는 스털링 링보다는 유리 냅킨 링을 써보는 것도 세팅의 재미를 더할 수 있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품위 있고 따뜻한 홈 문화를 추구하는 하우스 갤러리 이고 대표다. 앤티크 테이블웨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테이블 세팅 클래스를 티파티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백정림 이고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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