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Flower’의 작가 이승호

작가 이승호는 꽃 그림으로 유명하다. 두터운 아크릴로 꽃의 질감을 살린 그의 작품은 서양화라기보다는 동양화의 느낌이 강하다. 푸른색의 명암 대비가 돋보이는 꽃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ARTIST] “생의 아픔과 고뇌를 꽃의 이미지로 화폭에 담았어요”
작가 이승호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다. 작가와 와인 바 ‘와이너리(Winer-Lee)’의 주인이 그것이다. 인터뷰를 한 곳도 서울 서초동에 있는 그의 와인 바였다. 지하주차장 입구 위, 빈 공간을 리모델링한 와인 바는 크지는 않지만 와인 향이 곳곳에 배어 있다.

압생트를 손에 쥔, 고뇌에 찬 보헤미안 예술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와인 바 안쪽에서 작가 이승호를 만났다. 2013년 11월 초 인사동 갤러리M에서 가진 ‘블루 플라워(Blue Flower)’전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다 식은 커피를 잔에 따르는 그에게 와인 바를 시작한 계기를 물었더니 “삶은 자신의 의도보다는 계획된 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세상을 몇 바퀴쯤 돌아야 알 법한 대답을 한 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그는 그림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사생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제일 좋은 상을 받았지만, 화가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행정고시를 보거나 사업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다시 진로를 고민하게 됐다. 그에 대해 그는 원래 예술가적인 피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형이 성악을 잘했어요. 그래서 성악과에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 반대로 결국 경제학을 전공하게 됐어요. 형 덕에 어려서 철학서를 많이 접했는데, 당시 주류였던 데카당 등 염세주의 철학에 빠졌죠. 한참 놀 나이였지만 철학에 빠지면서 생각이 무거워졌어요.”

인간과 신과의 관계, 인간 의지의 나약함 등 청소년기의 고민은 그를 변화시켰다. 철학적 고민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조금만 뛰어오르면 담벼락 저편의 진리가 눈에 보일 듯했다. 예술을 통하면 담벼락 저편, 내 삶이 온전히 보일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였던 미술이라면 그게 가능할 듯도 싶었다. 조금 배가 고파도 내가 하고 싶은 그림을 하자고 작정했다. 후회는 없을 듯싶었다. 그림에는 자신이 있었다. 미술학원 한 달을 다녔는데 몇 년을 다닌 친구들보다 그림이 나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 미대를 가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미대 입시라는 게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보기 좋게 미대 시험에 낙방한 후 그는 재수, 삼수 생활을 했다. 재수, 삼수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어정쩡한 경계의 생활은 방황의 연속이다. 그도 경복고 선배들을 따라 명동 셀부르에 다니기도 했고, 흥건히 술에 취하기도 했다. 결국 삼수 끝에 홍익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첫 개인전은 그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줬다. 큰 그림만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했고, 그로 인해 삶에 대한 허영도 버리게 됐다. 보다 담담하게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그때였다.


촉망받는 작가가 와인 바 사장이 된 사연
대학 생활은 1980년대 미대생의 전형이었다. 작업실에서 밤새 작업하고 그대로 쓰러져 자는 게 일상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보일 때였지만, 그는 ‘인간 이승호’에 초점을 뒀다.

“제 작업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내 삶의 보고서’라는 관점을 갖고 있어요. 첫 작업은 나와 내 주변이 큰 끈과 작은 끈으로 얽히고설킨 것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 끈을 통해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풀어낸 거죠. 그 뒤 제가 변하면서 1990년대 이후 ‘단상’, ‘히스토리, 허스토리’ 등의 작품으로 옮아갔죠. 제 작품들은 제 삶의 여정을 일기처럼 그대로 써내려간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대 진학까지는 삼수라는 굴곡이 있었지만 이후는 탄탄대로였다. 1992년 홍익대 대학원 서양학과에 진학했고, 1993~1994년 조교, 1995년 연구조교를 지냈다. 홍익대 대학원 서양학과 연구조교는 교수 자리가 보장되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지방대 미대 교수에 버금가는 서울예대 강사를 10년 가까이 지냈다.

그즈음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공평아트센터의 495㎡나 되는 큰 전시장 중 절반을 썼는데 150호, 200호짜리 대작을 그려도 전시장을 채우기 쉽지 않았다. 욕심이 지나쳤는지 미친 듯이 그렸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1 ‘Blue Weather’, 116X80cm, 판화지에 아크릴과 안료, 2011년.
1 ‘Blue Weather’, 116X80cm, 판화지에 아크릴과 안료, 2011년.
첫 개인전은 이 작가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줬다. 큰 그림만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그러면서 삶에 대한 허영도 버리게 됐다. 보다 담담하게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그때였다. 그런 교훈을 바탕으로 1995년 홍익대 문헌관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2년 후에는 인사동 보다갤러리에서 ‘히스토리, 허스토리’라는 주제의 개인전을 열었다. 첫 개인전 이후 그림도 제법 잘 팔렸다.

1996년 들어 그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보금자리 같은 대학을 떠나 전업 작가로 나서기로 한 것이다. 10년 넘게 정이 들었던 서울예고 강사 자리도 내려놓았다. 작업실도 홍익대 근처에서 강남으로 옮겼다.

“혼자 작업하는 게 생각만큼 녹록지 않더군요. 2004년 여러 명이 큰 작업실을 구해서 홍익대 쪽으로 다시 옮겼어요. 1, 2층을 작업실로 썼는데 미술 하는 사람들 중에 술꾼이 많잖아요. 작업실에 와서 제 술을 뺐어먹다 미안하니까 술을 갖다 놓으라는 겁니다. 원래 와인을 좋아해서 자신은 있었어요. 처음에는 테이블도 없이 1층에 나무상자를 놓고 시작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더라고요.”

자의반 타의반 시작한 와인 바는 6개월 만에 급성장했다. 한참 잘 될 때는 한 달 매출이 1억 원을 넘었다. 분위기를 타고 홍대 2호점, 서초동점을 냈다. 화실과 와인 바를 분주히 오가던 그즈음 삶은 그를 또 한 번 뒤흔들었다. 아버지의 죽음 등 불행한 일이 겹친 것. 그는 더욱 그림과 와인 바에 매달렸다.
[ARTIST] “생의 아픔과 고뇌를 꽃의 이미지로 화폭에 담았어요”
생각의 조각을 모아 작품에 담다
2009년, 이 작가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홍대 와인 바를 정리하고 서초동 한 곳만 운영하기로 했다. 한동안 등한시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간의 아픔과 고뇌로 화폭에 옮길 자신의 이야기는 풍부했다. 꽃의 이미지에 집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 전에도 가끔 꽃을 그렸지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2011년부터는 꽃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신기한 것은 기분에 따라 꽃의 분위기가 달랐다. 침잠되고 슬픈 분위기를 띠다가, 어떤 때는 아련함으로 다가왔다. 2013년 개인전에는 푸른색을 주로 썼는데, 이전보다 다이내믹하고 활달했다는 평을 들었다. 지난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는 “즐거워서라기보다 시간의 망각을 통해 아픈 기억을 떠나보냈다”고 말한다.

요즘은 주말과 월요일은 작업실에서, 나머지는 서초동 와인 바에서 보낸다. 전시 일정이 잡히면 보통 넉 달 가까이 작업실에서만 지낸다. 그에게 일주일에 4일, 와인 바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시간이자 해놓은 작업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 ‘Memory of bordeaux’, 91X60cm,캔버스에 아크릴과 안료, 2011년.
2 ‘Memory of bordeaux’, 91X60cm,캔버스에 아크릴과 안료, 2011년.
작업실에서는 이틀 동안 우두커니 앉아만 있을 때도 있다.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의 조각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시간이다. 그런 다음 물감을 갠다. 그는 한 작품을 위해 매번 물감을 새로 만든다. 많은 작가들이 물감을 패턴화하지만 그는 패턴화하는 게 싫어서 그때그때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을 만든다. 색 만드는 데만 2~3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기도 한다.

“8~10개의 색을 섞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색깔이 나오기도 합니다. 드로잉한 것을 보면서 거기 맞는 색을 만드는 거죠. 일반 서양화와 달리 작업은 눕혀서 합니다. 캔버스를 세워서 작업할 때와 바닥에 깔아놓고 할 때 손의 흐름이 다른데, 저는 눕혀서 하는 게 좋습니다. 제 그림을 보고 동양적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3 ‘Blue Flower’, 116X80cm, 캔버스에 아크릴과 안료, 2013년.
3 ‘Blue Flower’, 116X80cm, 캔버스에 아크릴과 안료, 2013년.
그는 작업실에서 시집 못 보낸 작품들을 자주 본다. 거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다. 가끔은 그걸 모티브로 또 다른 드로잉을 하기도 한다. 그는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단정 지어서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 아직 자기 자신도, 인생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작업은 그걸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이, 그리고 예술이 다채롭고 매력적인 게 아닐까.

그는 2014년부터는 큰 작업을 병행할 계획이다. 형태는 아직 알 수 없다.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림이 삶의 보고서라는 주제는 바뀌기 않을 것이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