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인’의 자리, 이병률
‘끌림’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이 가능한 사람. 평범하기 그지없는 ‘끌림’이란 단어가 대한민국의 대표 감성 언어가 됐듯 일상 언어들은 그에게로 간 순간, 시가 돼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름 속에 이미 ‘노래(률)’를 품은 시인 이병률. 3년여 만에 내놓은 신작 ‘눈사람 여관’으로 독자들 마음에 눈처럼 내려앉고 있는 그를 만났다. 그와 마주앉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떤 물리적 시간의 문제를 말함이 아니라 그의 글, 그의 언어들에 대해 특정의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객관적 대화를 끌어갈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 앞선 탓이다. 그의 글 하나에 수만 가지 생각과 추억을 곱씹고 문장을 끼적이고 훌쩍 여행을 떠난 경험이 있는 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이렇게 정리했다. 시인이자 여행작가이자 한때는 섬세한 언어로 청춘들의 저 깊은 심연을 어지럽히던 라디오 방송 작가였던 그에게 어디 감성적으로 빚지지 않은 이 있을까.3년 터울 네 번째 시집, 여전한 ‘여백’의 미
좋다. 설령 그의 글 팬이 아니라 하더라도 3년 여간 써내려간 60여 편의 시는 충분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으니, 지난날이 아닌 현재로서도 시인 이병률은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감이다. 그것이 이병률의 시가 가진 힘일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만이 아니라 읽는 이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무수한 여백을 가진 시. 각설하고, 최대한 객관적 질문으로 시작했다.
네 번째 시집입니다. 모두 3년 터울인데요. 우연인가요, 의도인가요.
“의도입니다. 제가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같은 동인이자 많은 면에서 모범이 되는 나희덕 시인이 전에 그런 말을 했어요. 3년에 한 번씩 시집을 내야 시인으로 사는 거라고. 그래서 그 기조를 가지고 살자, 했습니다. 나누기 하면 한 달에 두 편 정도의 시를 쓰면서 살아야 하는 건데, 생활인이기는 해도 그런 기준이 중요하겠단 생각을 했어요. 사실 직업을 갖고 있다면 그로 인해 생활이 지치는 게 분명 있어서 리듬을 가져가기 힘든 게 있어요. 게다가 3년 안에 슬럼프도 몇 번은 오니 그것까지 감안하면 3년을 지키기 쉽지 않죠.”
그럼 스스로에게 대견함이 있겠어요.
“그렇지도 않아요. 시 쓰는 게 저에게 가장 중요하고 제일 살 맛 나는 일인 걸요. 독신의 삶을 사는 것도 시를 지키고, 그래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라이프이기도 하고요.”
1967년생.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일곱. 가끔 그의 시에, 글에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이 등장하지만 말했듯 그는 ‘혼자’의 삶이다. 그게 시를 쓰기 위해 선택한 삶이었다니 그에게 시가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네 번째 시집에 대한 남다른 소회가 있나요.
“초기의 시들은 제가 본 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여러 장치를 쓴 적이 있어요.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듯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덧칠’을 하기도 했었다면 갈수록 점점 태도가 순해져요. 나이가 가져다주는 ‘욕심의 배제’랄까. 그러면서 좀 더 선명해졌죠. 에둘러 말하지 않으려는 강단도 생겼고. 어떤 면에선 또 다음이 기대되는 시점이기도 해요. 3년이면 내가 살아온 시기를 정리하는 것이고, 실제로 책상을 바꾸는 것까진 아니지만, 책상을 바꾸는 것 같은 느낌이 있죠. 이제 또 새로운 시들을 써야 하는데, 항상 시집을 낸 후 바로 써야 하니 전략적인 변신이나 모토, 방향 등을 정하지 않는 것도 제 특성인 것 같아요.”
인터넷 ‘작가 소개’ 부분에 몇 년째 같은 내용이 있더군요. 요약하자면 ‘사람 냄새를 참지 못해 자주 먼 길을 떠나고, 전기의 힘으로 작동하는 사물에 약하고, 한번 몸속에 들어온 지방이 빠져나가지 않는 체질로 인해 자주 굶으면 또한 폭식하고, 술 마시지 않는 사람과는 친해지지 않는다’ 등등인데, 궁금했습니다. 이 중에 달라진 건 없을까 하고.
“글쎄요,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사람이 여전히 내 중심에 있죠. 그래서 오히려 사람을 만나지 않고 무기물처럼 드라이한 삶도 선택적으론 하고 싶었지만, 그게 안 돼요. 다만 하나,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아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변화라면 변화겠네요. 어느 날 ‘왜 이렇게 안 들썩일까. 안정적일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전엔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했고, 어쩐지 여기와 모든 걸 단절하고 떠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은 가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어요. 고요해지는 거죠.”
나이 듦과도 상관이 있는 변화일까요.
“그렇죠. 나이 듦이 조금씩 다가오더군요. ‘그동안 정신없었으니 이제 나하고 있어보자’라고 고요가 그러는 것 같아요. 시집을 내고도 안 해야 하는 건 안 해요. 이를 테면 인터뷰 같은 것 말이죠. 그럴 땐 지방에 내려와 있다는 게 무기예요. 지방에 내려가 혼자 여관방에서 안 먹어도 되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삶이 좋아요.”
스스로 선택한 삶에 만족하세요.
“너무 행복해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행복한 게 다예요. 그래서, 이 삶이 행복해서 타인에게 미안할 때가 많아요. 여러 ‘관계’ 속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니까요.”
‘끌림’으로 시작된 이병률스럽다는 것
‘끌림’을 빼놓고 이병률을 설명할 순 없다. 지난 2005년 펴낸 여행 산문집 ‘끌림’은 여러 면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50만 부 이상이 팔리며 지금도 여전히 스테디셀러 목록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고, 많은 이들의 감성에 불을 지폈다. 정보 일색으로 채워지던 여행 서적들이 ‘끌림’ 전과 후로 확연히 나뉘어 이제는 감성 여행 에세이가 주를 이룬다. ‘끌림’으로 그에게 ‘끌린’ 독자들은 ‘이병률’이라는 이름 석 자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믿고 보는 작가’라는 수식어를 끝내 불편하고 부담스러워했으며 심지어 ‘거부’했다. “부담도 제로, 책임도 제로로 가고 싶다. 그 수식어에 기댄다면 똑같은 걸 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새로운 걸 저지르고 싶다”는 게 ‘거부의 변’이었다. 이병률스러웠다. 이병률스럽다는 건 뭘까요.
“음, 나는 그저 꾸물꾸물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색깔로 드러나는 것? 아마 이병률스러운 무언가가 있긴 하겠죠. 다른 건 모르겠고 ‘끌림’의 그 이병률스러움이 많은 사람들을 꿈틀거리게 해서 신난 건 있어요. ‘이렇게 해도 사람들이 좋아하고 책이 팔리는구나’라는 생각들을 하게 됐고 그 덕분에 많은 신인들에게 기회가 가고 글 쓰는 행복을 가져갔죠. 열심 또는 재능만 갖고 살기엔 힘든데, 숨 쉴 장이 마련됐다는 점에서는 보람이 있어요.”
이번 시집 제목 ‘눈사람 여관’도 참 이병률스럽습니다. 하고 많은 작품 중 ‘눈사람 여관’이었던 이유가 있습니까.
“저를 잘 담아내는 게 좋은 제목일 텐데, 실은 ‘세상의 나머지’가 원래 제목이었어요. ‘세상의 나머지’는 제가 시인으로서 코를 좀 높여서 내 문학세계를 드러낸 것 같은 시인데, 그러다 보니 화장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도 양보할 수 없을 것 같아 힘 좀 주면 어떠나 싶었는데, 결국 나다운 것으로 돌아왔죠. 눈을 너무나 광적으로 좋아하거든요. 제가 어릴 때 눈이 많이 내리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또 약간의 결벽증도 있어요. 하나 더, 떠돌다가 낯선 여관방에 들어가 잠으로 보충하고 다시 걷고 기차를 타고 했던 게 나다웠던 거죠.”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로 시작하는 ‘눈사람 여관’은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설명했다. ‘눈사람’은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고, 할 말이 있는 대상이기도 하고, 나를 포함한 존재라고. 설명이 아니었더라도 ‘눈사람’은 읽는 사람 각자에게 다른 의미였을 게다. 알 것 같은데 잘 모르겠고, 이게 맞나 싶었는데 또 아닌 것 같고, 이병률의 시는 그렇습니다.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나 할까요.
“시란 꼭 답이 있는 게 아니죠. 내 식으로 이해하면 시가 더 좋아지고, 나랑 접착되는 게 있는 겁니다. 제 시는 강요가 없어요. 제가 대화하는 방식도 ‘강요’가 아니라 안개처럼 어슴푸레한 무언가 같아요. 남자답지 않은 말을 구사하는 거죠. 그래서 제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 중에 전공 수업이 아닌 교양 강의로 듣는 학생들은 아예 펜 놓고 저를 특이하게 바라볼 때도 많아요.(웃음) 시를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좋다’라고 느끼는 게 독자의 몫 아닐까요. 돌과 돌이 부딪쳐 불꽃이 튀는 것처럼 전혀 다른 해석이라고 해도 그게 예술의 접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출판사 대표도 겸하고 있죠. 어떻게 시작했나요.
“제안이 새로웠어요. 저는 언제든 새로운 일에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인데 문학동네 보스가 책 만드는 일이 무척 재밌다고 하더군요. 저 스스로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죠. 물론 쉽지 않을 거란 공포도 있었고, 그래서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막상 승낙을 하고 들어가 보니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이 많아 정말 좋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제 브랜드를 내야 하는 시기가 왔고 독립하게 된 겁니다. 세상에 얼마나 소극적이었으면 출판사 이름이 ‘달’이었겠어요.(웃음) 제가 읽고 싶고 기쁜 책만 작업해요. 디자인도 제목도 모두 관여하면서 공방의 주인 같은 성격이에요. 그 사이 가끔 베스트셀러도 나오고, 벌써 7년이 됐네요.”
롤 모델이 있으세요.
“마종기 시인이에요. 의사이기도 하고 등단 후 40년이 넘게 외국에서 살면서 충분히 패러다임이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한 번도 저버리지 않고 줄곧 사람을 노래했어요. 그분은 제게 아버지 같고, 삼촌 같고 정말 소중한 베스트 프렌드 같은 존재입니다.”
이병률 시인의 ‘사람에 대한 시선’은 혹 달라진 게 있습니까.
“이번 시집을 펴내면서 ‘왜 나는 계속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많이 가졌고 그걸 다 지우려고 했어요. 일부러 그런 시들을 다 빼버렸는데도 역시 모두 사람에 관한 시들이 남더군요. ‘나는 어쩔 수 없구나. 버리려고 하지 말고 뛰어넘지 말고 그냥 살자’ 했습니다. 탈고를 하고 다시 시를 써야 하는 계절이 왔지만 여전히 ‘사람’을 데리고 살살 한번 가보자 하는 마음이에요.”
1967년생이시죠. 많이 왔지만 또 많이 가야 하는 나이인데, 삶의 속도가 어떤가요.
“아직까진 속도감이 느껴집니다. 속도감이 느껴져 그 힘으로 살아지는 것도 있어요. 제가 바라보는 쪽은, 안전한 것은 바라지 않아요. 위험한 인간관계라고 할까. 인간 안에 여러 겹이 있고 여러 면이 있는데, 최근 알게 된 건 사람 안에 굉장히 무서운 게 많더라는 겁니다. 비벼서, 비비는 것으로 철철 깨져 고름이 나는, 그런 관계로 들어갈 겁니다.”
선언인가요.
“선언입니다.”
시집 첫머리 ‘삶과 죄를 비벼 먹을 것이다. 세월이 나의 뺨을 후려치더라도 나는 건달이며 전속 시인으로 있을 것이다’라는 ‘시인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으로 하여 또 3년 뒤 그의 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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