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인 서양화가 이동수
40대 중반, 중견작가의 입지를 다질 시기이지만 최근 들어 이동수 작가의 이름 석 자를 먼저 주목하기 시작한 곳은 국내 화단이 아닌 유럽 등 해외 아트페어였다.그림 속에 담은 작가의 화법은 ‘은유’였고 화폭에 담긴 그림은 시처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동수 작가는…
1965년 출생.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MBC 미술대전 특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수상, 최근 비엔나 아트페어, 스코프 바젤 아트페어, 파리 아트페어 등 유럽의 유수 아트페어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이동수 작가의 작품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아 그림 앞에 서게 하는 힘이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르고 검은 그 중간쯤의 색감이 바탕을 메우고 한가운데 오롯이 말간 달빛처럼 빛나는 사발이 담겨 있다. 헌데 이 찻사발은 달항아리처럼 탐스러워 어루만지고 싶은 유려한 실루엣이 아니라 시간의 풍화에 바랜 것처럼 점점 시야에서 사라질 듯 흐릿한 선들로 붓칠이 돼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찻사발을 정중앙의 눈높이에서 본 것도 아니어서 안쪽 사발의 면은 제대로 보이질 않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의 주인공이라 하기에는 배경과 경계도 모호해 곧 먹색의 우주 안으로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림에 끌려 작품 앞에 섰지만 이내 본모습을 숨기고 아리송한 질문만 남겨둔 채 이동수의 작품들은 내밀한 이야기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첫인상에 매료돼 발걸음이 끌려왔지만 그 속내가 더 궁금해 자리를 못 뜨는 관객에게 말이다. 소통, 그 나지막한 손 내밈
이 작가의 작품은 찻잔을 담은 ‘플로 볼(Flow Bowl)’과 낡은 옛 책을 그린 ‘플로 북(Flow Book)’으로 대표된다. 2007년부터 시작한 이 작업을 두고 한 미술 비평가는 도자기 찻잔이나 고서와 같은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사물에 주목해 정밀하고도 미묘한 재현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 외 여러 가지 부수적인 장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불러일으킨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림 안의 대상과 그 외 여러 요소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예를 들자면 화폭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미세한 수평적 선들이나 사발의 부분을 부조적으로 처리하는 방식, 증발하는 수증기의 이미지 등을 말한다. 작품 ‘플로 북’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서의 책장이 바람에 넘어갈 듯한 순간을 연출한 것처럼 말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저마다의 가슴에 담긴 그 무언가를 일순간 ‘툭’ 하고 건드려 공명을 일으키고 주변부에 파장을 흐르게 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이 작가의 그림은 순수할 정도로 이러한 예술의 미덕을 충실히 담고 있다. 그의 작품을 실제로 마주하니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깊은 밤바다 같은 배경색에서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의 명상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찻사발, 오래된 책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과 같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이 작가는 대상의 본질 너머에 담긴 이야기를 담았다고 했다. 한 작품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누군가의 이야기, 어떤 이의 담론들이 가슴에 스며들 즈음 이 작가와 그림 사이의 접점이 궁금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7년간 쉼 없이 이어져온 연작 시리즈로 인해 더욱 구체화됐고 특히 2013년 비엔나 아트페어, 스코프 바젤 아트페어, 파리 아트페어 등 해외 아트페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름을 알리게 됐다.
지난해에 해외 아트페어에서 먼저 주목을 받으셨죠.
“비엔나 아트페어와 스코프 바젤 아트페어, 파리 아트페어 세 곳에서 모두 반응이 좋았습니다. 해외 아트페어는 4년째 참가했던 차였는데 지난해부터 결실을 맺었지요. 진출했던 해부터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 관심도 많고 가격도 묻곤 했는데 인지도가 쌓이면서 믿고 작품을 구매한 것 같습니다.”
파리 아트페어에서는 전시를 오픈한 지 2시간 만에 작품이 모두 팔렸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죠. 어떤 점에 매료된 걸까요.
“글쎄요. 매년 호감을 갖고 아트페어를 찾았던 분들이 해가 지나면서 차츰 작품에 대한 신뢰가 쌓였던 것이겠죠. 또 많은 사람들이 작품의 첫인상이 신비롭다고 해요. 재료가 유화인데 유화 자체가 자칫 버터 냄새가 많이 난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이 재료로 동양적인 작품을 그려내니 그것이 매력적인 요소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도 지나치게 동양적인 것을 식상해하는데 제 작품이 한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그 중간의 경계에 잘 머물러서 유럽인들도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라 혼자 분석했습니다.”
작가님의 대표작 ‘플로 볼’과 ‘플로 북’은 벌써 7년째 꾸준히 그려온 연작인데요. 그 출발선은 어디인가요.
“찻사발 그림 작업은 2007년에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내 아트페어도 참가했었지요. 막상 그곳에서 많은 고민이 생겼어요. 순수한 학생일 때 배웠던 예술성, 대학에서 알게 된 작품의 의미보다는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판매를 위한 시류에 영합한 그림들을 보면서 많이 실망했어요. 그런 흐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거죠. 나는 오히려 반대편으로 승부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남들과 정반대의 길이라, 용감한 선택이셨는데요.
“그 당시만 해도 블랙에 가까운 그림들을 그리면 작가로 생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전 그 색들을 화폭에 담았어요.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힘들었지만 어떤 믿음이 있었어요. 국내 화단에서 내 작품을 소비하기보다는 외국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해외에서 인정을 먼저 받아야 국내에서 작가로 성공하는 풍토도 심하잖아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화가로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저는 운이 좋았고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수많은 사물 중에 찻사발과 고서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연한 기회에 시작했어요. 저에게 그림을 배우는 스님이 계셨는데 저는 그분께 다도를 배웠습니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야 하나 변화를 모색하던 때였지요. 늦은 밤, 홀로 차를 마시며 찻잔을 빙빙 돌려 보는데 그때 문득 ‘이걸 그려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양적인 느낌을 담을 수도 있겠고 ‘그릇’이라는 의미가 갖는 여러 상징적 담론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죠. 최영미 시인은 시가 가슴에 들어와야 시를 쓸 수 있다고 했지요. 저도 어느 날 갑자기 찻사발이 마음속에 들어와 지금까지 흥에 겨워 그리고 있습니다. 수년간 꾸준히 그려오면서 저도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들어요.” ‘찻사발’과 ‘고서’ 둘 다 무언가를 담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연스레 관람객의 상상력을 유발하죠. 다도를 하는 시간이 철학과 명상의 시간이지요. 맑고 고요한 시간 속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시간을 갖는 상징성을 담을 수도 있어요. 제 그림 안의 찻사발을 보며 그림의 대상인 물질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저는 작가로서 기쁩니다. 고서 또한 바람에 날리는 책장의 찰나에 주목했어요. 책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 배경과 어우러져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죠.”
작품 안에 담긴 철학적 의미가 매우 깊은 것 같습니다.
“그림에 그린 대상 자체의 상징적인 의미가 커서 그런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의도하고 시작한 작품은 아닌데 그리면서 좀 더 구체화됐습니다. 그릇이나 책 자체의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대상이 주위의 공간과 공기의 흐름에 함께 존재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어요. 내가 보는 순간은 잠깐이잖아요. 작품을 보면서 찰나성과 영원성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작품 속의 사물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하고 빛바랜 시간을 담은 느낌도 나는데요.
“많은 분들이 그림 속의 책, 그릇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안에서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떠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제 대학원 논문 주제가 ‘서사적 이미지의 다중적 표현에 관한 연구’였어요.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작품 안에 대상을 담고 그 대상에서 파생되는 여러 이야기, 시간의 흐름, 공간 등을 다양하게 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 작품에서 꾸준히 표현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에요.” 작품을 본 이들마다 반응도 꽤나 다양하지 않나요.
“제 그림을 본 어떤 분은 물속에 그릇이 동동 떠있는 것 같다고 했고, 어떤 컬렉터 분은 적막한 우주 속에 턱하니 찻사발을 둔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저 또한 찻사발이나 고서라는 대상의 아름다움보다는 사물을 통해 그 사물 뒤에 있는 어떤 추억이나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저는 그러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저마다의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의 완성은 화가가 붓을 놓을 때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관람객과 만나는 순간에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보는 이가 그림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 충분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작품이 아닐까요.”
속초에서 생활하고 계시죠. 주변 환경이 작업에 많은 영향을 줄 것 같아요.
“고향이 원래 양양이에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바다를 보고 살아온 거죠. 작품에 숙명처럼 녹아 있을 수밖에 없죠. 바다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다라는 평면 위에 파도가 수평선을 그리며 거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또 뒤에서 밀려오고 하잖아요. 그 무한한 반복의 과정이 제 그림에 담겨 있어요. 작품을 가로지르는 수평적 선이 그 파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죠. 작품에 담긴 흰색에 가까운 수평적 붓질은 바다의 파도를 조형적으로 담은 것이지요. 그 안에서도 시간의 영속성, 찰나가 떠오르고요. 그렇게 작품과 관람객이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의 작품이 보는 이들을 사유의 세계로 이끈다는 생각을 했는데, 같은 맥락 같군요.
“전 제 작품이 휴식이 필요한 이들에게 주는 어떤 시각적 장치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요즘 현대인의 눈이 얼마나 피로합니까. 광고며 각종 미디어만으로 눈이 피로한데 요즘 국내 아트페어의 작품들도 얼마나 자극적인지 모릅니다. 피로한 눈을 더 찌르는 것 같았어요. 가끔 철학의 부재가 느껴지는 작품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당장 팔리기 위한 작품, 당장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한 그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 작품을 통해 잠시라도 생각에 빠지고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면 좋겠어요.” 현재 철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계신데 작품 세계와도 연관이 깊죠.
“재주만 있다고 예술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작가의 사유와 철학이 작품에 담겨야 하잖아요. 천재의 조건이 서른 살 전후로 죽어야 하는 건데, 전 이미 장수해야 하는 운명이 돼 버렸고요.(웃음) 이렇게 된 바에야 거장이 돼야 하니 장기적으로 공부를 더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학위를 따서 한 줄 프로필을 늘리려는 것은 아니에요. 공부 분야는 서양철학이지만 동양철학도 청강으로 가서 듣고 있어요. 강의도 듣고 공부하면서 제 속에 뭔가 스며드는 게 있겠지요.”
작가님이 작품을 통해 결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뭘까요.
“한마디로 정리하면 소통이겠지요. 최근 들어 이러한 생각의 심지가 더 굳어졌고요. 작가의 진정성이 존재한다면 그림을 통해 보는 이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작품이 진지하다고 꼭 무거운 건 아니더군요. 유머나 위트를 넣어도 작가의 생각, 철학이 함께 배어 있다면 작품은 깊어질 수밖에 없어요. 어떤 표현 방식으로든 작품을 보는 타인과 교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온 가치들이 작품을 통해 구현되고 타인에 의해 새롭고 전혀 다른 각도로 재해석 되는 과정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늘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웠지만 지금 더욱 좋아요. 요즘처럼 대형 작품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작은 작품을 많이 그릴 때보다 용기가 더 생긴 결과지요. 작품을 통해서 내 안에 내재된 역량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요. 내년 1월에 싱가포르 아트페어와 3월에 있을 파리 아트페어에 참가할 계획이고 돌아와 국내에서 개인전을 구상 중입니다. 저 스스로 아직은 ‘플로 볼’ 작품들이 완숙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좀 더 매진해서 발전시킬 생각입니다.”
이지혜 프리랜서 | 사진 김기남 기자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