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석 교수 & 이윤경 기자의 ‘식탐’- 봉피양

새콤달콤한 맛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투박하고 슴슴한 맛의 평양냉면 육수가 통할까 싶지만, 매년 여름이면 평양냉면 마니아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전국의 유명 냉면집을 순례한다. 자극에 길들여진 미각이 본연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봉피양은 평양냉면업계에선 후발주자지만, 맛으로 여러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냉면 ‘성지순례지’ 가운데 한 곳이다. 벽제갈비를 운영하는 벽제외식산업개발의 김영환 회장이 10년 전 ‘우래옥’ 출신인 62년 경력의 평양냉면 장인 김태원 명장을 영입해 차별화된 실력으로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예종석 한양대 교수는 몇 해 전 한 매체에서 실시한 ‘서울 시내 냉면집 평가’에 평가단으로 참여해 “(100% 메밀) 순면은 대한민국 최고”라며 “냉면전문점은 아니나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냉면을 내주는 집”이라고 봉피양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 이후 ‘평양냉면계의 샛별’로 부상한 봉피양은 얼마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3대 냉면집으로 소개되며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취재차 이곳을 찾은 지난 6월 16일에도 점심때가 한창 지난 시간까지 손님들이 냉면을 먹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김영환 회장은 “지난 몇 년 사이 달라진 평양냉면의 위상에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평양냉면은 담백하면서도 심심한 육수의 참 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손님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한 신혼여행객이 봉피양 인천공항지점에서 우리 집 냉면을 먹고 ‘이게 무슨 음식이냐’며 ‘돈을 환불해 달라’고 한 적도 있었죠. 여전히 평양냉면의 진가를 제대로 알고 즐기는 사람들은 우리 국민 전체를 100으로 봤을 때 5 정도에 불과하지만, 점점 그 숫자가 늘고 있어 기쁩니다.”

예 교수 역시 “‘단순함의 미학’으로 불리는 평양냉면에 대중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식재료와 음식 본연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미식가들이 늘고 있다는 반증이다”라고 말한다.

“20년 전부터 젊은 친구들에게 ‘진짜’ 평양냉면을 먹도록 인도했어요. 어떤 날은 동호회원들과 하루 저녁에 냉면집 세 군데를 돌기도 했지. 예로부터 평양냉면은 ‘미식의 극점’에 있는 음식으로 꼽히는데, 그 담백하고 슴슴한 맛을 이해하면 비로소 음식 맛을 안다고 할 수 있죠.”

예종석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평양냉면의 계보는 크게 의정부파와 장충동파로 나뉜다. 평양냉면은 이북에서 먹던 음식으로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 온 평양 사람들에 의해 전파됐다. 의정부파 평양면옥의 뿌리는 ‘의정부 평양면옥’이다. 거기서 파생돼 나온 냉면집이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이다. 장충동파 평양면옥은 ‘논현동 평양면옥’과 ‘분당 평양면옥’으로 가지를 쳐나갔다. 서울 중구 주교동에서 70년째 성업 중인 ‘우래옥’은 평양에서 유명한 냉면 맛집이었던 ‘명월관’의 주인이 월남해 1946년에 개업했다. ‘서부면옥’, ‘을밀대’ 등이 그 뒤를 따른다.
봉피양의 평양냉면.
봉피양의 평양냉면.
고백하자면, 기자 역시 몇 년 전부터 서울 시내 유명 평양냉면집 가운데 몇 군데를 ‘의무감’에서 가보았지만 그 매력에 푹 빠지지는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먹어 온 새콤달콤한 맛의 ‘가공된’ 평양냉면에 미각을 빼앗겨 버린 이유에서 일 것이다.


62년 평양냉면 외길인생 김태원 명장
예 교수와 한창 평양냉면의 계보를 논하던 중 김태원 명장이 주방에서 일을 끝마치고 인터뷰 장소에 등장했다. 김 명장은 올해 76세로, 62년째 평양냉면 외길인생을 걸어오고 있는 냉면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매일 아침 6시면 출근해 500리터가 넘는 육수를 끓이고 20년 넘게 자신의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후계자들에게 비법을 전수한 뒤 오전 11시면 행당동 자택으로 퇴근한다. 그는 하루 평균 800그릇의 평양냉면을 만든다.

충북 청원군 옥산면 출신인 김 명장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징집을 피해 무조건 서울로 도망쳐 왔고, 우연히 소개로 취직한 ‘우래옥’에서 처음 평양냉면을 만들었다. 1978년 ‘우래옥’의 종로 분점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하루 20그릇 팔리던 냉면이 400그릇 넘게 팔리면서 대히트를 쳤으며,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 시절에는 경무대에서 사람들이 나와 그의 냉면을 사 가기도 했다. 실력을 쌓은 김 명장은 1980년대 유명 요정이었던 ‘대원각’에 주방장으로 스카우트 돼 10년을 더 일했다. 그 후 다시 초야에 묻혀 있던 그를 김영환 회장이 봉피양으로 데리고 왔다. 언젠가 육수를 끓여내다가 뜨거운 물이 눈에 튀어 한쪽 눈을 실명한 탓에 김 명인은 대화 도중 눈을 찡그렸다. 예 교수는 “김 명장의 장인정신이 후발주자인 봉피양을 오늘날 평양냉면계의 스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서울 방이동 봉피양에서 예종석 교수(왼쪽)가 김태원 명장과 평양냉면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 방이동 봉피양에서 예종석 교수(왼쪽)가 김태원 명장과 평양냉면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 명장의 혼이 담긴 평양냉면은 놋그릇에 도도하게 담겨 나왔다. 한 그릇에 1만2000원(100% 메밀 순면은 1만6000원)을 받으니 일반 냉면 가격의 두 배 정도다.

봉피양의 평양냉면 육수에는 김 명장의 62년 세월이 담겨 있다. 한때 그는 고기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었지만, 최근 다시 과거의 조리법으로 돌아가 쇠고기와 돼지고기, 노계, 감초, 생강, 파, 양파 등을 한데 섞어 육수를 끓이고 있다. 이 재료들을 넣고 끓이다 물이 졸면 중간에 육수를 퍼내고 물을 다시 넣어서 한 번 더 끓이는데, 처음 우린 육수와 두 번째 육수를 섞어서 최종적으로 육수를 뽑아낸다.

김 명장이 제분소에서 메밀을 직접 빻고 전분과 배합해 뽑아내는 메밀면은 투박한 질감의 본질을 잃지 않는다. 메밀의 함량이 높은데도 뚝뚝 끊기지 않으며, 그렇다고 질기지도 않다. 김 명장은 “메밀과 전분을 8:2로 섞어 면을 뽑으면 가장 쫄깃하면서 구수한 맛이 좋다”며 “나이 많은 손님들을 위해 100% 메밀로 만든 메밀 순면도 별도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육수 속에 새초롬히 잠긴 면발, 여기엔 새콤하게 절인 얼갈이배추 김치와 편육 한 점, 심심하게 절인 무김치가 올라가 있다. 삶은 달걀 반쪽 대신 얇게 채썬 달걀지단이 들어가는 것이 다른 브랜드와의 차별점이다.


입 안 가득 육수 머금고 음미해야 제 맛 알아
“평양냉면의 참맛을 알기 위해서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을 게 아니라 그릇째 들고 국물을 한 입 가득 머금은 다음 그 맛을 음미해야 한다”는 게 예 교수의 설명이다. 국물을 몇 모금 연달아 마심으로써 그 냉면집 고유의 육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그다음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려 식초를 치면 면의 탱글탱글함은 더해지고 육수에 녹아든 고기 잡내는 사라진다.

그의 설명에 따라 냉면 그릇을 들어 두어 번 육수를 들이켰다. 새콤달콤한 냉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밍밍하게 느껴질 맛이다. 하지만 고명으로 올라간 얼갈이배추 김치가 충분히 간을 느끼게 해주었다. 메밀면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배어 나왔다. 그러니 봉피양의 평양 냉면은 급하게 먹을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할 것을 권한다. 예 교수는 “처음 서빙된 그대로 평양냉면을 절반 정도 먹은 후 나머지 반에는 식초와 겨자를 넣어 맛의 변주를 즐긴다”고 했다.

냉면 그릇이 비어갈 즈음 예종석 교수는 평양냉면에 담긴 스토리를 풀었다. 오늘날 여름철 별미인 냉면은 실은 과거 겨울철에 맛있게 먹던 음식이었다. 냉면에 관한 기록은 19세기 중엽에 들어서야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동국세시기’는 냉면을 겨울 시식으로 꼽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엔 냉면을 싱거운 무김치국에다 ‘화청(음식에 꿀을 타는 것)’을 해서 국수를 만다고 전하고 있고, ‘시의전서’에는 청신한 나박김치나 좋은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다고 한다. 오늘날 흔히 먹는 고기 육수와 다르다. 냉면 애호가로 알려진 구한말 고종도 동치미 국물에 면을 말아 편육과 배, 잣을 얹어서 즐겼다고.

예 교수는 “예로부터 가정에서 야참으로 먹고 한말에는 궁중에서도 먹었던 음식인 냉면이 오늘날 갈빗집에서 고기를 먹은 다음에 먹는 후식으로 전락하면서 그 문화가 많이 훼손됐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음식 궁합 측면에서 평양냉면은 불고기와 곁들여 먹었을 때 가장 훌륭한 조합을 자랑한다. 이북 사람들 역시 평양냉면에 불고기를 얹어 먹는 걸 최고의 맛으로 친다.


서울 시내 평양냉면 명가는 어디?
우래옥 중구 창경궁로 62-29, 02-2265-0151
평양면옥 중구 장충단로 207, 02-2267-7784
을지면옥 중구 충무로14길 2-1, 02-2266-7052
남포면옥 중구 을지로3길 24, 02-777-3131
필동면옥 중구 서애로 26, 02-2266-2611
봉피양 서초구 강남대로 53길 11 서초동삼성쉐르빌2, 02-587-7018
을밀대 마포구 숭문길 24, 02-717-1922
강서면옥 중구 세종대로11길 35, 02-752-1945


예종석 교수는…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이자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풍부한 음식 경험과 탁월한 미각을 소유한 음식문화평론가.


이윤경 기자는…
한경 머니 기자.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찾아나서는 맛 탐험가. 레스토랑과 푸드 기사를 쓰는 칼럼니스트.


이윤경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 촬영 협조 봉피양 방이점(02-415-5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