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 번역가 겸 작가
올해로 86세의 현역 번역가 김욱 선생은 벼랑 끝으로 떠밀린 삶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로 일흔 가까운 나이에 번역가가 됐다. 10년 남짓의 기간 동안 200여 권이 넘는 책을 번역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내 작가라는 직함을 더했다.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 9회 말 2아웃의 상황에서도 역전의 인생을 다시 쓴 김욱 작가를 만났다. 은퇴하기 전까지 대략 30년을 일한다고 했을 때 은퇴 후 30년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 이 시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냐는 물음에 당당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은퇴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자신이 즐거운 일을 찾아 하라고 조언한다. 남들은 뒷방에 앉아 지나간 세월이나 되새길 법한 나이에 번역이라는 새로운 길을 시작한 김욱 작가는 누구나 다 하는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린 것이다. 김 작가를 인터뷰하면서 기자 또한 이 말만은 내뱉지 않으려 각별히 노력했으니 바로 ‘그 연세에…’다.외람되지만 곧 아흔을 바라보고 있으나 20대보다 열정적이고 재미있는 삶을 사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자 또한 언젠가 몸속에 냉동됐던 ‘열정’ 세포가 되살아난 듯했다.
묘막 살이에서 잘나가는 번역가가 되기까지
현역 번역가 겸 작가인 김욱 선생은 스물여덟 살 때 동화통신을 시작으로 30년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 1980년대 중반 정년퇴직 후 한국생산성본부의 월간지 편집위원으로 10년을 더 일했다. 일흔을 목전에 두고 어린 시절 꿈꿔온 문학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경기도 화성에 평생 모은 돈을 투자해 전원주택을 지어 그간 꿈꿔온 ‘글 좀 끄적이는’ 자연인으로 살 요량이었다. 당시 겁도 없이 집까지 담보로 투자했던 것이 외환위기가 터진 여파로 경매로 집을 날리고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
그러나 김 작가는 일흔에 들이닥친 몰락을 딛고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가 되고 노년에 맞이한 격렬한 성장통의 과정을 담아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책에서 국가와 민족, 사회의 틀 안에 정해졌던 사회적 운명은 끝났으니 이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운명을 살겠다며 ‘신노인 운명론’을 이야기했다.
“이 나이 먹고도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 천지고, 신기한 것투성이며,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라는 것이 인생 대선배의 전언이다.
10여 년간 200여 권을 번역하고 저술하신 에세이 책이 8권을 넘는데 젊은 사람들에게도 벅찬 작업량입니다
“주변에서들 그럽니다. ‘김형, 언제까지 지금처럼 살 거요? 이제 그만 쉬어요. 한국에서 그렇게 혼자 설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저는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없을 때까지, 그때까지 나는 갑니다’라고. 은퇴하고 나이 들어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가끔 동남아 해외여행이나 다니는 게 꿈인 사람들도 많은데 참 딱합니다. 나야 늙어서도 먹고 살 만큼 벌어둔 것이 없어서 이 일을 시작했지만 내가 좋아서 재미난 인생을 살고 있으니 힘이 솟아요. 가고 싶은 길을 걷고 있으니 그게 내 자랑입니다.”
은퇴를 하신 뒤 번역 일을 시작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IMF 외환위기 때 전 재산을 투자한 것이 망해서 경매로 집을 팔고, 수중에 남은 돈이 300만 원이었어요. 수소문 끝에 묘막 살이를 시작했어요. 남의 집 조상 묘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농가주택에 공짜로 살게 해준다기에 바로 들어가 살았어요. 나이 일흔에 결국 시제를 세 번 차려주고 나왔어요. 문중 사람들이 몰려와 나이가 많아 더는 못 맡기겠다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3년 만에 묘막 살이를 정리하고 생활 정보지를 뒤져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18만 원짜리 빌라를 찾아 계약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날이 지금까지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어요. 아내랑 이삿짐을 싸고 새벽에 묘막집을 떠나는데 어릴 때 못 느꼈던 희열, 감동이 밀려왔어요. 이제 새 인생을 살자 마음먹었어요. 매달 월세를 내야 하니 내가 직접 벌어보자. 그래서 시작한 게 번역 일이었어요.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일본 문학이며 일본어로 번역된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책을 끼고 다니며 너덜해질 때까지 읽었거든요.”
갑자기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서 녹록지 않았을 텐데, 번역 일이 쉽게 주어졌나요.
“나 같은 노인네를 얼씨구나 하고 불러주는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습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할 줄 아니 번역을 할 수 있고 30년 넘게 기자로 글밥을 먹어왔으니 남보다는 글 한 자는 더 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나간 겁니다. 일면식조차 없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사장 바꾸라고 한 뒤 내가 이런 사람이며, 이런 책을 아는데 같이 일해보자고 덤벼든 거죠. 물론 꾀를 내었어요. 어떻게 해야 출판사들이 나를 찾아오게 만들어야 하는지. 빠릿빠릿한 청춘들에, 한 해에만 수천 명의 일어일문학과 졸업생에다 능력 있는 번역가들을 제치려면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들 작품은 못 합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좋아했던 일본 작가 작품을 검색했습니다. 예상 외로 일본에서 손꼽히는 거장의 주옥같은 옛 작품 중 대다수가 국내에서 출판되지 않았고 사후 50년이 넘어 비싼 저작권이 소멸된 작가도 많아 이 틈새를 노렸지요. 출판사에서는 책 만드는 돈도 많이 안 드는 데다 내가 어릴 적부터 닳도록 읽어 번역이 낯설지 않았지요.”
당시 하루에 몇 시간이나 번역 일을 하셨는지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새벽이 올 때까지 술 마시며 낭비한 젊은 날이 아까워 새벽형 인간이 되기로 작심했어요. 새벽 4시에 눈을 떠 낮 12시까지는 무조건 책상에 붙어 앉아 있었죠. 1시간에 원고지 10장에서 20장까지 번역이 가능했어요. 법정 근로 시간인 8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해서 하루 70매, 1달이면 원고지 2000매. 처음 일 시작했을 때 원고지 1매당 1500원을 받아서 일만 끊이지 않으면 나이 칠십에 내 손으로 1달에 300만 원은벌겠더라고요. 지금은 2배가 넘었으니 내 몸 값이 그 사이 2배로 뛴 거죠. 그러는 사이 힘들어 죽겠다고 타박하는 엉덩이를 달래는 게 가장 힘들었지요. 지금도 젊은 편집자들은 내가 쓴 원고처럼 깨끗한 글은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혀를 내둘러요. 내가 오탈자 하나 안 내기로 유명하다고. 엉덩이는 무겁게, 손은 재빠르게, 이게 내 신조입니다. 규칙이지요.”
열정이 대단하신데, 자택 근처의 대학 도서관을 다니신다고요.
“강원도 원주에 사는데 대학교 세 개가 붙어 있어요. 내가 이 세 학교 도서관 출입증이 다 있어요. 번역하거나 펴낸 책을 도서관에 기증했더니 내 직업을 인정해준 학교 측에서 도서 대출까지 허용해주었어요. 젊은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번역도 하고 책도 찾아 읽고 하면 나이를 잊게 됩니다. 젊은 친구들도 나한테 배우는 게 있지. 까딱하면 쓰러지게 생긴 노인네가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손때가 묻어 새까만 사전과 원서를 뒤적이고 있으니 신기하게 쳐다본다고요. 툭하면 커피 뽑으러 일어나고 스마트폰 들여다보고 이어폰 끼고 책 보는 자기들이랑 영 품새가 달라 보이거든요. 난 속으로 ‘내가 너희한테 질 수 없다’ 이런 맘으로 화장실 가는 것도 참는다고. 허허허”
배움과 도전에 두려움이 없으신 것 같아요. 쓰신 저서에서도 ‘뇌력’을 강조하셨는데요.
“나이 들면 눈도 멀고, 귀도 안 들리고 다 늙어도 뇌는 안 늙습니다. 나이가 들면 지력이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이건 악의적인 노인 폄훼나 마찬가지예요. 인류 역사상 최고 천재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은 자기 뇌의 20%를 사용했다고 하고 일반인은 기껏 2~3%를 쓴답니다. 평생 뇌를 어디다 썼나 하고 가만 생각해보면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니고, 돈 모아 집 사고, 사람들 눈치나 보며 사는 데 쓴 게 다란 말이죠. 나머지 97%를 최대한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운전면허증도 느지막이 따셨지요.
“예순다섯 나이에 운전면허증을 땄어요. 시험장에 가니 내가 나이가 제일 많으니 최종 주행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사람들이 박수까지 쳐줘서 머쓱했지요. 그때는 ‘딱 5년만 운전해보자. 그럼 성공이다’ 하는 심정으로 도전했는데 벌써 20년이 지난 거지. 내가 그때 운전면허를 안 따 놓았다면 피곤한 아들 녀석 눈치나 보며 오늘은 코에 바람이라도 쐬어주지 않나 하고 궁상떨고 있었을 거 아니에요. 도로에 나가면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를 부착한 차가 있는데 나는 그게 아니꼽더라고요. 나 같은 여든여섯 먹은 운전자도 있구먼. 그렇다고 내 차에 ‘노인네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는 안 붙일 생각입니다.(웃음)”
적추의 노년, 지금 가장 붉게 타오른다
실제 김 작가를 만나 무릎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미리 읽고 간 책 속의 힘 있고 위트 넘치는 문체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육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당신의 표현대로 ‘정신을 차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 번역을 시작하고 글을 쓰려고 노력한 선생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음대로 철없이 살다가 폭삭 망해 늘그막에 별 도리가 없어’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특유의 낙천성과 ‘한번 해보자, 죽을힘을 다해!’ 같은 결기와도 같은 밀어붙이는 성격 탓에 남들처럼 유유자적 월세 같은 고정된 수입으로 늘그막에 편하게 살아온 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붉은 가을’을 뜻하는 ‘적추(赤秋)’를 가장 좋아하는 일본어로 꼽았다. 청춘이 푸른 봄날이라면 노후를 새롭게 정의하는 이 ‘적추’라는 단어가 마치 현재의 자신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말을 잇는다. 지금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시기이고 행복하고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 그러면서 나이 듦은 낡아짐이 아니라 늙으면서 ‘진화’하는 과정이며 그래서 ‘노재(老才)’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당히 건강 체질로 보이십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다들 하는 말이 내 나이로 안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 전혀 건강 체질이 아니에요. 지금이야 끊었지만 열다섯부터 담배를 펴댔고 술은 아직도 좋아해서 거의 매일 먹지요. 그래도 병원 가면 의사가 놀래요. 신체나이가 60대라고. 내 생각에는 지금껏 일에 미쳐 살아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내가 샘이 많아서 누가 나보다 뭘 더 알면 그게 질투가 나고 욕심도 많아요. 늘 뭔가 배우고 싶고 궁금한 것도 많고 호기심 많으니 늙을 새가 없는 거 아닌가 합니다. 오전에 책상에 앉아 번역 일을 하고 동네 한 바퀴 걷기가 제 운동의 전부예요.”
결국 마음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소크라테스가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부자’라고 했습니다. 전 이 말에 아주 공감합니다. 돈 많다고 행복합니까? 재벌 회장님이 투신하고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죄다 우울증에 공황장애라고 하지 않습니까? 행복하려면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해요. 자기 안에서 만족을 찾아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부단히 내면을 훈련시켜야 가능한 일입니다.”
보통 나이 들면서 자신감이 사라지고 상실감도 큰데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초노인’이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볼장 다 본 노인네에게 새로운 도전 과제와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재미난 일을 찾아 나를 발전시키는 겁니다. 늙어서 돈 없어도 안 되고 아파도 안 된다고 아침, 저녁으로 전문가들이 매체에 나와서 협박들을 하죠. 초고령 사회라는 말이 또 얼마나 무시무시해요. 늙은이들이 손주 까까 사먹을 돈까지 뺏어다가 약값으로 탕진할까 봐 겁나는 시대이니 노인들을 사회악처럼 여기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초고령화 시대에 ‘초노인’이 되자고 합니다. 우리 모두 한 가지 자연 이치를 알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모두 늙어 노인이 된다는 것.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으니 지금껏 세월을 살아온 경험을 살려 무엇이든 하자. 무시당하지 않고 내 한 자리 당차게 지켜내자는 겁니다.”
나이 들어서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입니다. 나를 찾는 출판사 전화가 오는 건 내가 자신감 하나 갖고 도전해서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남들처럼 은퇴하고 손자손녀 돌보며 골프나 치러 다니자라는 세상이 정해 놓은 운명을 따라가지 않았으니 지금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죠. 내가 일흔에 전 재산을 잃고 협심증까지 왔었는데 지금은 글 쓰는 작가가 됐단 말이죠. 거꾸로 요즘 드는 생각이 내가 묘막 살이를 할 때 나보다 건강하고 가진 것 많던 문중 사람들은 그사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절 내 처지에 눈물 흘리던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당시에도 행복했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이 칠십에 실패했다면 성공하면 됩니다.”
이제 쉬실 만도 한데, 앞으로 어떻게 보내실지 무척 궁금합니다.
“아흔다섯까지는 일본어 번역가로 일할 겁니다. 그땐 조금(?) 늙었겠지요? 허허허. 그럼 그때는 몸 좀 쉬게 해줘야죠. 은퇴하고 나서는 중국어를 배워보려고요. 백열 살쯤 루쉰의 ‘광인일기’를 번역하는 게 목표입니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해낼 겁니다. 나는 그때가 너무 기다려집니다. 그때 가서 멋지게 책을 낸 다음 그간 잘 참아준 내 엉덩이와 두 손을 칭찬해줘야지요. 엉덩이는 무겁게, 손은 재빠르게!” 기획 박진영 기자│글 이지혜 객원기자│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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