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입지 않은 옷이라도 고이 간직해야 한다. 매번 트렌드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며 등장하지만, 불변의 진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절대 입을 수 없을 것 같던 옷이 평소 멀쩡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된다.
[PASSION OR FASHION] ‘쓸데없는’ 옷도 축제의 의미가 있다
누구나 한번쯤 품는 장기 여행의 꿈. 이론상 여행은 시간과 돈, 동기가 충족됐을 때 시작되는 법이다. 먼발치에 있을 듯한 이 꿈도 2년 전 30대 중반을 넘어서는 나의 현실이 됐다. 허나 언제나 현실은 시궁창이라 했던가. 생각보다 ‘찌질’했다. 말하자면 돈과의 전쟁이었다. 1달러 웃돈 주고 물건을 산 것에 게거품을 물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자체 가산금을 부가한 시장 식당에 경찰을 불러 상대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기존 단기 여행을 밥 먹듯 하던 여행 가방과 속살부터 판이했다. 과거의 여행 가방은 늘 텅텅 빈 상태였다. 널찍한 공간에 속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쇼핑 대기 상태라고 할까. 귀국할 때쯤 가방은 살이 찌다 못해 극도 비만 상태가 되곤 했다. 허나 이번 여행은 달랐다. 뭘 하나 사는 것이 고역이었다. 쇼핑이 여행의 꽃이라 생각했던 지난날과의 완벽한 안녕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배낭 속엔 누가 보기엔 ‘쓸데없는’ 옷이 몇 가지 있었다. 쓸데없는 옷, ‘평소에 입기 힘든’ 옷의 좀 격한 표현이다.


단 하나도 같을 수 없는 일명 ‘리미티드 에디션’의 유혹
그 주인공 중 정점을 찍는 것은 다홍색 롱 드레스다. 볼륨형 소매와 자수가 놓인 스퀘어 네크라인, 발목까지 덮는 플레어형 스커트의 조합이다. 멕시코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에서 구입한 아이템이다. 이곳은 해발 2200m 산중턱에 터를 닦은 도시로, 전통 복장을 한 마야 문명의 후예(원주민)와 21세기의 모던한 전 세계 여행자가 거리를 함께 걷는 요상한 기운이 있다. 이곳에서 나, 장기 여행자의 나름대로 줏대 있는 신념이 무너졌다. 없을 줄 알았던 지름신이 강림한 것이다. 이유는 오롯이 원주민의 손재주에 있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일명 ‘리미티드 에디션’이 이곳의 특기인 만큼 제아무리 같은 색의 직물이라 해도 단 하나도 같은 옷이 없다. 거리를 기웃거리다가 1980년대 재직 공장을 뜯어놓은 듯한 상점에 빨려 들어갔다. 낡은 재봉틀과 무규칙을 테마로 한 옷가지들. 심지어 ‘세일’이란 물러설 수 없는 유혹의 푯말이 있던 곳에서 이 드레스를 샀다. 무게는 1kg.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장기 배낭여행자의 가방에 들어 있을까 상상할 수 없는 옷이다. 그럼에도 이것엔 흑심이 있었다. “왜 이것을 샀니”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있는 것이다.


입을 수 없던 옷이 특별한 옷이 되는 순간
매년, 아니 이 순간조차 캣워크와 스트리트에서는 새로운 트렌드를 토해내고 있다. 흔히, 어떤 드라마가 떠서, 전 세계 트렌드를 주름잡는 디자이너 컬렉션을 통해서, 그 루트는 과거보다 확실히 다양해졌다. 그런데 패션계의 추이를 보니 재미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됐다. 매번 트렌드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며 등장하지만, 불변의 진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절대 입을 수 없을 것 같던 옷이 평소 멀쩡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된다는 점이다. 언더웨어인 내복이 레깅스로 돌변하면서 베이식 패션의 필수품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위협적인 스터드가 옷에, 신발에 미친 듯이 박힌 아이템이 멋스럽다고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도 몰랐다. 허나 지금 거리를 유쾌하게 활보 중이다.

나의 흑심은 이것이었다. 이미 옷은 그저 몸을 보호하고 가리는 실용적 개념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자기 브랜드의 표상이 됐다. 옷의 역할이 멀티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한 패션은 그날의 기분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는 치유의 의미로까지 풀이할 수 있다. 절대 입을 수 없는 옷은 늘 쳇바퀴인 일상의 어떤 일탈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매년 시상식 같은 행사를 볼 때의 우리를 떠올려보자. 평소 엄두가 안 나는 옷의 패션 행진 앞에서 우린 극도로 흥분한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은? 우린 그런 특별한 옷을 입으면 안 될까? 옷은 평등할진대 말이다.

‘쓸데없는’ 옷은 축제의 의미가 있다. 언젠가 특별한 날 입는 옷, 평소 옷장 속에 넣어두고 한번쯤 꺼내보기만 해도 괜히 기분 좋아지는 옷. 패션은 당신을 위한 선물이 돼야 한다. 게다가 또 누가 아는가. 세상은 빨리 변하고, 스타일은 제멋대로 바뀐다. 누군가 쓸데없다던 옷을 입고 거리를 화려하게 활보하게 될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른다. 이것이 당신이 절대 입을 수 없는 옷 하나쯤 구비해야 하는 이유다.


기획 양정원 기자│글 강미승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