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회사 사장에서 셰프로 변신 강성영 에노테카오토 대표
대학 졸업 후 광고기획자로 한우물만 팠던 강성영 씨가 광고 촬영차 찾은 이탈리아, 스페인의 지중해 음식을 맛본 순간은 그의 삶에 새로운 자갈길 비포장도로가 열린 지점이다. 앞길이 창창했던 광고기획사 사장 자리를 박차고 이탈리아 어촌 마을 식당에서 막내로 시작한 그가 한 포대의 양파를 까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복했다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영업자 줄 폐업’이라는 신문 기사가 더 이상 눈길을 끌지 못하는 시대다. 퇴직을 해도 여유 있는 노년을 즐기기는커녕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반 토막 난 ‘반퇴 시대’가 지금의 현주소다. 특별한 기술 없이 퇴직금만 갖고 인생 2라운드를 준비하고자 하는 이들이 만만하게 생각하고 덜컥 치킨이나 피자 가게를 개업한다. 그러나 2014년 국세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매해 평균 80만 명 정도가 폐업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한 음식점의 5년 생존율이 17.7%라 하니 ‘퇴직-생계형 창업-폐업’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는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잘나가던 광고기획자였던 강성영(56) 씨도 채 20%가 안 되는 승자의 결승선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서울 홍대 부근에서 운영하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작년 연희동으로 이사 오면서 어느덧 8년 차 중견 셰프가 됐다. 트렌디하고 미니멀한 인테리어의 번듯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꽃중년 오너 셰프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의 인생 2막은 밑바닥부터 시작한 인생 역정의 새로운 챕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그래도 이 길밖에…’라는 막무가내 식 창업 행렬에 몸을 실어야 하는 베이비부머 속에서 강 셰프는 ‘사장’이라는 명함을 버리고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돌아가 차곡차곡 기본기를 제대로 다진 사례다.
자동차 광고 촬영차 전 세계 다니다 미각에 눈떠
강 셰프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다시 오지 않을 호황기’에 잘나가는 광고기획자로 일했다. 1985년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직장생활을 대우에서 시작했다. 기획팀에서 광고를 만들다가 오리콤으로 이직했다. 당시 대우의 자사 최초 브랜드인 레간자, 마티즈 등의 자동차 광고를 제작했고 대우 입사 동기와 함께 의기투합해 둘이서 광고 회사를 직접 차렸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겐 미안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던 덕에 대학을 졸업하고 세 군데 기업체에서 서로 입사하라고 했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광고제작비, 마케팅 비용이 넘쳐나던 때였다. 국내에서 광고 촬영을 해도 됐지만 일부러 돈을 써가며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하던 때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촬영 장소를 물색하는 도중 지역의 유명한 맛집 순례가 이어졌다. 경북 예천 출신인 그가 자연스레 ‘맛’에 눈을 뜨기 시작한 계기라고 설명했다. 1999년 광고 촬영차 찾은 이탈리아, 스페인 출장길에 맛본 지중해 음식들은 강 씨의 직함을 사장에서 셰프로 바꾸게 한 도화선이 됐다. 결국 이탈리아로 돌연 요리 유학을 떠났고 식당 막내에서 시작해 지금은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가 됐다.
그가 내린 이 결단이 동시대 같은 연배의 베이비부머의 그것과 달랐을 리 없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고 허드렛일부터 시작하면서 ‘사서 고생’을 각오하고 고스란히 감내했다는 것일 터다.
레스토랑 인테리어가 모던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언제 오픈하셨나요.
“2007년 홍대에 ‘파우자’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하고 작년 9월에 이곳 연희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가게 이름인 ‘에노테카오토’의 ‘에노테카(enoteca)’가 이탈리아어로 선술집이라는 뜻이에요. 소박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추구했습니다. 주방에 식기, 설비를 제외하고 인테리어 비용은 1500만 원 정도 들었어요. 최소 비용으로 했습니다. 임대하는 형편에 돈을 쏟아 부을 이유가 없었죠.”
대학 졸업 후 줄곧 광고인으로 일을 했는데 당시 주로 어떤 일을 맡으셨나요.
“첫 직장이 대우였는데 그 뒤로도 자동차 광고를 주로 많이 찍었습니다. 자동차가 덩치가 크니 자동차 전용 스튜디오도 있지만 주로 야외에서 촬영을 많이 했지요. 통일로가 길만 닦아 놓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촬영도 하고 부산의 버스공장, 전북 군산, 인천 부평 등 지방으로 촬영을 많이 다녔어요. 회사에서 진행비가 나오니 지방마다 다니면서 사진 기자들과 맛집도 많이 찾아다녔지요. 아마 이때부터 제 미각이 형성된 것 같아요.”
광고기획사 사장님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 셰프가 된 시발점이 된 거군요.
“그즈음 제가 요리를 즐겨했어요. 해외 출장을 다녀온 뒤 이탈리아 요리의 매력에 빠져 압구정동에 있는 이탈리아 요리 학원에 등록을 했어요. 강습을 받으러 낮 시간에 회사일 제쳐두고 다녔는데 16명 수강생 중 저만 청일점이었지요. 너무 재미있어서 초급부터 고급반까지 다 수강했는데도 2% 부족한 느낌이 들고 열정이 식지 않는 겁니다. 마스터 과정까지 듣고 나서 강사가 공부했다는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Italian Culinary Institute for Foreigners)를 전해 듣고 집에 오자마자 검색을 했어요.”
잘나가던 사장님이 돌연 요리학교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계기가 궁금합니다.
“굵직굵직한 광고를 주로 제작해 왔고 스스로 ‘능력 있다’고 자부하며 신바람 나게 광고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꺾이는 순간이 오는 건지 남들이 만들어 오는 기획안에 훈수를 두고 ‘이것밖에 못하나’ 생각했던 제가 어느 때부터인가 저보다 능력 있는 후배들 기획안, 시안이 눈에 띄더라고요. ‘어? 이거 잘했네?’ 싶은 생각과 함께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더군요. 그리고 디지털 시대로 급변하면서 이동통신 회사 광고가 물밀 듯 밀려들어 왔었죠. 뭐 팅끼리 데이터를 주고받는다는데 광고를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만둬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때 ‘하고 싶은 것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늦깎이 요리 유학을 떠나서 고생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논현동에 있는 ICIF 예비학교에서 3개월간 이탈리아어와 요리 실습을 미리 배운 뒤 이탈리아로 가서 6개월간 교육을 받는 과정이에요. 석 달간 배운 이탈리아어가 전부인데 그 기간에 주방에 관련된 이탈리아어를 A4 용지로 빽빽하게 대여섯 장을 무작정 외웠어요. 당근, 냉장고, 가스레인지 같은 단어들과 조리 용어까지 몽땅 말이죠. 그런데 저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단어가 잘 외워지더라고요. 절박하니까 스펀지처럼 머리에서 쏙쏙 받아들인 것 같아요. 실제 주방에서 실습할 때는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지요. 이탈리아인들이 한국인과 비슷하게 다혈질이잖아요. 소리도 잘 지르고요.” 레스토랑에서의 실습 경험이 큰 자산이 됐겠네요.
“제 인생에서 첫 주방의 경험은 키야바리라는 작은 어촌 마을의 식당에서였습니다. 월미도에 있는 횟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해산물이 풍부한 시칠리아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너무 멀다고 거절당하고 이곳으로 갔죠. 하지만 이곳에서 식당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주방 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웠죠. 한번은 30명 넘는 단체 손님이 왔는데 애피타이저와 디저트가 바뀌어 나가는 큰 실수도 했어요. 그러고 나선 수석 주방장이 길길이 날뛰며 욕을 해대는데 이탈리아 욕을 제가 제대로 알아듣겠어요? 차라리 뜻을 모르니 마음은 조금 편하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뒤끝은 없어요.”
인생 2막은 으리으리한 2층짜리 갈비집이 아니다
화가 나면 셰프의 프라이팬이 날아다닌다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주방의 첫 경험은 그럼에도 강 셰프에게 ‘요리’라는 열정 세포에 불을 지피게 해준 곳이다. 그야말로 신출내기이므로 그저 열심히 하는 모습밖에 보여줄 게 없었다는 그는 선배 요리사가 요리를 마치면 잽싸게 키친 테이블을 완벽하게 청소하고 하나라도 배우려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중년의 나이에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모습에 감명 받았는지 나중에는 주방장의 레시피를 모두 보여주며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고. 이 같은 초심이 지금껏 그가 운영하는 작은 레스토랑에 꾸준히 손님들을 끌어 모으며 ‘조용한 맛집’이 된 이유일 터. 이탈리아 요리 유학을 마친 뒤 그는 번듯한 강남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사장이 되는 대신 또다시 레스토랑 막내자리로 들어간다.
한국에 돌아와 바로 레스토랑을 열지 않은 건 의외인데요.
“처음부터 제 다짐은 이왕 하는 거 ‘대충 말고 제대로 하자’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넉 달간 주방을 경험했지만 서울은 또 다를 테니까 역시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으려 했지만 문제는 제 나이였지요. 요즘 셰프들이 다 젊으니 저 같은 중년 아저씨를 막내로 부리기가 부담스럽고 싫겠죠. 간신히 들어가도 한 달 뒤엔 나가라고도 했고요. 그래도 세 군데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어요. 그렇게 일 년간 경험을 쌓으며 레스토랑 운영에 대해 전반적으로 배울 수 있었지요. 또 주방에서 월급 받으며 일하는 직원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고요.”
오너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들이 많이 늘고 있어요.
“수년 전부터 일본에서 오너 셰프 레스토랑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임대료, 직원 월급 등의 고정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음식 맛 등의 퀄리티로 승부를 보는 거죠. 장사가 잘 되다가도 몇 달 손님이 줄면 자영업은 바로 타격을 입어 재기가 힘들어요. 최근 중년 남성분이 혼자 오셔서 이 동네 상권에 대해 물어보시면서 ‘짬뽕 파스타’ 메뉴에 대해 어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도 딱 보면 시장조사 나온 거 알거든요. 그런데 정말 말리고 싶어요. 레스토랑 운영이 정말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럼 한창 광고기획자로 일하시던 때에 비해 벌이는 만족하시나요.
“제가 생각하기엔 인생 2막은 2층짜리 대형 갈비집이 아니에요. 은퇴하고 나서도 젊었을 적 한창 잘나가던 때를 꿈꾸는데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젊었을 때야 힘들어도 몸으로 부딪치고 통장에 돈 쌓이는 맛에 일했지만 늙어서는 적게 벌더라도 자기만족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오래 일할 수 있더라고요. 벌이는 한창 벌던 때에서 숫자 ‘0’을 하나 빼야죠. (웃음) 그런데 이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적게 벌더라도 마음 편하고 즐겁게 일한다 생각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힘들어요.” 파스타 면발을 매일 직접 뽑으신다고요.
“생면을 만들어 파스타를 만드는 것도 저만의 레스토랑 차별화라고 생각해요. 서울에 파스타 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금 소박하고 유행에 뒤처지더라도 음식이 맛있고 서비스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면 그 식당 주인의 진심은 결국 손님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마련이더라고요. 제가 파는 음식들도 지나치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 강한 맛을 내기보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메뉴를 위주로 선보이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단골 고객들은 이런 담백하고 건강한 맛을 좋아하는 30, 40대 이후 손님들이 많죠. 며칠 전 여자 손님이 파스타를 맛보시고 ‘행복하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그럴 때 기쁨과 희열은 말로 다 표현 못하죠.”
그럴 때 행복하겠군요.
“솔직히 장사가 잘될 때 제일 행복합니다. (웃음) 회사 다닐 때는 어떤 혜택을 받는지 모르다가 나오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음식점 차리면 공사, 주차 문제, 소음, 음식 냄새로 인한 민원까지 모두 저 혼자 해결해야 합니다. 은퇴 이후 창업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래도 조물조물 음식 만들며 밤을 새우는 일이 힘들지 않고 즐거우니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언젠가는 서울을 떠나 바닷가에 파스타 집을 차리고 싶어요.”
기획 박진영 기자│글 이지혜 객원기자│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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