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mirror): 진실과 거짓의 유희

‘진실’의 상징물로 등장하는 거울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실제가 아니라 ‘실제 같은 것’이다. 또한 ‘나’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치장을 통한 본질의 외면이기도 하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 그림들에 자주 보이는 여러 오류들은 이처럼 거울이 가진 양면성에 기인하고 있다.
그림 동화 ‘백설공주’의 아이슬란드판 삽화, 1852년
그림 동화 ‘백설공주’의 아이슬란드판 삽화, 1852년
동화 ‘백설공주’에서 계모인 왕비는 날마다 거울을 보고 물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거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야 왕비님이죠.” 그러다 어느 날 거울의 대답이 돌변한다. “백설공주가 제일 예쁩니다.” 이 말이 화근이 돼 공주의 시련이 시작된다.

‘백설공주’ 이야기는 거울에 대한 두 가지 관념을 내포한다. 하나는 거울이 진실을 말한다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거울이 자기만족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우선 거울이 진실하다는 생각이 보편화된 것은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반영하며, 특히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은 고대부터 올바름, 깨달음, 분별력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갖게 됐다. 중세 때 거울은 미덕을 의인화한 알레고리에서 ‘분별(prudence)’이나 ‘진실(truth)’의 상징물로 자주 나타났다. 또한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춰 정화시키는 성모 마리아의 순수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울이 과연 진실만을 말할까. 사실 거울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모두 실제가 아니라 ‘실제 같은’ 것이다. 그것은 환영(illusion)이요 가짜다. 또 거울은 표면의 굴곡이나 놓인 위치, 보는 각도에 따라 형상을 곧잘 왜곡시킨다. 거울의 환영을 현실로 착각한다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처럼 죽음과 같은 비극을 부를 수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로케비 비너스’, 1647~1651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로케비 비너스’, 1647~1651년
‘보고 싶은 대로’ 현실의 과감한 왜곡
그런데 나르시스 신화는 우리가 ‘나’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거울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상기시킨다. 거울은 우리의 얼굴을 스스로 알게 해 ‘나’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좀 더 나은 정체성을 만들려 애쓰고, 이에 부응해 거울은 화장이나 더욱 화려한 치장을 부추기기도 한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어디까지나 허상이며 치장을 할수록 본래의 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만약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실체인 본질을 외면한 것이므로 진실과는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따라서 거울은 진실과 정반대인 거짓, 자만, 헛됨과 같은 부정적 의미를 암시하기도 한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거울의 양면적 상징은 고대 신화가 재조명된 르네상스 이후 미술작품에서 세속의 삶에 대한 교훈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신화의 인물 중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는 가장 인기 있는 소재였는데, 거울은 비너스의 상징물로 회화 속에 자주 등장했다. 특히 비너스가 몸치장을 하는 장면에서 거울은 옷을 벗은 비너스와 함께 도입돼 그녀의 미모를 확인시켜주곤 했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시대 화가 티치아노(Tiziano)는 아름답게 치장한 비너스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장면을 그렸다. 또한 이론가이자 화가였던 바사리(Giorgio Vasari)도 비너스가 화장하는 도중 손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 같은 선례들을 이어받아 17세기 바로크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는 비너스를 뒷모습으로 표현하면서 거울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림 ‘거울을 보는 비너스’에서 등 돌린 나체의 비너스는 희고 탐스러운 살결 위로 비단실 같은 긴 금발머리를 부드럽게 나부끼고 있다. 이 매혹적인 뒷모습은 관람자에게 당연히 앞모습이 보고 싶다는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루벤스는 큐피드에게 거울을 정면으로 들고 있게 함으로써 관람자가 비너스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조르조 바사리, ‘화장하는 비너스’, 1558년
조르조 바사리, ‘화장하는 비너스’, 1558년
루벤스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의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는 등 돌린 비너스를 또 다른 형태로 그렸다. ‘로케비 비너스’에서 비너스는 침대에 돌아누워 뒷모습만 보여준다. 이 그림도 마찬가지로 앞모습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궁금한 비너스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슬며시 드러낸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비너스의 뒷모습을 더욱 강조하고 얼굴을 훨씬 모호하게 나타내 보는 이의 욕구를 조금만 만족시키며 슬쩍 비껴나간다.

이처럼 거울을 보는 비너스를 그린 그림들에서 거울은 대상을 두 가지 시점에서 포착함으로써 보다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반면에 자만심과 허영, 성적 유혹을 경계하라는 교훈적 의미도 내포한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비너스 그림들은 모두 거울을 가졌다는 것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거울에 비치는 비너스의 얼굴이 뭔가 이상하다는 점이다. 비너스와 거울의 위치를 가늠해보면 거울에 반영된 얼굴은 과학적으로 형태나 크기가 맞지 않는다. 바사리의 그림 속 거울은 각도로 보아 비너스의 왼쪽 얼굴을 비춰야 하는데 반대로 오른쪽을 반영한다.

또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거울 속 얼굴이 비너스 자신을 보고 있지 않고 화면 밖 관람자를, 혹은 그림 그리고 있을 화가를 보고 있다. 그 시선은 비너스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있기보다는 그림을 보는 사람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의 크기도 잘못됐다. 비너스와 거울과 관람자의 거리를 고려할 때 거울 속의 얼굴은 더 작게 그려져야 한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로케비 비너스’에서 거울 속 얼굴이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크기가 거의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피터 파울 루벤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15년경
피터 파울 루벤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15년경
거울을 보는 비너스 그림들에 자주 보이는 이러한 오류를 ‘비너스 효과(Venus effect)’라고 부른다. 화가가 실제 모델과 거울을 배치하고 관찰에 의해 작업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그렸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화가들은 이처럼 잘못된 반영을 계속 고수한 것일까? 그것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그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관람자가 원하는 것은 거울 속에 비친 작고 가물가물한 형태가 아니라 바로 거울이 확고히 붙잡아줄 비너스의 아름다운 얼굴이기 때문이다. 거울 속 비너스가 그녀 자신이 아닌 관람자를 바라보게 한 것도 비너스와의 교감을 원하는 보는 이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벨라스케스는 왜 거울 속 얼굴을 크게 그리면서도 시선과 표정을 모호하게 처리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만 막상 진실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양면적 심리를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설공주’ 동화에서 왕비가 분노한 것은 실제로 거울이 진실하거나 거짓돼서가 아니라 듣고 싶은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너스 효과’를 생산한 화가들은 관람자의 욕구를 따라 보이는 현실을 과감히 왜곡했다. 이는 관람자가 실망하지 않고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끈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여전히 우리는 그 그림들 앞에서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니 말이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