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국제 노인 인권단체 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이 발표한 ‘글로벌 에이지와치 지수 2013’ 보고서에 나타난 조사 결과다. 전 세계 노인들의 삶의 질과 복지 수준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지수에서 한국은 꼴지 성적표를 받아 든 것이다. 고령화 사회에 노인들이 보다 오래 일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점진적 은퇴’를 고민해야 한다. 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이 공개한 이 지수는 각국의 노인 복지 수준을 소득, 건강, 고용·교육, 사회적 자립·자유 등 네 가지 분야로 나눠서 평가했다. 우리나라는 건강 분야에서는 8위로 상위권에 속했지만, 고용·교육 분야 19위, 사회적 자립·자유 분야 35위, 소득 분야 90위로 종합 순위는 67위에 그쳤다. 소득 분야 복지가 꼴찌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게 특히 문제였다. 사실 이번 지수처럼 국제 비교를 통해서 국가 간 순위를 매기는 조사의 경우, 각국 데이터의 신뢰도 등을 감안하면, 평가의 정확성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소득 분야 복지가 외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은 한국이 뛰어난 경제성장에도 노인 복지 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는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최하위 수준에 그친 것은 국민연금이 비교적 늦게 도입돼 노인층 빈곤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되는데, 국민연금뿐 아니라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 등 노후 생활을 위한 3층 연금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어르신들이 많기 때문에 소득 분야 복지 수준이 낮게 평가됐다.
수명 길어진 고령층, 37% “일하며 존재감 확인하고파”
50대 베이비붐 세대의 사정은 어떠한가. 물론 베이비붐 세대는 현재의 노인들보다는 노후 준비를 충실하게 했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생 100세 시대’다. 현재의 노인들보다 평균 수명이 10년 이상 길어진다는 얘기다. 늘어난 노후 기간을 생각하면 베이비붐 세대의 소득 분야 복지 수준도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좀 더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다. 소득 활동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노후의 소득 분야 복지 수준도 높아질 테니 말이다. 고령층(55∼79세)도 이런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르면, 고령층 인구 중 장래에 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의 비중은 2005년 이후 60%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변동 폭이 1∼2%포인트로 작기는 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2008년)까지는 감소하다가 금융 위기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 비중이 다시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남성이 여성에 비해 경제활동에 대한 니즈가 강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일하려는 이유가 꼭 돈벌이를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령층 인구 중 장래 취업 희망자들의 취업 동기를 살펴보면 ‘생활비에 보탬(돈이 필요해서)’이라는 응답이 54.8%를 차지하고, ‘일하는 즐거움 때문에(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하고 싶어서)’가 36.9%에 달했다. 성별로는 ‘일하는 즐거움 때문에’가 여성은 32%인 데 비해 남성은 40.5%를 차지했다. 고령층 남성에게 일은 경제적 목적 외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은퇴 개념부터 다시 생각…점진적 은퇴 주목
이런 이유들로 좀 더 오랫동안 일을 해야겠다면 우선, 은퇴의 개념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은퇴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여기서는 국내 은퇴 관련 연구들이 자주 사용하는 한국 노동패널자료의 정의를 소개한다. 노동패널자료에 따르면, 은퇴는 ‘본격적인 소득활동을 그만두고 일을 하지 않고 있거나 소일거리 정도의 일을 하고 있는 경우, 또한 앞으로도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소일거리 정도의 일 이외의 일을 할 의사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은퇴 상태로 가는 경로를 매우 단순하게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은퇴와 비은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단 한 번의 전환 과정(직장인의 경우 정년퇴직·명예퇴직 등)을 거쳐 생애직업(career job: 근로자가 평생 동안 종사해온 주된 일자리)에서 영구적으로 이탈하는 것을 은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식을 가리켜 ‘전통적 은퇴(traditional retirement)’라고 한다.
하지만 은퇴 과정이 다양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점진적 은퇴(gradual retirement)’라는 개념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생애직업에서 시간제 근무를 하거나 새로운 연결직업(bridge job)을 거쳐 점진적으로 은퇴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연결직업은 생애직업에서 벗어난 뒤 완전히 은퇴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연결해주는 직업으로, 사람에 따라 한 개이거나 여러 개가 될 수 있다. 또 연결직업이 생애직업과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일일 수도 있다. 국민연금연구원의 국민노후보장 패널자료를 이용해 전통적 은퇴자와 점진적 은퇴자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 은퇴자는 생애직업에서 31.3년을 근속한 데 비해 점진적 은퇴자는 생애직업(22.8년)과 연결직업(7.1년)을 합친 총 근속연수가 29.8년으로 나타났다. 점진적 은퇴자가 전통적 은퇴자보다 더 오랜 기간 일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결과다. 이는 생애직업이 예상보다 일찍 중단되면서 점진적 은퇴를 계획적으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점진적 은퇴를 통해 좀 더 오랫동안 일하면서 노후 소득을 보충하고, 일하는 즐거움도 맛보려면 자신에게 맞는 점진적 은퇴를 위한 준비를 미리미리 해야 한다. 이와 관련, 협동조합을 점진적 은퇴를 위한 방법으로 고려해볼 만하다. 지난해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5명 이상만 모이면 금융과 보험업을 제외한 어떤 분야에서든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됐다. 협동조합은 비영리단체(NPO)와 달리, 영리활동이 가능하므로 뜻이 맞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운영할 경우 전일제 직장에 비해 각자의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소득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 은퇴에 제격이다. 사회적으로는 예비퇴직자를 위한 재취업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보급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이런 교육은 점진적 은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장경영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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