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금융 전문가들은 한국 금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비용은 많이 드는 반면 먹을 것은 별로 없는 시장”이라고 하는데 왜 그럴까.
[SPECIAL REPORT] 월가에서 본 한국 금융
“서울을 매력적인 아시아 금융 허브(Hub·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2011년 11월 5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호텔. 금융감독원은 씨티그룹 부회장, 골드만삭스 부행장 등 40개 글로벌 금융회사의 고위급 임직원을 모아놓고 투자설명회(IR)를 열었다.

당시 최수현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은 “외국 금융인들도 한국의 외환 시스템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며 외국 금융회사의 유치를 자신했다. 실제 이날 미국의 피델리티 등 세계적인 자산운용사 3곳은 한국 진출에 관한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했다.

정부 관계자는 “지구촌을 휩쓰는 금융위기가 우리나라에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시했다. 이날 MOU를 맺은 금융회사 임원은 “한국의 금융 개방성이 회사의 전략과 맞아떨어졌다”며 “서울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화답했다. 그로부터 약 3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한국 외면하며 떠나는 외국 금융회사
이로부터 약 1년 뒤인 2012년 12월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아시아태평양본부가 위치한 싱가포르에 한국지사를 통합하기로 한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아시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사들을 한 군데에 모아 경비를 절감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경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차원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이후 외국 금융회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썰물처럼 한국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HSBC그룹은 지난해 7월 한국 소매금융 사업에서 철수하겠다고 밝혔고, 네덜란드 ING생명도 회사를 사모펀드인 MBK에 넘기고 한국을 떠났다.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지난 7월 자회사인 스탠다드차타드저축은행과 SC캐피탈을 매각하고 한국 사업을 축소했다.

월가의 금융 전문가들은 한국에 대해 “비용은 많이 드는 반면 먹을 것은 별로 없는 시장”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 마디로 ‘계륵(鷄肋)’이라는 것이다. 홍콩과 싱가포르 등 경쟁 도시에 비해 높은 세율과 까다로운 금융당국의 간섭 등으로 직간접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이를 상쇄할 정도의 큰 이익을 벌 수 있는 시장은 아니라는 것.

외국 금융회사들은 ‘탈(脫)코리아’에 대한 이유 중 하나로 관치를 지목하고 있다. 자율적으로 책정할 수 있는 각종 수수료 등 개별 금융회사의 영업 전략에 대해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금융당국이 시시콜콜 간섭에 나선다는 것이다. 여기에 서민금융 활성화 등 각종 사회공헌을 요구하면서 금융회사 줄 세우기에 나서는 등 시장논리를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은 “외국계 금융회사가 한국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한국 내부의 적대적인 인식도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글로벌스탠더드와 거리가 먼 무리한 금융당국의 조사로 이어지고 그 결과 한국에 대한 이미지만 나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미인가 영업 행위로 금감원이 고발한 골드만삭스 홍콩지점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이 대표적인 경우. 검찰은 골드만삭스 서울지점이 투자를 권유하는 등 채권 판매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해 위법이 아니며, 홍콩과 서울지점은 서로 약정을 맺고 매출을 나눈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골드만삭스는 2012년 10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국내 기관투자가에 약 11억 달러 상당의 말레이시아 공기업 채권을 팔았다. 금감원은 이 중 6억 달러는 홍콩지점서 판매했다며 미인가 영업 행위로 검찰에 통보하고 서울지점에 대해서는 ‘기관주의’ 조치를 내렸다.

반면 검찰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은 외국 투자매매업자가 인가받은 국내 법인을 통할 경우 외국 금융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며 합법적 거래로 판단했다.

외국계 회사를 대리하는 국내 대형 로펌의 한 관계자는 “한국의 금융시장은 대외 충격에 매우 취약한 ‘스몰 오픈 이코노미(small open economy)’의 특징을 갖고 있다”며 “외국 대형 금융회사가 한국을 떠나는 것 자체가 대외적으로 부정적 신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진출보다는 크로스보더(cross-border) 영업이 이슈
월가의 한 투자은행(IB)에서 일하는 한국계 펀드매니저는 “한국 금융시장과 관련한 외국 금융회사들의 가장 큰 관심은 한국 정부가 ‘크로스보더’ 영업을 얼마나 허용할지 여부”라고 말했다.

한국에 아시아 본사나 지점을 두고 영업조직이나 리서치, 트레이딩 부서를 직접 운영하기보다는 홍콩, 싱가포르, 베이징 등지에서 직접 국내 금융회사를 통해 상품을 판매하고 기업 인수·합병(M&A) 등의 딜을 하겠다는 의미다. 외국 금융회사를 서울 등지에 유치해 서비스 산업을 활성화하고, 고용을 늘이겠다는 정부의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한국이 10년 전 내세웠던 ‘동북아 금융허브 로드맵’ 전략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03년 당시 정부는 2015년까지 홍콩과 싱가포르에 이은 아시아 3대 금융허브를 만들겠다는 중장기 비전을 발표하고 ‘금융 중심지의 조성과 발전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글로벌 금융회사 가운데 아시아·태평양본부를 서울이나 부산에 둔 곳은 없다.

아랍에미리트 정부가 한국과 비슷한 시기인 2004년 9월 두바이를 세계적 금융허브로 키우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뒤 규제 완화와 적극적인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세계 국제금융센터(IFC)에 따르면 2012년 기준 두바이는 총 53개의 IFC 중 순위 6위에 올라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뉴욕서 매년 열리는 한국 금융설명회도 정부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투자를 유치하기보다는 일회성 행사로 기획된다”며 “호텔에서 월가의 금융인들을 초청해 비싼 밥 먹고, 세미나 한 번 하는 걸로 끝”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뉴욕에 진출한 한국 금융회사들은 선진 금융기법을 확보해 승승장구하고 있을까. 올 상반기 시중은행 미국법인들의 실적을 살펴보면 순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절반 이상 감소하면서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은행의 미국법인인 우리아메리카은행은 상반기 순익이 293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7% 줄었다. 신한아메리카은행도 순익이 428만 달러로 전년보다 절반 가까운 48% 감소했다. 하나은행 미국법인인 BNB하나은행은 적자 규모가 지난해 상반기 77만 달러에서 올해는 291만 달러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3% 중반이던 순이자마진이 3% 초반대로 떨어진 반면 대출 경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수익을 내기 힘든 영업 환경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국에 진출한 지 수십 년째가 돼도 이 같은 답보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 시중은행들의 미국법인 자산은 15억 달러(1조5000억 원)에 불과하다. 영업 대상도 교포사회와 미국에 진출한 한국의 대기업이나 거래 중소기업으로 제한돼 있다. 안면을 통한 한국식 영업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체계적인 리스크 관리와 고객 데이터가 축적돼 있지 않아 수십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미쓰이스미토모 등 일본계 대형 은행들조차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미국에 진출한 한국의 중소기업을 상대로 공격적인 대출에 나서면서 오히려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한국서도 현지에서 적극적인 투자나 영업 확대를 독려하기보다는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큰 사고만 치지 말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뉴욕(미국)=이심기 한국경제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