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석 교수 & 이윤경 기자의 ‘식탐’

칼국수는 한때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하는 귀한 음식이었다.

밀가루 값이 매우 비싸던 고려시대 얘기다. 한국전쟁 이후엔 밀가루 보급이 늘면서 삼시 세끼를 국수로 때우는 사람이 많았다. 칼국수 하면 사골 양지나 멸치 육수가 대표적이지만, 간장이나 달달한 오미자 국물에 면을 말아 먹던 때도 있었다. 칼국수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도 위상도 다양하게 변해왔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FOOD&STORY] 수더분해서 더 매력적인 칼국수
솔직히 말해 예종석 교수가 3월호 맛집으로 제안한 한성칼국수를 미리 찾아보다 멈칫했다. 허름한 간판, 게다가 건물 지하에 있는 음식점이라니. 그러나 한성칼국수를 바로 보려면 이런 선입견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그저 오래된 국숫집이라고 하기엔 그 내공이 만만하지 않았다. 한성칼국수는 자매인 정재선·정재실 할머니(언니인 정재선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다)가 33년 전 서울 강남 도산사거리에 문을 연 한식당이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인텔리였던 자매는 의사 부친을 따라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곳의 맛들을 기억해 1983년 한성칼국수의 문을 열었다.

1980년대만 해도 강남은 허허벌판이었는데, 자매의 칼국수 맛은 입소문이 나서 개업 초기부터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그렇게 30년째 한결 같은 할머니의 정갈한 손맛이 그리워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곳 문턱을 넘나드는 단골손님들이 적지 않다. 예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개업 당시부터 한성칼국수를 찾았다. 사골 양지를 오랫동안 끓여 깊은 맛이 나는 육수와 쫄깃한 칼국수 면발의 조화로움에 빠져들었다. 초창기 한 그릇에 2000~3000원이었던 칼국수는 지금 70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이곳에서 칼국수와 쌍벽을 이룰 만큼 유명한 것이 돼지고기 제육이다. 소고기 수육도 있지만 제육이 더 부드럽고 촉촉하다고 예 교수가 귀띔했다. 그 외에도 빈대떡, 만둣국, 모둠전, 낙지 데침 등도 정갈하고 맛있어 그는 거의 모든 메뉴를 주문해 술 안주로 즐긴다고 한다. 한성칼국수에 오는 손님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국무총리를 지낸 정계 인사부터 재계 회장들, 동료 교수들이 자주 찾는다. 모처럼 고향집에 온 듯 편안해 보인 예 교수는 “칼국수는 할 얘기가 무진장 많은 음식”이라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밀가루’ 위상에 따라 귀한 음식에서 대중 음식으로
예 교수 이 기자, 칼국수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이 기자 글쎄요.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칼로 썰어’ 만든 국수라서 칼국수 아닐까요.

예 교수 보통은 된장찌개나 불고기, 김치찌개처럼 음식 이름에는 재료가 들어가는데, 칼국수는 조리도구 이름이 붙었다는 게 재밌지요. 신선로(神仙爐)도 마찬가지의 사례고요.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름에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냄새를 풍기죠.

이 기자 그런 이유로 칼국수는 오래전부터 절면(切麵)이라고 불렸군요.

예 교수 맞아요. 국수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밀가루 반죽을 치고 잡아당겨 길게 한 줄로 뽑아내는 ‘납면’과 바가지 같은 도구에 구멍을 뚫어 반죽을 밀어내서 만드는 ‘압착면’, 반죽을 면봉으로 얇게 민 뒤 겹겹이 접어서 칼로 썰어내는 ‘절면’이 있어요. 중국식 ‘납면’은 우리 역사에서 보이지 않고, ‘압착면’은 기계화돼 국수틀로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절면은 ‘손칼국수’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 원형이 유지되고 있지.

이 기자 칼국수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지요. 그 유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예 교수 칼국수에 관한 기록은 조선 중기의 요리서 ‘음식디미방’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때는 밀가루가 귀하고 비싸서 메밀칼국수를 주로 해먹었답니다. 주재료로 메밀가루를 쓰고 연결제로 밀가루를 섞은 것이죠. 옛날에 귀한 대접을 받던 밀가루는 이제 서민의 음식 재료가 됐고, 빈민들의 구황식품이던 메밀은 지금 건강기호식품 행세를 하고 있어요.

이 기자 그야말로 상황 역전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칼국수가 ‘국민 분식’이 됐나요.

예 교수 한국전쟁 이후 국내에 미국의 원조물자인 밀가루가 많이 보급됐지요. 쌀이 워낙 부족하던 시절이다 보니 제3공화국 당시 정부에서는 밀가루 소비 촉진을 위해 ‘분식장려운동’을 실시했다고. 사람들이 밀가루로 이 요리도 해보고 저 요리도 만들어 먹고 한 거지. 어쩔 수 없이 많이 먹게 된 감이 있지만. (웃음) 그 바람에 다양한 종류의 칼국수가 개발되기도 했죠. 나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면 요리를 엄청 먹었어요. 칼국수를 옛날에 사람들은 ‘칼제비’라고 했었답니다. 이게 ‘수제비’에 대치되는 의미거든. 수제비는 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는 것, 칼제비는 칼로 썰어 넣는 것의 차이예요. 국수는 마는 방법에 따라 ‘건진국수’와 ‘제물국수’로 나뉘는데, 삶은 면을 건져 국물에 따로 말아 먹는 것이 건진국수요, 국수 삶은 물에 같이 면을 넣어 먹는 방식이 제물국수예요. 제물국수는 면발 표면에 묻은 밀가루 때문에 국물이 탁해져. 그래서 서민들이 주로 먹는 음식이었고, 안동 양반가에서는 말간 육수의 건진국수를 상에 올렸죠.

이 기자 집에서 만들어 먹던 칼국수가 외식 메뉴가 돼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서울 시내에 유명 칼국수 집들이 자리를 잡았다고요.

예 교수 성북동의 삼선교 국시집이 원조 칼국수 맛집이라 할 수 있죠.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국숫집을 많이 차렸어요. 손국수, 명륜손칼국수, 혜화칼국수 등이 그때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어요. 1990년대 후반에는 안동국시를 콘셉트로 잡은 소호정이 유명세를 탔어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칼국수를 정말 좋아했는데, 청와대로 유명인사를 초청했을 때도 칼국수를 대접해 말이 많았죠. 그 이후 명동칼국수와 삼청동칼국수 등 지역명을 딴 명물 칼국수 집이 우후죽순 생겼지. 이곳 한성칼국수에도 정재계 손님들이 와글와글했고요. 요즘에도 새로운 집들이 많이 문을 여는데, 나는 옛날 그 맛이 통 안 느껴져요. 이 기자는 어떤 칼국수를 좋아하나요.
한성칼국수의 ‘얼굴’인 칼국수. 호박나물만 고명으로 올라가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한성칼국수의 ‘얼굴’인 칼국수. 호박나물만 고명으로 올라가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이 기자 저는 해물을 좋아하는데, 바지락, 모시조개 등으로 육수를 내 국물이 시원한 칼국수를 즐기는 편입니다. 안동국시에 깻잎이나 부추김치 등을 얹어서 먹는 맛도 일품이잖아요. 교수님께서는 어떤 칼국수를 좋아하십니까.

예 교수 나는 모든 면요리에 있어 면의 탱글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면발이) 하늘하늘한 칼국수를 즐기고 어떤 이는 아주 설익은 면을 좋아하지. 나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인데, 파스타로 따지면 ‘알덴테(al dente)’ 즉, 면의 한가운데는 약간 익지 않은 듯 쫄깃한 면발을 즐기는 편이에요. 칼국수에 손수 빚은 만두를 넣어서 먹으면 고기소가 우러나와 진한 국물 맛이 나요. 칼국수와 곁들이는 김치도 맛있어야 해. 한성칼국수의 김치 맛은 33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요. 딱 적당하게 익어 담백한 칼국수와 정말 잘 어울려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빈대떡’ 궁중에선 참새 지짐이도 먹어
예 교수 한성칼국수는 빈대떡이나 모둠전으로도 유명해요. 나도 주변에 주당들과 함께 많이 와서 먹었지요.(웃음)

이 기자 저도 전이나 지짐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빈대떡은 왠지 이름 때문에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의 정동 지역에 빈대가 많아 빈대골로 불렸는데, 그곳 사람들 중에 부침개 장사가 많아 빈대떡이 됐다는 풍설이 있더군요.

예 교수 그러게, 혐오 해충을 왜 음식 이름에 붙였는지. 빈대떡은 원래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기름에 지진 고기를 고배(음식 그릇에 높이 괴어 담음)할 때 받침으로 쓰였는데, 그 이름이 가난한 사람들의 떡이라는 의미의 ‘빈자떡’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어요. 조선시대엔 흉년이 들면 유랑민들이 남대문으로 수없이 모여들었는데 세도가에서 빈자떡을 만들어 소달구지에 싣고 가서 그 사람들에게 던져줬다고 해요. 요즘은 녹두 100%로 만든 빈대떡은 너무 비싸니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의 떡’이라 할 수 없지요.

이 기자 ‘빈대떡 신사’는 빈대떡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노래죠. 그 당시 비오는 날이면 도심의 빈대떡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하더군요.

예 교수 노래 가사에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붙여 먹지.’ 요즘엔 국산 녹두가 너무 비싸 붙여 먹는 것도 쉽지 않아요. (웃음)

이 기자 모둠전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요. 호박전, 새우전, 굴전 등 보기만 해도 푸짐합니다. 이렇게 차례상이나 잔칫상에 빠질 수 없는 전 역시 대표적인 궁중 음식이지요.

예 교수 맞아요. ‘전유어(혹은 전유화)’라고 조선시대 궁중 기록에 나옵니다. 민간에서는 ‘전’이나 ‘지짐’이라고 불렀어요. 조선 말기에 편찬된 조리서 ‘시의전서’를 보면 ‘참새 지짐이’도 있었다고. ‘소고기는 얇게 저미고, 양은 퇴하고(뜨거운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내 털을 뽑는 것) 삶은 뒤 얇게 저민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양이 참새를 말해요. 아주 별난 전이지. 그 맛이 어땠을지 궁금해요.

이 기자 우리 선조들도 ‘안 먹는 것 없이 다 먹는다’는 중국 사람들 식문화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성칼국수 별미 칼국수·모둠전·제육 맛보니
[FOOD&STORY] 수더분해서 더 매력적인 칼국수
예 교수 33년째 변함없는 칼국수 맛이 신기할 정도다. 묵직한 양지 육수와 쫄깃한 면발의 식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김치도 익은 정도가 항시 일정하다. 제육은 이 집만의 삶는 비법이 있어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부들부들하다. 비계와 살코기 비율이 적당해 특제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소주 안주로 그만이다. 제철일 때 생굴과 낙지 데침을 맛보길 권한다. 요리들을 먼저 먹고 칼국수는 식사로 반 그릇이면 충분하다.

이 기자 칼국수의 비주얼을 보고 실망하지 마시라. 처음에는 칼국수 고명이 고작 호박나물이라는 데서 놀랐다. 그 심플함은 이 집 칼국수의 핵심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칼국수는 첫맛은 심심하지만 다 먹어갈 때쯤이면 중독성 있는 국물맛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밍밍한 평양냉면맛에 눈 뜨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모둠전도 알차다. 씨가 굵은 서해산 굴 서너 개를 부친 굴전과 적당한 두께로 썰어 부친 호박전, 두툼한 새우살이 씹히는 새우전 또한 별미다. 간간해서 굳이 간장에 찍지 않아도 맛있다.
[FOOD&STORY] 수더분해서 더 매력적인 칼국수
[FOOD&STORY] 수더분해서 더 매력적인 칼국수
[FOOD&STORY] 수더분해서 더 매력적인 칼국수
예종석 교수는…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이자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풍부한 음식 경험과 탁월한 미각을 소유한 음식문화평론가.

이윤경 기자는…
한경 머니 기자.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찾아나서는 맛 탐험가. 레스토랑과 푸드 기사를 쓰는 칼럼니스트.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 촬영 협조 한성칼국수(02-544-0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