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첫 번째 김시습의 ‘금오신화’

‘세상을 읽는 지혜’, ‘사유의 힘’. 고전을 일컫는 표현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즐거움을 넘어 고전이 주는 ‘힘’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학창 시절 필독서로 의무감에 했던 고전 읽기와는 분명 다른, 한 줄 한 줄 내면에 와 닿아 깊은 사색을 만들어내는 고전 읽기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호랑이 사냥이 끝났다”는 말로 세간에 화제가 됐던 영화 ‘관상’은 삼라만상의 이치가 모두 얼굴 안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호랑이 상의 김종서, 이리 상의 세조, 이 둘의 팽팽한 기 싸움을 오가며 줄다리기를 하는 구렁이 상의 내경, 이들의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탓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계유정란’의 끔찍한 역사적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계유정란(癸酉靖難)이란 계유년(1453)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책동한 사건을 이르는 말로 이 사건 이후 세조는 단종에게서 왕권을 이양 받게 된다. 어린 임금 단종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죽거나 처형당했는데 이들의 수만 헤아려도 어림잡아 7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사지를 마차에 묶은 다음 찢어 죽이는 형벌인 ‘차열형’에 처해진 이가 적지 않았으며, 그 사지가 한양 군기감 앞에 3일 동안 효수돼 거리가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심지어 이들의 시체가 한강변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시체를 거두는 자 또한 엄하게 처벌된다고 하여 누구하나 거두지 못한 채 끔찍하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강변에 나타나 핏자국이 선명하게 밴 사육신의 시체를 거두는 자가 있었다. 이미 삼족이 멸한 사육신의 일가친척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들을 상전으로 모셨던 하인도 아니었다. 사방팔방 이곳저곳에 험하게 널린 시체를 하나하나 거두어 가까이 있는 노량진에 묻은 자는 바로 ‘금오신화’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김시습이다. 그는 계유정란이 일어났을 때 책을 모두 불사른 뒤 전국을 떠돌며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실은 그 역사의 뒤안길 곳곳에 손길과 숨결로 조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금오신화’의 저자 그 이상의 존재감, 김시습
원래 김시습은 그의 나이 5세 때부터 그 비범함과 영특함이 대단하여 세종이 친히 김시습을 불러 재능을 알아봤다고 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불렸다. 그래서 그를 부르는 별칭으로 ‘오세’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계유정란을 도모했던 한명회가 ‘청춘엔 사직을 붙들었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글을 쓰자 김시습이 두 글자를 바꿔 ‘청춘엔 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렵혔다(靑春危社稷, 白首汚江湖)’로 재해석했는데 이 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세조는 후에 충의를 지닌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에까지 찾아갔으나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미 소식을 접한 김시습이 절을 몰래 빠져나왔던 것. 세조의 애석함은 대단해 “신하 하나 못 얻는 내가 어찌 가마를 타고 돌아가랴”라고 하면서 타고 왔던 마차를 그대로 남겨두고 갔다고 한다. 그 가마는 아직도 마곡사에 보관돼 있다. 중학교 시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었던 김시습에 대한 일화다.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저자라는 것.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이 사실만으로는 ‘금오신화’가 왜 한국의 유산이며 자랑할 만한 문헌인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금오신화’는 그 형식상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편뿐이다. 이것도 일본에 전해지던 것을 1927년 최남선이 구해 와서 잡지 ‘계명’에 실은 것이 기록으로 남아 우리 문화유산으로 수용됐다. 조선시대 때 ‘금오신화’를 읽었다는 기록은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에 반해 일본에서는 여러 판각본의 형태로 발간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소설은 이후 일본 최초의 괴이 소설인 ‘오토기보코(伽婢子)’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만큼 ‘금오신화’가 가진 형식상의 새로움과 이야기의 참신함은 문화를 배양한 원천이 됐다. 이황도 이 책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으며, 또 다른 선비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두통이 사라졌다”고 할 정도다. 또 ‘패관잡기’를 쓴 어숙권은 “나는 책을 읽다가 어루만지면서 세 번 감탄했다. 다만 서술의 양상은 ‘전등신화’를 답습했는데 입의와 출어는 그보다 나으니 어찌 청출어람일 뿐이겠는가”라고 하면서 중국의 ‘전등신화’를 넘어서는 작품으로 평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 위로와 화해가 먼저다
그만큼 ‘금오신화’는 새로운 이야기다. 대개 ‘금오신화’에서 ‘신화’를 ‘神話’로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 ‘신’은 새로울 ‘신(新)’을 쓴다. 종전의 것과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의 새로움은 ‘최초’의 한문소설이라는 업적으로만 대신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소설이었고, 그 이후로도 이 같은 이야기가 쉽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지금 남아 있는 ‘금오신화’의 5편 가운데 ‘만복사저포기’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금오신화’를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만 말하는 것은 조금은 아쉬운 해석이다.
가만히 이야기들을 겹쳐놓고 보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것,
그렇게 원한을 풀고 화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라는 절에서 ‘저포’ 놀이를 하는 이야기다. ‘저포’는 중국의 ‘윷’과 같은 도구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 양생은 만복사에서 적적한 나머지 혼잣말로 부처님께 일종의 내기 시합을 하자고 한다. 양생 혼자서 일인이역을 해가며 저포를 순서대로 던지면서 시합을 하는데 양생의 패가 좋아 이기게 된다. 그러자 양생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한다. 이 싱거운 놀이 이후 신기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며칠 뒤 만복사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난 것. 양생은 이 여성과 연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성은 임진왜란 때 왜구의 침략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었던 것. 이승에 나와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한이 돼 구천을 헤매면서 이승에서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도락과 풍류를 즐기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후 죽었지만 죽지 못한 자, 살았지만 제대로 살아 있지 못한 자가 만복사에서 인연을 만들어 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는 은주발 한 벌을 주며 다음 날 어느 곳에 가 있어 달라고 한다. 아가씨의 부모는 딸의 무덤 속에 있던 은주발을 누군가 들고 있자 놀라지만 양생에게서 전후 사정을 듣고서 치르지 못했던 장례를 하자고 한다. 그날 밤 양생은 아가씨와 다시 만나 이별을 고한 뒤 처자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게 된다.

이처럼 ‘금오신화’ 속에는 죽었지만 죽지 못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략과 약탈에 희생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다. 죽었지만 죽을 수 없어 떠도는 사람들, 나라의 참변을 그대로 각인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산 자와 만나 사랑을 하며 원한을 푼 뒤 다시 저승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금오신화’를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만 말하는 것은 조금은 아쉬운 해석이다. 가만히 이야기들을 겹쳐놓고 보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것, 그렇게 원한을 풀고 화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에게 사랑조차 부차적으로 보인다. 이들에게 사랑은 만남의 이유가 아니라 그 결과다. 살아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자와 죽어도 죽지 못하는 자가 만나 위로하는 일이 더 지극한 것이다.

‘이생규장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담 너머로 서로를 엿보며 사랑하던 이생과 최랑이 결국 홍건적의 난으로 헤어지게 되고 최랑이 죽자 이들은 끝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만나게 된다. 결국엔 다시 만나 회포를 푼 후 장사 지내게 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추모하는 마음 그대에게 닿기를’ 기도하며, 흩어진 시신을 모아 햇빛과 바람이 머물지 않는 곳에 잘 묻어준다. 이렇게 추모하고 기리는 행위에 대해 ‘금오신화’의 한 편인 ‘남염부주지’에서는 음양의 조화를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선비의 덕이란, 음양의 조화가 시종 함께해 천지자연의 움츠러듦을 막는 것, 만물의 이치를 한 가지로 모으는 일이라는 깨우침이다.

‘금오신화’ 속 새로움이란, 사방팔방 흩어져 있던 묻히지 못하는 죽은 자를 묻어주는 것, 그렇게 그들의 원혼을 기리는 일이다. 이는 산 자의 마음속에 있던 자취들을 다독여서 만물의 근본 이치를 하나로 통하게 하는 일이다. “내 마음의 붉은 피”를 말하던 충신들의 죽음 이후 김시습이 했던 일, 그렇게 장사 지내는 일과 한 가지다. 그 마음이 결국 핏빛 상흔으로 각인된 조선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신(神)’의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