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열네 번째 ‘난중일기’
누구나 아는 ‘난중일기’지만 그 깊이를 제대로 읽어내는 이가 몇이나 될까. 구체적인 날씨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까지 지극히 사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일기는, 그러나 전쟁 중 하루하루를 버티는 아주 구체적인 역사 속 인간의 기록이다. 전쟁(戰亂) 같은 하루하루를 온 마음을 바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메시지가 다시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4년 우리나라 국민 5000만 명 중 1700만 명이 한 편의 영화에 열광했다. 영화 ‘명량’이다. ‘명량해전’은 알려져 있다시피 이순신이 승리로 이끈 사상 유례가 없는 전투다. 겨우 13척으로 300여 척 이상의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배포나 투지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이겨야 하는 전쟁이었고, 지켜야 하는 가치였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명량해전이 있기 20여 일 전, 이순신은 ‘곽란(구토를 반복하는 병)으로 인사불성’이 됐으며, 보름 전에는 신하 ‘배설이 적이 많이 몰려올 것을 걱정해 도망’갔다. 또 열흘 전에는 북풍이 세게 불어 ‘추위가 엄습하니 격군들 걱정’에 마음 졸였으며, 일주일 전에는 ‘대장감이 못 되는 사람’이 임명돼 수군에 합류했다. 설상가상의 상태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조선 수군의 이름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전투는 치러졌고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았으며 심지어 명예까지 얻었다. 그간 이 일을 두고 ‘기적’이라 칭해왔지만 이는 다소 손쉬운 평가처럼 보인다.전시 전략의 결정적 묘수이자 마음에 대한 통치
‘난중일기’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명량해전’이 단지 기적이나 신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난중일기’는 임진년인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의 일과가 기록된 일기다. 책의 이름처럼 ‘난중(亂中)’의 ‘일기’다. 충무공의 사적인 내면을 그대로 전달하는 이야기라면 왜 이 전란 중에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날짜와 날씨, 전쟁 상황 및 업무의 간략한 일지, 마을과 피난민의 상황과 가족 친지에 대한 마음 등에 대한 언급은 언뜻 보면 일반적인 일기처럼 보이게도 하지만 전쟁 전후 기록되고 있는 날씨와 기온, 특히 바람의 세기와 방향 등에 대한 언급 등을 살펴보면 ‘정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짐작이 저절로 드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오후 3시경에 소나기가 크게 쏟아져 잠깐 사이에 물이 불었다’라는 정보는 ‘연해지역에서 비가 알맞게 왔다고 전했다’ 등의 정보와 연결되면서 바다의 기상 상황과 직결되고 있으며,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바람이 세게 불다가 그쳤다’ 등의 기록은 명량해전 즈음에 이르게 되면 ‘북풍이 세게 불었다’는 분명한 정보로 명료해진다. 알려져 있다시피, 사납게 불었던 ‘북풍’은 명량해전을 기적적으로 뒤집을 수 있었던 기상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사나운’, ‘바람’, ‘북풍’의 글자들은 장기판 위에 놓인 장기 알처럼 깨알 같은 정보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물결’이 잔잔한지 거센지, 산세와 지형까지 풍경화처럼 조감해 놓은 언급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힘 있게 결합될 경우에는 결정적인 묘수로 반짝인다.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기록, 엄격한 처벌도 눈에 띈다. 군 기물이 잘 간수되고 있는지 감독한 후 잘잘못을 가리고, 부대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혹여 하인들이 민가의 밥을 얻어먹었다면 매질로 다스렸다. 또 혹여 전시 중에 게으르거나 불성실하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이를 반드시 시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내면서 민심을 혼란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인심이 크게 안정’되도록 한다. 언뜻 보면 일상적인 군 기강 확립 정도로 보일 법한 일이지만, 실은 인심(人心)이라고 표현된 것처럼 ‘마음’들이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는지에 대한 맥을 짚는 행위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즉 마음들에 대한 관찰과 대처다.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바 ‘난중일기’의 표면에 놓인 이 자잘한 ‘전란’의 일상이 마음과 마음을 붙드는 언어의 매듭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마음의 결기 속에서 같이 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그 하나의 매듭이라는 사실도 짐작하게 된다. ‘종 태문(太文)과 종이(終伊)가 순천으로 갔다’, ‘종 윤복이 나타났다’ 등 하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도 그래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선 속에서 드러나는 구름의 이동과 바람의 세기, 비의 강도와 양뿐만 아니라 하인들의 말, 군관의 행실에 이르기까지 ‘난중일기’의 한 글자 한 글자에는 마음에 대한 통치가 드러나 있다.
‘불멸’ 이면의 인간적 고뇌와 고독
그러나 이조차 때로 흔들릴 때가 있어 보인다. 가족과 친지, 동료와 나라에 대한 마음들이 속살로 드러날 때다.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하리오’, ‘비가 내렸다.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등 그 마음들이 한없이 추락하고 흔들리고 있음을 주저 없이 고백한다. 또 아들이 아플 때에는 “아들 열이 곽란을 앓아 밤새도록 신음했는데 걱정하며 애태운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랴. 닭이 울어서야 조금 덜하여 잠이 들었다”며 밤새 뜬눈으로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런 마음은 아들 열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뒤 절정에 달한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충무공은 이렇듯 아주 과감하고 진솔하다.
아마도 짐작컨대 이런 마음들이 ‘북풍’처럼 휘몰아쳤을 것이며 그때마다 전쟁을 치러냈을 것이다. 오직 자기 마음만 의지해서 견뎌야 했던 전쟁이었다. 이 전투를 죽기 살기로 치러내면서 그는 순간순간 기꺼이 죽었고, 또 가까스로 살아나고 있는 듯 보인다. 충무공이 바로 전쟁을 견뎌내는 인간, ‘난중’에 홀로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다시 한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란 속에서 어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자식, 길 떠나는 자식이 혹여 몸이 고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비, 그럼에도 제 몸이 놓인 전장의 마음들을 다잡아야 하는 장군.
이순신은 그간 일본과 싸워 이긴 민족의 영웅이자 무신의 기개를 상징하는 인물로 신화화됐다. 그것도 모자라 1968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동상으로 기념되거나 성역화된 현충사로 그 이름이 드높여졌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모습에서 기억해야 할 인간적 고뇌와 고독, 그럼에도 이를 딛고 서려는 모습은 지워졌다. 우리가 이순신에게서 보아야 하는 것은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한 남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전쟁’을 어떻게 견뎌냈으며 버텨냈는지 그 결과로 전쟁이라는 큰 산맥을 넘을 수 있었는지 잊어 갔다. 그가 겨우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지만 온전히 보이는 게 있다. 요동치는 ‘마음’들과 아주 구체적인 ‘역사’가 그것이다.
그는 그 시대의 누군가처럼 불운했고 또 녹록지 않았다. 첫 번째 무과시험에서는 달리던 말이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 후 공직에 나아갔으나 파직됐으며, 승진하기도 했었으나 곧 강등됐다. 아니, 불운했고 부침이 많았다. 그것은 13척으로 전투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처지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이 그렇게 13척뿐으로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고 상상하면 지나칠까.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그런 하루하루를 버티는 아주 구체적인 역사 속 인간의 기록이다. 전쟁 같은 나날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의 기록, 우리는 그동안 이순신을 ‘불멸’의 이름으로만 너무 소비했다. 전쟁(戰亂) 같은 하루하루를 온 마음을 바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메시지가 다시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난중일기’가 비로소 제 빛깔을 내보이게 될 것이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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