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상속, 자산 지켜줄 동아줄은?
최근 일본에서는 은퇴 준비의 한 수단으로 신탁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고 난 이후,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자산을 꾸준히 관리할 수 있는 신탁 상품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금융기관도 근래 일본을 벤치마킹해 자산관리와 상속을 위한
여러 가지 신탁 상품을 앞다퉈 출시하고 있다. 신탁의 장점과 활용법을 눈여겨볼 시점이다. 신탁이란 일정한 목적에 따라 자산의 관리와 처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을 말한다. 보다 쉽게 말하면 재산에 대한 명의를 타인으로 바꾸고, 그 타인에 의해 재산을 관리하고 처분하는 법제도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자산관리 능력을 가진 금융기관에 자산을 맡겨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나중에는 그 자산을 자녀나 손주 혹은 공익단체 등 원하는 곳으로 이전할 수 있는 종합적인 자산관리 서비스다.
신탁은 목적, 형태, 신탁 재산의 종류, 수탁자나 위탁자의 유형 등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우리나라 자본시장법은 신탁을 금융 상품의 일종으로 보고 있으며, 신탁 재산 종류별로 금전 신탁, 증권 신탁, 동산 신탁, 부동산 신탁 등으로 구분된다.
신탁의 장점 중 하나는 전문가를 통한 지속적 재산 관리다. 우리나라나 미국, 일본 모두 재산의 소유권자가 사망하고 법에 따라 상속 절차가 진행되면 그 기간 동안 상속 자산의 처분이나 활용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신탁 자산은 절차 진행과 상관없이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관리가 가능하며, 재산을 맡긴 사람의 의사에 따라 재산이 승계된다. 단, 우리나라나 일본은 민법상 유류분 제도에 따른 상속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또 신탁 재산으로 설정한 부분은 채권자로부터의 압류나 개인파산 등으로부터 보호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도 신탁을 활용했다는 사실이 최근 보도된 바 있다.
무엇보다 신탁은 상속인 또는 후견인 간 발생하는 복잡한 재산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일례로, 일본에서는 자녀가 없는 자산가가 본인의 자산을 배우자가 홀로 독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탁 자산을 받는 수익자로 누이를 정해 자산을 분배한 사례가 있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자녀가 부모 사망 후에도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부모의 자산을 신탁으로 설정하고 자녀가 이를 정기적으로 배당받아 살게 한 경우도 있다. 미국에서는 어느 자산가가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녀들보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에게 더 많은 자산을 상속하기 위해 신탁을 활용한 사례가 유명하다.
특히, 일본에는 ‘후견제도지원신탁’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가정법원의 지침에 따라 신탁된 금전을 피후견인의 생활비용, 의료비용, 임시충당 비용 등에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고령화에 따라 후견인, 피후견인 모두 고령자가 되면서 자산관리가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후견제도지원신탁은 점차 활용이 늘어날 전망이다.
월턴家, 신탁 활용해 최소 증여세로 자산 승계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특정금전신탁(MMT), 주가연계증권(ELS)과 같은 금전 신탁이나 부동산 신탁을 중심으로 ‘자산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의 신탁 상품을 많이 활용해 왔다. 그러나 2012년 신탁법 개정 이후 최근에는 일본이나 미국과 같이 ‘자산을 승계’하기 위한 신탁 상품을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상품으로는 유언 신탁, 유언 대용 신탁, 수익자 연속 신탁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유언 신탁은 ‘유언’으로 신탁 재산을 설정하고, 위탁자가 사망하면 유언에 적힌 바에 따라 재산을 관리·처분하는 신탁을 말한다. 반면, 유언 대용 신탁은 신탁을 먼저 설정하고 재산을 관리하다가 위탁자가 사망하면 신탁 재산을 상속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유언 대용 신탁을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재산 관리 능력이 없는 아들이 재산을 탕진해 손주의 보육 및 교육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 손주 앞으로 신탁을 설정한 경우가 있다.
유언 신탁은 유언장의 작성, 보관과 유언 이행에 각각의 수수료가 부과되며, 유언 대용 신탁은 신탁 재산 관리와 재산 이전에 수수료가 부과된다. 각 금융기관에서 출시한 상품별로 수수료와 최저 가입 금액 등에 차이가 있지만, 일본의 유사 신탁 상품에 비하면 현재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신탁 상품 수수료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따라서 체계적인 자산관리와 승계를 원하는 자산가라면 한번쯤 고려해 볼 만하다.
마지막으로, 수익자 연속 신탁은 위탁자가 수익자를 1명 이상으로 정해 여러 수익자에게 연속적으로 재산이 이전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부모가 자녀를 제1수익자로, 손주를 제2수익자로 정해 자산을 이전할 경우, 제1수익자인 자녀가 사망했을 때 자동적으로 제2수익자인 손주에게 자산이 이전된다. 부모나 배우자의 사후 문제로 고민한다면 위탁자가 원하는 방법에 따라 자산을 이전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상품이다. 물론, 신탁을 활용해 자산을 승계하더라도 상속세, 증여세 등에는 별도의 세제 혜택이 없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신탁에 세제 혜택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신탁 상품은 미국의 신탁 제도와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은 취소 불가능한 신탁(irrevocable trust) 자산을 상속 재산에서 제외시켜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또한 증여세를 증여자가 증여하는 시점에 납부하기 때문에 미리 증여세를 납부한 후 신탁 자산을 증식시켜 자녀에게 이전하기도 한다. 월마트(Walmart)의 주인인 월턴(Walton)가 또한 신탁을 이용해 최소한의 증여세로 자산을 증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미국의 자산가 중에는 증여세 혜택이 없는 기부 신탁을 이용해 자녀에게 자산을 승계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자녀에게 올바른 자금 사용 방법과 기부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기부 신탁을 장려하기 위해 ‘공익신탁법(안)’을 마련하는 등 새로운 신탁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익신탁법이 제정되면 지금보다 간편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재산을 공익 목적으로 활용하도록 신탁할 수 있게 된다. 기부금 세제 혜택이 점차 줄면서 공익 신탁이 앞으로 얼마나 활용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신탁은 단순한 자산 증식을 넘어 올바른 자산관리 능력과 나눔 문화를 양성하는 수단으로 바라볼 때 더 큰 의미가 있다.
황신정 삼성생명 보험금융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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