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19일 진웅섭 금감원장의 취임식 모습.
2014년 11월19일 진웅섭 금감원장의 취임식 모습.
금융가에서 금융검찰, 금피아(금감원+마피아)로 불리는 금융감독원의 위세는 실로 대단하다. 지난해에 있었던 한 금감원 임원 자녀 결혼식에서 축의금 행렬이 20m를 넘어섰다고 해 구설에 올랐을 정도로 피감기관인 금융사들에는 ‘갑(甲)’ 중에 ‘갑(甲)’으로 통한다.

금감원은 정부 부처가 아니며 민간인으로 구성된 특수 조직이다. 다만 금융사를 검사, 감독하는 업무 특성상 공무원으로 인식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조직이다. 하는 일은 공무 성격이 짙지만 연봉 수준은 민간 기업이 부럽지 않다고 해 ‘신의 직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올해 신입직원 49명 중 18명(41%)이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 전문 자격증 소지자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해 11월 KB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전임 최수현 원장이 1년 8개월 만에 물러난 이후 그 바통을 이어받은 진웅섭 원장은 일단 시장에 유화 제스처를 펴고 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의미의 유능제강(柔能制剛)을 신년 키워드로 제시하는가 하면, 시장과의 소통을 강조하면서 외관상으론 평온하면서 물밑에서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는 ‘백조의 호수’를 금감원의 업무에 비유해 눈길을 끌었다.

진웅섭 체제의 출발은 여러모로 과거와는 다르다. 우선 임원진부터 젊어졌다. 앞서 행정고시 25회 출신의 최수현(59) 전 원장, 최종구(57) 전 수석부원장 등 50대 후반의 임원에서 진웅섭(55) 원장(행시 28회), 서태종(50) 수석부원장(행시 29회)으로 바뀌며 역대 최연소 금감원장에 더해 50대 초반의 수석부원장으로 투톱체제를 갖췄다.

국내 최고 금융 엘리트 조직인 금감원의 학벌 파괴도 화제다. 진 원장은 포항 동지상고를 중퇴한 후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건국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7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기획과 경영지원, 업무총괄, 보험 등을 총괄하는 금감원 ‘넘버 2’ 서태종 수석부원장은 광주대동고와 전남대 경제학과를, 은행·비은행 담당인 박세춘(56) 부원장은 중앙상고와 영남대 경영학과를, 금융투자 담당인 이동엽(55) 부원장은 서대전고와 충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진 원장 아래로 영·호남과 충청 지역 출신의 부원장 3명이 대들보처럼 조직을 떠받치는 형상이다.

또 과거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와 기획재정부 출신들이 주름 잡았던 금감원 임원 조직에서 비주류로 분류된 인사들이 대약진을 하며 조직의 주도권을 휘어잡은 것도 이채롭다. 1990년대 후반 금감원이 통합 설립된 이후 원장과 부원장 중 SKY 출신이 한 명도 포진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초대 이헌재 원장을 비롯해 이정재(4대), 윤증현(5대), 김종창(7대), 권혁세(8대), 최수현(9대) 등이 모두 서울대 법학과 또는 상대 출신이었으며, 이용근(2대), 이근영(3대), 김용덕(6대) 등이 고려대 출신이었다.

금감원 수장의 업무 스타일도 확실히 갈린다. 전임 최수현 원장이 현장을 강조하며 취임 초부터 ‘밖으로’를 외쳤던 것과는 달리 임원회의를 제외한 다른 일정을 일절 잡지 않은 채 직원 소통을 강조하는 ‘안으로’ 전략을 펴는 모습은 기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최수현 전 원장의 취임 일갈은 새 정부의 국정 과제에 대한 차질 없는 이행과 금융시장 안정이었다. 이 때문에 전국의 산업단지와 전통시장 등 서민 밀집 지역을 돌며 ‘중소기업’과 ‘서민’이라는 국정 과제 키워드에 대한 후방 지원을 자처했다. 하지만 진 원장의 취임 첫 마디는 ‘신뢰 회복’이었다. KB사태 등 지난 한 해 시끄러웠던 금융사고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감독 당국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을 어떻게든 회복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시장에 준다는 ‘자율’…진실일까?
업계에 던지는 메시지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최 전 원장이 취임 직후인 2013년 5월 주요 권역별 금융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를 진행하며 첫 만남을 금융투자업계와 가진 것은 금융 분야 중 가장 큰 시장 침체를 겪고 있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 사실 최 전 원장의 경우 금투업계, 보험, 은행 등을 만나며 규제 개혁을 약속하는 등 감독기관 수장을 넘어선 다소 월권적인 모습을 보여 ‘시장에 신제윤(금융위원장)은 안 보이고 최수현만 보인다’는 비아냥까지 듣기도 했다.

진 원장의 첫 업계 회동은 외국계 금융사였다. 지난해 12월 11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만난 외국계 금융사의 CEO들은 국내의 차별 규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으며, 진 원장은 “검토해보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말을 아꼈다.

그의 금융시장에 대한 메시지는 간결했다. “금융회사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고 촉진하는 것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시장과의 소통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진 원장은 지난해 12월 29일 기자단과의 송년회에서 “금융회사 경영진과의 정례적인 면담을 추진해 상호 신뢰하는 관행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며 어렵게 운을 뗐다. 이어 그는 향후 검사 방향과 관련해 “가볍고 반복적인 위규 사항은 금융회사 스스로 바로 잡도록 하고 금감원은 위법하고 부당한 중대 취약 부문에 검사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시장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조금 기다리며 격려해 달라”고 시장에 당부하기도 했다.

시장은 금감원의 변화에 낯설어하면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금감원 수장이 바뀔 때마다 시장의 자율을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소소한 부분까지 간섭하며 시장의 검찰 역할을 자임해 왔던 전례 때문이다. 정중동의 조용한 개혁을 준비하고 있는 금감원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금융감독 밥그릇 싸움터? 우여곡절 겪은 금감원 역사
[IN FOUCS] 수장 바뀐 금감원 ‘갑(甲)’ 버리고 ‘자율’ 줄까?
1800여 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 금융감독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직후인 1950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부 수립 2년 뒤인 1950년에는 금융기관이라고 해봐야 은행이 유일했으며, 당연히 한국은행이 통화·신용·외환정책은 물론 은행에 대한 감독과 검사·제재 권한 등을 모두 가졌다.

당시 한은 직원들의 자부심과 위세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일명 마담뚜들이 한은 문턱을 쉴 새 없이 넘나들며 수첩에 빼곡히 이름을 적어 가 변호사, 의사 못지않게 한은 직원들을 1등 신랑감으로 대우했던 시기도 이때다.

1962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은의 권한은 대거 재무부(현 기획재정부)로 넘어간다. 강력한 정부 주도의 성장 전략 추진이 필요했던 당시 정부는 외환정책을 재무부로 이관하고,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 감독기구들은 모두 재무부 산하로 편재했다. 지금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재무부 출신의 모피아들이 이때 뿌리를 내렸다.

영원할 것 같았던 재무관료 신화가 상처를 받은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였다. 당시 재정경제원은 외환위기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독립적인 기구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한은의 은행감독원, 재정경제원의 증권, 보험, 기금에 대한 감독권은 공적 민간기구인 금융감독원에 합쳐졌고, 상위 기관으로 10명 안팎의 정부조직인 금융감독위원회가 꾸려졌다.

금감위와 금감원의 수장은 한 사람이 겸임하도록 했으나 정부 조직과 민간기구 간에 금융 감독 권한과 업무 영역을 둘러싼 갈등은 상당했다. 이 때문에 수차례 두 조직을 합치자는 논의가 나왔으나 반관반민 성격의 금감원 직원들이 공무원 신분으로 바뀔 경우 보수가 대폭 줄어들 것을 우려해 조직 합병에 난색을 표명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 조직인 금감위가 기획재정부의 금융정책 기능과 금감원의 감독·집행 권한 일부를 가져와 금융위원회로 확대되며, 직원 수도 150~16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정부 조직의 팽창은 관치금융 논란으로 이어졌으며, 금융위와 금감원의 불편한 동거는 불안불안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금융감독체계 개편 논의가 선거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됐고, 금융소비자보호기구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은 금융위와 금감원, 정부와 야당 등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아직까지 일보의 진척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