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준 호텔 프리마 사장
이상준 호텔 프리마 사장은 컬렉터들 사이에서도 단연 ‘고수’로 통한다.35년 컬렉션 역사에 3000여 점 소장이라는 물리적 숫자만 봐도 대단하지만, 높은 안목과 감각, 아트 경영으로 이어지는 탁월함이 그 배경이다. 이 모든 결과물 뒤에는 ‘끌림의 미학’이 있다. 그리고 그 끌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호텔 프리마. 본관 로비를 거쳐 인근에 위치한 이상준 사장의 집무실까지 이동하는 동안 끊임없이 예술품들과 마주쳤다. 사우나 입구 한쪽에는 조선시대 자기들이 고풍을 더하고 있었고, 3층 레스토랑 입구에는 마이센 도자기들이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유명한 호텔 프리마 뮤지엄은 말할 것도 없다. 복도 곳곳은 물론 심지어 인근의 한식당에도 ‘설마 진짜일까’ 의심케 할 정도의 대작이 걸려 있다. 객실마다 걸려 있는 작품들까지 호텔에는 대략 1000여 점의 미술품이 진열돼 있다. 이쯤 되면 호텔 프리마는 단순한 호텔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다. 호텔 본연의 편안한 휴식처 기능에 예술품이 주는 위안과 기쁨까지 더해졌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 몸과 마음이 함께 쉬어가는 공간으로서의 호텔을 지향하는 이 사장의 경영철학이 낳은 결과다.
15억 원 달항아리 낙찰,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명의식
이 사장의 집무실 풍경은 예상대로였다. 고미술에서부터 산수화, 현대화, 사진에 이르기까지 벽면을 가득 메운 미술품들로 눈이 즐거웠다. 한눈에 누구의 것인지 알 만한 작품도 있었고, 낯설지만 느낌이 강렬한 작품도 있었다. 이는 인터뷰 내내 그가 강조한 ‘끌림의 미학’이라는 말로 충분히 설명되는 부분.
집무실 안쪽에 마련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수많은 미술품과 자료집들 사이에 드디어 ‘달항아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지난 2007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무려 127만2000달러, 우리 돈 15억 원 상당에 낙찰받은 달항아리는 18세기 조선 영조 때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조선 500년을 통틀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한 대표적인 문화재다. 그 가치도 가치지만, 외국에 있던 우리의 문화재를 국내로 돌아오게 했다는 점에서 이 사장의 문화재 사랑이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내외 수많은 언론과 일반인들이 달항아리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으니, 호텔 프리마의 정체성을 알리기엔 충분했다. 호텔 내 뮤지엄을 오픈한 것도 그 즈음이다.
사실 호텔 프리마는 청담동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그다지 눈길 끄는 곳은 아니었다. 이름값 화려한 외국 호텔 브랜드와 경쟁하기엔 ‘프리마’라는 토종 브랜드의 힘이 약했다. 그러나 지난 1999년 1월 이 사장의 취임 이후 눈에 띄는 변화들이 시작됐다. 당시 60억 원대였던 연매출이 300억 원대가 됐다는 사실은 호텔 프리마의 급성장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그때까지 개인 컬렉터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이후 컬렉션과 호텔의 조합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컬렉션 역사도 절정을 맞았다.
호텔 프리마 사장으로 취임하신 지 벌써 14년이 넘었습니다. 엄청난 성장세가 대단한 이슈를 모으기도 했었는데요. 돌아보면 어떠신가요.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느껴요. 여기 올 때는 총각 같다는 소리를 들었는데.(웃음) 기업은 사이클이 있는 것 같아요. 하이(high)가 있고 로(low)가 있죠. 우리가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고, 그런 면에선 최고경영자(CEO)의 진단 능력이 필요해요. 마스터플랜을 갖고 끊임없는 혁신으로 거듭나야죠.”
그런 면에서 호텔 프리마는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지 않았나요.
“이미지를 바꾼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고객이 와서 감동이나 끌림을 받게 하는 키워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뭘까’ 그게 우리의 숙제였죠. 리서치를 해보니 몇 가지 의미 있는 내용들이 나오더군요. 결국 여성들이 선호하는 호텔을 만들어보기로 하고 뮤지엄 속의 호텔, 호텔 속의 뮤지엄을 콘셉트로 잡았어요. 러브 호텔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재밌었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있게 된 겁니다.” ‘예술과 문화가 함께 하는 호텔 프리마’라는 콘셉트는 전적으로 이 사장님의 컬렉션과 아트 감각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요.
“유럽의 부티크 호텔에 가면 설립 당시부터 걸어놓은 그 시대의 그림들이 아직 그 자리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감동할 때가 많았어요. 역사가 오랜 호텔들은 접시 하나, 포크 하나에도 전통이 있는 겁니다. 그들은 호텔의 의자와 비품까지도 지키면서 그 자체로 즐긴다고 해요. 컨템퍼러리였던 것들이 앤티크가 돼가는 과정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런 콘셉트의 호텔이 전혀 없었죠. 그걸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다만 인테리어와 아트 중 어디에 집중할까를 고민하다가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아트 콘셉트로 결정한 거예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술 작품을 살 때 ‘목적’을 생각하는 편이에요. 단순한 끌림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떻게 전시하고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부터 생각하죠. 아트 콘셉트의 호텔을 운영하면서는 그림 하나를 사면서도 호텔의 어느 위치에 어떤 계절에 걸어둘지를 고민하게 됐어요.”
아트와 호텔의 조합에 대해 고객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고객은 의외로 사소한 일에 감동을 받아요. 그 사소한 일로 다시 찾고 싶은 호텔인지 아닌지가 결정되죠. 호텔 프리마에 오면 육체와 정신을 다 힐링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원래 호텔(hotel)과 병원(hospital)은 어원이 같아요. 시스템도 상당히 유사하죠. 그래서 전 늘 직원들에게 ‘우리는 의사이고 간호사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지쳐 있는 고객들이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의 역할인 거죠. 원기 회복에는 예술 작품들이 주는 좋은 에너지, 정신적 위안이 한몫하고 있고요.”
실제로 달항아리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었죠.
“당시 15억 원에 달하는 경비가 들었지만 실질적으로 영업적인 효과나 수익성 등 손익 계산을 해보면 그에 준하는 가치를 했다고 생각해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엄청난 관심을 가졌으니까요. 어떤 분은 국가도 못하는 일을 했다며 존경한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는데, 그런 칭찬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보람이 컸죠. 사실 달항아리를 들여올 때까지만 해도 약탈된 문화재를 회수해야겠다는 공명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자주 가는데 그곳에 우리의 좋은 문화재들이 정말 많거든요. 근대사를 보더라도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갔다고 나오잖아요. 그래서 돈을 버는 대로 문화재를 환수해오는 데 소명의식을 가졌었어요. 좀 무리했었죠.”
내 안의 미감을 키운 건 시골 벽지 고향의 산하
이 사장은 컬렉터들 사이에서도 고수로 손꼽히는 컬렉터다. 35년이라는 컬렉션 역사, 무려 3000여 점의 소장품 등 물리적 숫자로도 이미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안목은 늘 회자된다. 실제로 그 자신도 “내가 지목하는 작품마다 경매 최고가로 판매됐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이쯤 되면 그는 이미 개인 컬렉터의 의미를 넘어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35년 전에 컬렉션을 시작하셨다죠. 계기가 따로 있나요.
“그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제 대답은 늘 관심과 열정, 그리고 취향이라는 말로 귀결됩니다. 다만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느냐 물으면 ‘산하(山下)’를 이야기해요. 태생적 DNA라고 해야 할까요. 제 고향이 경남 함양입니다. 시골 벽지인데,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우리 산수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바로 그곳에서 살았으니 환경이 너무 좋았던 거죠. 그로 인해 제 안에 감성적 미감이 상당히 쌓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생활 속에서 갖고 있던 미감이 어느 날 미술품을 보다가 끌림의 감정으로 표출된 거죠. 많은 사람들이 제게 ‘안목이 높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그저 자연이 주는 심연,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끌림의 강도가 늘 같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끌림이란 건 수학적 공식이 없는 거예요. 내재된 감성에 맡겨놓을 뿐이죠.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분들에게 끌림이란 결국 취향의 문제인데, 자꾸 보다 보면 처음엔 ‘이발소 그림’을 좋아했던 분들도 어느 순간 미학에 눈을 뜨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끌림이 진보되는 과정이죠.”
이 사장님은 끌림이 어떻게 진보했나요.
“저는 처음에 산 수석으로 시작했어요.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죠. 그래도 수석 중에서도 수산 문양이 있는 산 수석을 최고로 쳐줬어요. 그러다 산수화에 빠져들었고 거기서 또 한 단계 점프해 서양화로 추상화로 갔다가 다시 도자기로 진보했죠. 아름다움, 미에 대한 추구는 끝이 없어요.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재창출될 뿐이죠. 또 하나, 예전에 좋았던 것은 지금 봐도 변함없이 좋아요. 저는 그걸 ‘끌림의 미학’이라고 표현하는데, 말로는 설명이 잘 안 되는 형이상학적인 상태예요. 그래서 저는 어딜 가면 작품에 대해 평가하지 않아요. 그 사람의 취향이 그렇구나 하고 혼자만 알면 되는 거예요. 설령 ‘이발소 그림’을 걸어놓고도 내가 좋으면 그뿐인 거지 그 사람의 취향이 나와 같을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3000여 점을 소장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웬만한 유명 작가의 작품은 다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보관돼 있나요.
“코드화 작업을 다 해서 기록해뒀는데, 1000여 점은 호텔 곳곳에 걸려있고 나머지도 주기별로 교체를 하죠. 유명 작가의 작품도 많지만 몇십만 원짜리, 또는 미대 재학 중인 학생들의 작품까지 다양해요. 심지어 작가 이름도 모르고 사는 경우도 있어요. 힘들 때 치유가 되고 영감을 얻기도 하고 혹은 에너지를 주는 작품들은 작가, 가격에 상관없이 역시나 끌림에 의해 사는 거죠.”
자산으로 따지면 가치가 어마어마하겠군요.
“정신적인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죠. 물론 경제적 논리를 배제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말하는 재테크에는 컬렉션도 들어가지만 부동산이나 주식 등이 가질 수 없는 멘탈적 가치가 상당히 내포돼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가장 비싸다는 150만 원짜리 주식 10주를 액자에 넣으면 1500만 원짜리 아트가 되겠습니까. 내게 에너지를 주는 1500만 원짜리 그림을 가격이 같다고 해서 견줄 수는 없는 겁니다.” 재테크로도 나쁘지 않다는 말씀이네요.
“저는 기업하는 사람이잖아요. 당연히 이윤 창출을 해야죠. 전에는 물론 주식투자도 해보고 했는데,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게 아트 컬렉션이에요. 한 예로 제 컬렉터 인생 중에 딱 한 번 네 점의 작품을 팔아본 적이 있어요. 더 좋은 것을 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경매에 내놨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났죠. 네 점의 원가가 1억 원이었는데 1000% 수익률을 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투자였던 셈이에요. 물론 작품 판매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말이죠. 제 원칙은 정신이 풍요로우면 물질도 따라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컬렉션으로 정신이 풍요로워지니 물질이 따라왔나요.
“결과적으로 미술품으로 인해 호텔 경영에도 도움이 됐는데, 개인적으로는 저처럼 월급 털고 연봉 털어 그림을 사면 안 되죠.(웃음) 제가 어디 가서 이야기할 때도 집 팔고 부동산을 팔 정도까지 가면 바람직한 게 아니라고 말해요. 저는 아주 특수한 경우입니다. 사실 사고 싶은 작품을 안 사면 잠을 못 자고 심지어 꿈에도 나오거든요. 그럼 명분을 만들죠. ‘우리 호텔에 걸어두면 되겠다’, ‘다음에 미술관 만들어서 기여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사는 거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용기 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거예요.(웃음)”
그쯤 되면 부인이 동의하기 쉽지 않았겠어요.
“사실 그것 때문에 싸움이 넘쳤는데 지금은 포기했어요. 농담으로 ‘나까지 안 팔아 다행’이라고 말하죠.(웃음)” 개인 컬렉션이 아트 경영으로 확대된 성공 사례인데, 다음 단계는 뭔가요.
“기업가의 입장에서 꿈이 있다면 토종 브랜드를 살려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호텔만이 유독 이 부분이 낙후돼 있어요. 올해 호텔 프리마에서 오픈한 비즈니스호텔 아로파도 역시 토종이에요. 아로파가 잘 돼 모범 사례가 됐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늘 말해왔던 미술관 건립을 실현해야죠. 아직 계획 단계이고 실행 여부는 차근차근 해나갈 겁니다. 간송미술관이 설립자 사후에도 계속 우리나라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후에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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