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 아트를 꿈꾸는 조향사 크리스토프 로다미엘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조향사(調香師) 크리스토프 로다미엘(Christophe Laudamiel)을 만나고 난 후 공간을 향으로 기억하게 됐다. 멋진 비주얼에 눈이 뜨이고, 아름다운 음악에 귀가 열리듯 후각을 자극하는 즐거움에 코가 번쩍 뜨였다고나 할까.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색이나 음악이 아닌 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그가 고마웠다. 언젠가 오감 중 후각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 록펠러대의 ‘후각기관의 힘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손으로 만져본 촉감은 1%, 눈으로 본 것은 5%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하지만, 코로 향을 맡으면 35% 이상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온기가 그리운 겨울엔 핫초코 향이 떠오르곤 한다. 세계적인 조향사 크리스토프 로다미엘을 만나러 가던 날도 그랬다. 매서운 날씨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 생각이 반, 그에 관한 호기심이 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로다미엘은 ‘핫’한 조향사다. 전 세계에 약 500명의 조향사가 있지만 그만큼 유명한 이는 드물다. 랄프 로렌, 버버리, 톰포드, 에스티 로더 등 지난 20년간 협업한 유명 브랜드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하이엔드 향수 개발뿐 아니라 향을 통한 공간 연출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그중에서도 아베크롬비앤피치(Abercrom bie&Fitch)는 향기 브랜딩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그가 더욱 주목을 받는 이유는 향과 예술을 접목시킨 신선한 시도 덕분이다.
2009년에는 뉴욕 구겐하임박물관에서 향기오페라(Scent Opera)를 선보였고, 맨해튼 중심가의 딜론갤러리에서 후각 아트(olfactory art)의 신세계를 여는 첫 개인전을 성황리에 마쳤다. 영화 ‘향수’에 맞춘 15가지의 고급스러운 향기를 영화의 언어, 향기, 풍경과 연결된 감각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조향사이며,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아티스트다.
그런 로다미엘이 국내 향기 마케팅 전문 기업 (주)아이센트(iSCENT)와 함께 국내 쇼핑몰, 자동차 등 여러 브랜드를 위한 향기 마케팅을 시도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그를 만나기로 한 곳은 서울 청담동 의류 편집매장 블랙공. 패션모델처럼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나 유쾌한 입담으로 주변 공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도시를 향으로 기억하는 그에게 서울은 유자차, 그린티라테, 그리고 커피 이 3가지 향으로 남을 것 같다고.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번져 나오는 게 아닌가. 그 향은 마주앉은 로다미엘이 흥미진진한 레퍼토리를 풀어 놓는 내내 코끝에서 기분 좋게 감돌았다.
지금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향의 이름이 뭔가요.
“초콜릿 테라피(chocolate therapy)예요. 갓 만든 새로운 향을 선물로 준비해 왔어요. 여성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초콜릿을 먹게 되잖아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상담실이나 카페 등에 이 향을 입힌다면 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어요. 어때요. 마음이 좀 느긋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그렇다고 너무 향을 오래 분사하거나 가까이 다가가면 안 돼요. 그건 마치 귀에 대고 트럼펫을 부는 것과 같죠.”
정말 점점 기분이 달콤해지는데요. 이런 향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알고 싶습니다.
“조향사는 작곡가나 시인과 같아요. 향은 제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에요. 작곡가가 곡을 쓰듯 저는 향기 노트에 향으로 작곡을 합니다. 때론 시를 짓듯 향을 만들어요. 지난 20년간 쓴 노트만 2000권이 넘어요. 그 안에는 수많은 향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그 후엔 레시피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100~200개의 포뮬라로 향을 조합합니다. 제 컴퓨터에는 6600개의 포뮬라가 저장돼 있어요.”
대단하네요. 그 많은 향기 노트를 쓰게 해주는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향을 만들기 위해 여러 향을 맡기는 하지만, 단지 향에서만 영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환경, 특별한 이벤트, 추억, 음악, 사진 등 제 관심선상에 있는 모든 것이 영감의 대상입니다. 이 또한 작곡가나 시인과 비슷하죠.”
하나의 향을 만드는 데 시간은 대략적으로 얼마나 걸리나요.
“짧게는 3분, 길게는 3년이 걸려요. 즉흥곡을 쓰듯 막 떠오른 향을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스토리부터 향의 원료까지 오랜 기간 동안 구상하고 실험하며 만들기도 하거든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지만 현실적인 일 진행을 위해서 평균적으로는 3일에서 3개월 내에 향을 만들어냅니다.”
지금까지 만든 수많은 향 가운데 기억에 남는 향이 있다면요.
“아,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베크롬비앤피치, 뉴욕의 랭함 플레이스나 아메리카노 호텔 등 공간을 위해 만들었던 향이 기억에 더 오래 남아요. 향수를 만드는 일보다 스페이스 센팅(space scenting) 즉, 공간에 향을 입히는 작업이 훨씬 더 재미있거든요.”
공간에 향을 입히는 작업이 더 흥미로운 이유는 뭔가요.
“다양한 향을 연주하는 즐거움이 무한대로 늘어나니까요. 피부에 뿌리는 향수보다 훨씬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재스민, 라벤더, 장미향 등 향수에 쓸 수 있는 원료의 양은 엄격하게 제한돼 있어요. 하지만 공기 중에 향을 분사할 때는 더 많은 원료를 맘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우디(나무)향을 입을 수 없지만, 상쾌한 우디향으로 공간을 가득 채울 수는 있잖아요. 또 레몬, 오렌지 등 프레시한 향을 피부에 뿌리면 10~30분이면 날아가 버리지만, 공기 중에서는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호텔이라면 객실마다 다른 향을, 쇼핑몰이라면 층마다 다른 향을 입힐 수도 있지요. 조향사에게 공간이란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향을 변주할 수 있는 놀이터예요. 게다가 아직 향을 입히지 않은 공간이 아주 많으니 흥미로울 수밖에요.”
스페이스 센팅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얘기인가요.
“물론이에요. 스페이스 센팅은 호텔이나 상점에서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죠. 큰돈 들일 필요도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아요. 지금 우리가 있는 블랙공을 예로 들어 볼까요. 매달 다른 테마로 매장의 향을 바꾸는 거예요. 고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자극이 될 거예요. 게다가 같은 공간이라도 좋은 향이 난다면 사람들은 그 공간에 전시된 제품들을 더 고급스럽게 느끼고, 그 공간에서의 경험을 오래 기억하게 된다는 것은 연구 결과로도 증명된 사실이에요.”
상업적인 공간에서 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처럼 들리는데요.
“공간에 향을 입히는 작업은 비주얼 디자인만큼이나 중요해요. 인테리어에는 시각적 디자인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시각이 뇌에 정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후각은 뇌에 또 다른 정보를 전달하죠. 완벽한 인테리어 디자인이 되려면 색, 소재, 음악, 향 4가지 요소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뇌가 어떤 공간을 인지할 때 청각보다 후각이 더 중요한데도 사람들이 이 부분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예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브랜드 마케팅의 전공 수업에서도 향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아요.”
그래서 아카데미를 만들었나요.
“맞아요. 향수와 향료 아카데미는 비영리 교육 단체입니다. 아직 실력 있는 조향사가 턱없이 부족해요. 조향사를 양성해 향이 브랜드나 기업을 위한 제품뿐 아니라 예술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어요. 2015년에는 퍼퓸 어워드를 열고 최고의 향수를 뽑아 상을 줄 거예요. 캠브리지 등 타 대학과 연계해 향기를 디지털로 송신하는 전시도 계획하고 있어요. 그 전시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한 오스냅(Osnap) 애플리케이션이 그 예라 할 수 있어요. 앱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후각 신경에 신호를 보내 향을 맡은 것처럼 자극하게 돼요. 이메일로도 보낼 수 없는 향을 스마트폰을 통해 전달하는 시대가 열리는 거죠. 멋지지 않나요?”
정말 끊임없이 향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데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향과 후각 아트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매년 독일 베를린과 미국 뉴욕 2개 도시의 각기 다른 갤러리에서 다른 주제로 전시를 열고 있어요. 제 꿈은 사람들이 제 전시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서는 거죠. 그날까지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Info 조향사는?
여러 향료를 섞어 새로운 향을 만들거나, 제품에 향을 덧입히는 등의 일을 하는 향료 전문가 또는 향료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직종을 일컫는다. 여러 향을 조합해 각 향료의 특성에 맞게 화장품 향료나 향수를 다루는 향장품연구자(perfumer), 전문적으로 식품 향료를 다루는 식품향료연구자(flavorist)로 세분하기도 한다. 조향사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향료들이 가지고 있는 냄새의 미세한 차이점을 구별하고, 향료의 구성 성분까지도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기획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글 우지경 프리랜서│사진 이승재 기자│
장소 및 의상 협찬 블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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