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얀트리 해밀회

라이프스타일에 녹아든 나눔을 지향하는 일. 말은 참 멋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생각을 조금 바꿔보자.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나눔을 실천한다면 조금 쉬워지지 않을까.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이하 반얀트리)의 멤버십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봉사 모임을 만들자 반얀트리가 지원에 나섰다. 기부에 앞장서는 ‘소셜 클럽’은 어쩌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새로운 롤 모델이 될지도 모른다.
해밀회는…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멤버십 회원이 주축이 된 봉사 단체. 김관남, 김정옥, 박미경, 박성민, 양지혜, 이화란, 이수미, 정현정, 최수아 등 30~40대 여성 10여 명으로 구성.
해밀회는…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멤버십 회원이 주축이 된 봉사 단체. 김관남, 김정옥, 박미경, 박성민, 양지혜, 이화란, 이수미, 정현정, 최수아 등 30~40대 여성 10여 명으로 구성.
사실 기업의 나눔 활동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비슷하다. 기업의 대표가 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하거나, 직원들이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이웃을 돕는 행사를 하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2013년 11월 6일 반얀트리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의 자선 바자회가 열렸다. 바자회의 주체는 멤버십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봉사 모임 ‘해밀회’. 반얀트리는 바자회 장소를 무료로 제공했다. 떠들썩한 홍보도 없이 2주 만에 바자회 티켓 875장이 팔렸다. 행사 역시 성황리에 마쳤다. 하루 만에 2000만 원의 기금이 모였다. 모든 수익금은 ‘해밀회’의 이름으로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 기부해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쓰인다. 회원이 ‘쿵’ 하면 기업이 ‘짝’ 하는 이상적인 ‘쿵짝’으로 이루어낸 나눔 활동의 주인공들이 자못 궁금했다.

인터뷰를 위해 한두 명씩 속속 모여드는 해밀회 회원들의 첫마디는 한결 같았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인터뷰까지 하기 부끄러워요.”

어느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남산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7명의 남녀가 모여 앉았다. 반얀트리 멤버 회원들이 주축이 된 봉사 클럽 ‘해밀회’ 회원들과 반얀트리를 운영하는 변기호 현대에이블 호텔 앤드 리조트 대표. 회원들은 ‘좋은 장소’를 내주셔서 고맙다고 입을 모았다. 변 대표는 ‘좋은 일’에 발 벗고 나서줘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답했다. 인터뷰 내내 그들 사이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엄마의 마음이 모여 시작된 일
시작은 그랬다. 같은 빌라에 사는 세 아이의 엄마 이화란 씨(44)와 한 아이의 엄마 박성민 씨(39)가 커피 한 잔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 친목 모임만 하지 말고 좋은 일 한번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한 달에 3만 원씩이라도 1년을 꾸준히 모으면 당장 주변의 소외된 아이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생각에서였다. 아프리카처럼 먼 나라보다 가까운데서 찾아보자 싶었다. 마음먹은 김에 함께 친목 모임을 하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다. 다들 ‘아이 키우는 엄마’였기에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엄마들이 모여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후원하는 모임 해밀회가 시작됐다.

“그땐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연말에 모은 돈을 가지고 동네 복지관을 찾아 갔어요. 뭐가 좋을까 상의하다가 마침 연말이고 해서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 열어 주게 됐어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는커녕 생일 파티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내 아이 생일파티 준비하듯 직접 음식을 만들고 선물 포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작은 선물에도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먹먹해졌어요.”


앞에서 끄는 회원, 뒤에서 미는 반얀트리
작은 나눔이었지만 긴 여운이 남았다. 일회성 행사 말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좀 더 도움이 필요한 아이에게 좀 더 도움이 돼주고 싶은 욕심도 났다. 욕심만큼 새로운 봉사 활동을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 학교에서 여는 자선 바자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화란 씨가 회원들에게 “우리도 바자회를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찬성했다. 이번에도 생각만큼 준비가 쉽지는 않았다. 의욕이 앞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그중에서도 장소 섭외는 매년 부딪치는 난관이었다. 아무리 바자회를 잘 준비해서 기금을 모아도 장소 대관료를 내고 나면 모금액이 줄어들었다. 2012년에는 운 좋게도 한 회원의 친구가 가로수길 카페를 무료로 대여해준 덕분에 기금 1000만 원을 마련했다.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과의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기금으로 5개월 된 아기의 심장수술을 지원할 수 있게 된 것.

“바자회 수익금의 일부가 아니라 전액을 기부할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리곤 다들 마음을 졸이며 수술 결과를 기다렸어요. 수술은 성공적이었어요. 그런데 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기 부모님이 ‘천사 같은 분들’ 덕분에 우리 아이가 살았다고 하셨대요. 같은 엄마로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바자회 준비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고 힘들었던 날들을 한순간에 보상받는 기분이었어요. 저희가 언제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보겠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2013년엔 더 큰 장소에서 바자회를 열면 기금을 좀 더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반얀트리에 연락했다. 반얀트리 측은 흔쾌히 무료로 장소를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뛸 듯이 기쁜 만큼 발로 뛸 일이 많아졌다. 장소가 커지니 판이 달라졌다. 멤버십 호텔에서 열린다고 해서 부담 갖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바자회를 열고 싶었다. 주머니가 가벼워도 손쉽게 살 수 있는 소소한 아이템부터 큰 금액을 모금할 수 있는 아이템까지 고루 준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회원들의 집에서 잠자고 있는 헌옷, 헌책, 장난감부터 모았다. 농장 직송 고구마, 어머니가 담근 고추장, 홈메이드 유자차 등 회원의 가족과 친구 등 지인의 도움도 적극 활용했다. 장 보러 온 기분으로 필요한 물건도 사고 기부도 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바자회 준비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다시 바자회가 열린 듯 시끌벅적했다. 더 많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또 어떤 아이템이 좋을까 고민 끝에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관남 회원(43)이 그림을 기부했고, 박미경 회원(37)은 아티스트인 동생의 그림을 기부 받았다는 이야기 등 서로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훈훈한 제보가 끊이질 않았다. 소소한 고생담을 이야기하는 동안 회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사서 고생하는 즐거움에 중독된 사람들 같았다.

“반얀트리 멤버십 회원들이 바자회를 한다고 하니 화려할 거라 생각했다가 와보니 반전이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티켓도 저희가 직접 디자인했어요. 손이 부족해 집에 들고 가 남편, 아이들과 함께 티켓을 칼로 잘랐으니 가내수공업이 따로 없었죠. 그렇게 만든 티켓을 팔려고 또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몰라요. 별일 아닌 일로 생색내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홍보도 자제했어요. 주변 지인들에게 일일이 취지를 설명하고 티켓을 팔았어요. 그래도 주변의 엄마들은 아이들을 돕기 위한 행사라고 하면 많이들 사 주셨어요. 정말이지 주부들의 파워로 티켓을 다 판 것 같아요.”

철저한 아날로그식 준비였다. 입소문이 날수록 좋은 취지에 공감해 오고 싶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자, 급히 현장 판매 티켓도 준비했다. 바자회 오픈 시각 10시가 되자 반얀트리 주차장이 마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바자회가 끝나자 나도 해밀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사람들도 늘었다. 회원들은 해밀회가 “처음엔 주먹구구식이었지만 점점 회원이 늘고 체계가 잡혀가는 모임이 돼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세를 몰아 2014년 계획도 재정비했다. 바자회를 포함해 1년에 5회 모든 회원들이 참여해 나눔 활동을 하기로 했다. 바쁜 일정 중에 이 자리에 참여했음에도 가만히 해밀회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변 대표에게 소감을 물었다.
변기호 대표는… 1961년생,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1985년 워커힐 호텔 입사. 2007년까지 기획­­­­실장(상무급) 역임. 20년 이상 호텔 업계 경력을 쌓은 전문경영인.
변기호 대표는… 1961년생,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1985년 워커힐 호텔 입사. 2007년까지 기획­­­­실장(상무급) 역임. 20년 이상 호텔 업계 경력을 쌓은 전문경영인.
“저는 회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합니다. 저희는 회원님들에 의해 움직이는 클럽이라, 기업이 앞장서기보다는 회원과 함께하는 나눔 활동을 하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었어요. 그러던 차에 ‘해밀회’ 바자회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지원하게 됐습니다. 비용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매출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회원들에게도 반얀트리를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도 나눔을 전파하는 일이잖아요. 해밀회 회원들이 지금처럼 따뜻한 마음 그대로 매년 나눔 활동을 펼쳐갔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2014년에도 2015년에도 꾸준히 지원할 겁니다. 그래야 훗날 뒤돌아봤을 때 스스로에게 ‘참 잘한 일이다’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나눔의 통로가 되겠습니다”
취미나 관심사가 같은 회원들이 함께 하는 소셜 클럽이 활발한 반얀트리는 변 대표의 말처럼 회원에 의해 움직이는 클럽이다. 회원들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교류하고 취미와 여가를 함께 즐긴다. 키즈 클럽이 활성화돼 있어 젊은 회원들도 많다. 클럽 회원들 중에서도 기부와 나눔 활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단다. 문제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른다는 것. 변 대표는 그런 회원들에게 나눔의 통로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기업의 입장에서 단순히 기부 활동을 하기보다는, 회원들이 나눔의 체험과 그로 인해 보람을 느끼는 경험을 쌓아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한다. 작지만 반얀트리에서 2012년부터 연말에 진행하고 있는 ‘위시트리’ 행사는 회원들이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일 대 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할 수 있게 매칭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위시트리는 아동복지시설 선덕원 아이들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갖고 싶은 것이나 아이들이 바라는 작은 소망을 적은 카드를 달아놓은 트리예요. 카드에는 크레용을 갖고 싶다거나 빨간 구두를 신고 싶다는 작고 귀여운 바람이 적혀 있어요. 이 트리를 클럽동 로비에 두면 회원들이 카드를 읽고 선물을 해주고 싶은 사연에 종을 달아 주게 됩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반 이상 매칭이 됐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저희 임직원들과 회원들이 함께 아이들을 찾아가 선물을 전달할 계획입니다. 이렇게 작은 선물에서 시작해 꾸준히 지원하다 보면 나중에는 회원들이 아이들 인생의 멘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 지원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인생의 꿈을 심어줄 수 있는 도움이라면 더욱 좋겠어요.”

아이들의 꿈 이야기를 할 때 변 대표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는 대학 졸업 이후 지금까지 30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서울 근교 교회에서 청소년 주일교사 활동을 하고 있다. 주일교사를 하며 가장 뿌듯할 때가 가정환경,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꿈이 없던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갈 때라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반얀트리도 가까운 지역 아동센터와 협약을 맺었다. 회원들에게 제대로 나눔의 통로가 돼 주려면 연말에 일회성으로 끝나는 나눔이 아니라 장기적인 나눔 활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회원들과 저희가 함께하는 활동들이 일회성 기부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녹아든 나눔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해밀회는 물론 제2, 제3의 클럽 회원 봉사 모임이 생겨나고 지속될 수 있도록 나눔의 통로 역할을 꾸준히 하겠습니다.”

변 대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밀회 회원들은 2014년 바자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연스레 제안했다. 변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귀 기울였다. 인터뷰가 끝나도 그들의 아이디어 회의는 계속 될 것 같았다. 반얀트리의 클럽동을 나서는 길, 로비에는 아이들의 소원을 달아 놓은 위시트리가 따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지경 객원기자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