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교육 플랜 통찰력 키우는 문·사·철

요즘 기업 2세 교육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인문학이다. 회사 주력 분야 관련 전문 지식 못잖게 역사와 문화, 예술 분야의 소양을 쌓으려는 2세 경영인들이 많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면서 사람을 아우르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오너 경영자에게 인간을 이해하고 지혜를 습득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해졌다.
[BIG STORY] 경영학보다 먼저 인문학 배우는 2세들
“사색하지 않고 검색하는 우리가 당면하게 될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기회가 인문학에 있습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2014년 4월 한 대학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강의를 해 주목을 받았다. 정 부회장의 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정 부회장에게 “경영을 잘 하려면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며 “그러려면 인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고 강조해 왔다. 정 부회장은 대학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했고, 그의 동생인 정유경 신세계그룹 부사장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대학에서 동양사학을 공부한 뒤 일본과 미국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배웠다. 평소 ‘논어’를 즐겨 읽고 인생과 경영의 지침서로 삼았던 할아버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밥상머리에서 자녀들에게 사람을 얻는 법, 더불어 살아가는 법, 겸손 등 ‘제왕학’을 손수 가르친 것도 유명한 일화다.
[BIG STORY] 경영학보다 먼저 인문학 배우는 2세들
재벌가에서는 일찍이 자녀들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업의 최종 결정을 내리는 리더에게는 보다 깊은 통찰력이 요구되는데, 그 힘이 역사, 철학, 예술 등 인문학에서 나온다는 것을 해외 기업의 사례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서양 명문가의 경우 창업 2~3세대까지는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4세대 이후로 내려가면서는 대주주로 권한을 행사하는 정도고, 개인적으로는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등 인문학과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직업을 삼기도 했다. 기업의 역사가 오랜 일본 역시 30~40년 전부터 마케팅 서적이 아닌 역사서로 2세 수업을 대신했다. 가문에서 대대손손 내려오는 ‘기술’을 전수하는 것 못지않게 ‘철학’을 심어주는 것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재벌가 외에 1960~1980년대 고도의 성장기에 가업을 일으켰던 대부분의 1세대들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력이 없었다. 회사를 키우는 데 급급했기 때문. 이들은 시간이 흘러 조직이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오르자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 5년 전부터 인문학 공부에 심취했다는 한 60대 중견기업 대표는 “30년 동안은 먹고살기 바빠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며 “부끄럽지만 그동안은 사업을 키워 돈 버는 것만 생각했는데, 인문학 공부를 하다 보니 인생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많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2014년 친한 최고경영자(CEO)들과 고전읽기 동아리를 만들었다는 그는 “모임에 장남을 대동한다”며 “내가 만든 회사가 오래 지속되려면 몇 년 후 물려받게 될 아들에게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심어줘야겠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고전·미술 그룹 스터디, 향교 보내 인성교육 시키기도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다루는 인문학은 사람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생의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 영역이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 대표는 “경영학을 통해 지식을 배운다면 인문학을 통해서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서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되지만 지혜는 갈수록 빛나는 보석이 돼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특히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바람직한 삶의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또 고도의 성장기에는 시스템만 갖추면 자동적으로 회사가 굴러갔다면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시장에 대한 통찰력이나 이해가 필수인데, 그런 측면에서도 미래의 경영자에게 인문학은 반드시 필요한 소양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는 “경영학과 인문학,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되고 두 학문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며 “일부 오너 경영인들은 방학 때 자녀를 조기 유학 보내는 대신 서원이나 향교 등에 보내 어렸을 때부터 도리와 예절 등 인성 교육을 시키기도 한다”고 말했다.
2014년 4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펼치는 모습.
2014년 4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펼치는 모습.
심미안을 기르기 위한 미술 교육도 빼놓을 수 없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그림을 좋아하는 2세 경영인들은 커뮤니티를 만들고, 직접 큐레이터를 초빙해 미학 강의를 받고 국내외 미술관 탐방, 아트페어 참관, 해외 워크숍 등 미술 기행을 1년에 서너 번씩 가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인문학 열풍에 따라 2세 경영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 철학, 미술 등 강좌도 쏟아진다. 배양숙 삼성생명 FC명예사업부 명예상무가 주축이 된 ‘수요포럼 인문의 숲’이 대표적이다. 배 상무는 2세 교육으로 힘들어하는 자산가 고객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2007년 사재를 털어 그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매주 수요일 열리는 포럼은 ‘한국철학사에서 배우는 리더십’, ‘사마천의 사기에서 배우는 리더십’, ‘미래경영 이야기’ 등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진행되며, 최근에는 2세 경영인과 벤처기업인들이 모여 매월 한 번씩 토론하는 ‘예프(Young Entrepreneur Friend·YEF)’라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예프’의 멤버인 2세 경영인 유병택 금산공영 대표는 “4년 전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어떤 가치에 초점을 두고 기업을 이끌어야 하는지가 늘 고민이었는데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일부 해답을 찾았다”며 “지금은 구성원의 행복, 그리고 기업의 영속성에 방점을 찍고 경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2세 경영인과 벤처기업인들의 토론 모임인 ‘예프’.
2세 경영인과 벤처기업인들의 토론 모임인 ‘예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국제경영원에서는 후계자를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소호(少虎) 2030 아카데미’를 200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기업의 승계자와 후계자가 필요한 조직변화관리, 신사업 기획 및 개발, 인문학 교육, 영업력 & 협상력 강화, 리더십과 기업가 정신, 가업승계 전략으로 커리큘럼이 구성돼 있다. 인문학 저자 직강 조찬회 역시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2014년에는 ‘저자와의 마음산책’이라는 주제 아래 신달자 시인, 이지혜 클래식 해설가, 현종 스님 등의 연사들이 자신들의 저서를 바탕으로 인문학 강의를 펼쳤다.

서울대 ‘미래지도자 인문학과정(IFP)’ 역시 2007년 문을 연 지 7년 만에 이 과정을 수료한 수강생이 6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수강생들은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의미를 비롯해 삶에 관한 근원적 주제를 배운다. 장재성 서울대 인문대학장은 “기업 CEO와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전문직 고위 인사를 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할 때마다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며 “이는 우리 사회가 인문학적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BIG STORY] 경영학보다 먼저 인문학 배우는 2세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