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대관령 국제음악제 총예술감독 정명화·정경화
8월의 대관령은 전 세계 클래식 마니아들로 북적인다. 해발 700m, 대자연의 품속에서 펼쳐지는 유명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7월 14일부터 8월 6일까지 강원도 대관령 일대에서는 제10회 대관령 국제음악제(이하 대관령음악제)가 열린다. 음악제 총예술감독 정명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정경화 줄리어드 음대 교수는 약간은 생소한 북유럽 음악을 가지고 득의양양하게 돌아왔다.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대중은 아마 ‘뿅 갈 것’이라는 호언장담과 함께. 감독 맡은 후 ‘국제화’가 숙제…유명 연주자 러브콜 잇달아2004년 7월 강원도 대관령에서는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한 국제음악제가 열렸다. 클래식 음악의 불모지였던 한국, 생소한 어느 시골 마을에서 열린 이 음악제에는 겨우 34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석했다. 당시 총 1만676명이 관람했는데, 그중 972명이 외국인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대관령음악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공해 뮤직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했다. 전 세계 클래식 마니아들이 몇 달 전부터 예매를 서두르고, 유명 아티스트들은 먼저 러브콜을 보낸다. 대관령음악제의 위상이 이토록 높아진 데는 ‘클래식 여제’ 정명화(첼리스트), 정경화(바이올리니스트) 예술감독의 공이 크다.
2004년 강효 줄리어드 음대 교수와 세종솔로이스츠를 주축으로 시작된 대관령음악제가 벌써 10돌을 맞았습니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요.
정명화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국내외에 알려져 왔다고 봅니다. 이제는 너무나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유명 예술가 섭외의 경우 2~3년 전부터 물밑작업을 해야 하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선택 범위가 넓어졌죠. 또 유럽에서는 가볼 만한 음악제로 정평이 나있어요. 클래식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몇 달 전부터 예매를 서두릅니다. 정말 뿌듯하지요.
감독을 맡은 이후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무엇입니까.
정명화 국제화였어요. 내실 있는 톱 아티스트들을 데리고 오면 축제의 명성이 높아지죠. 하지만 유명 연주자들을 모시는 데는 부족한 예산은 늘 문제가 됩니다.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펀딩(funding)이 활발해져야 가능한 부분이기도 해요. 또 해를 거듭하며 제대로 된 공연장을 갖추고 싶었는데 콘서트홀(알펜시아 리조트 콘서트홀)까지 만들 수 있어 기쁩니다.
정경화 감독님께서는 3년 전에 합류하셨지요. 2005년 왼손 부상 이후 완벽한 재기에 성공했던 곳도 대관령이었고요.
정명화 초창기 멤버였던 언니가 “대관령에는 모기가 없다”고 나를 설득했어요.(웃음) 모기들이 유난히 내 피를 좋아하거든요. 사실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했어요. 손도 채 낫지 않은 상태였고요. 하지만 언니와 함께 하는 데 의미를 두었지요. 2010년 대관령음악제로 5년 만에 컴백하던 날 기쁨의 눈물이 흘렀어요. 홀린 듯이 연주하고도 아픈 줄 모르고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앙코르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북유럽 음악 “차가우면서도 열정적” 첼로 거장 3인 한자리
제10회 대관령음악제의 주제는 북유럽이다. ‘북구의 빛(Northern Lights)-오로라의 노래’라는 대주제 아래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덴마크 등 북유럽 출신 작곡가들의 작품과 민속음악이 대거 소개된다.
지난 7월 14일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 사샤 마킬라와 함께 생 미셸 스트링스가 그리그의 ‘홀베르그 모음곡’으로 축제의 시작을 알렸으며, 닐슨의 ‘목관 5중주’, 시벨리우스의 ‘즉흥곡 5번과 6번’ 등 북유럽 주요 작곡가의 곡이 고루 선을 보인다. ‘노던 라이츠-오로라의 노래’라는 타이틀부터가 정말 낭만적입니다.
정명화 저는 핀란드에 있었고, 경화는 아이슬란드에서 공부했지요. 기존과 다른 콘셉트를 고민하던 중 북유럽에 머물던 시절 받았던 감동을 떠올렸어요. 실제로 클래식의 본고장은 비엔나라고 하지만 북유럽 사람들도 못잖게 음악을 사랑하지요. 핀란드는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우상처럼 여기는 나라예요.
“나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불교 교리도 많이 읽습니다. 깨달음의 아홉 단계 중 마지막이 ‘무(無)’지요. 나이가 들면서 마음을 비우는 게 목표가 됐습니다.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 그래야 내 연주도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지요.”
정경화 북유럽은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적어 풍요로운 느낌이 있어요. 자연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요. ‘백야’라고 해서 선셋(sun set)이 바다에 내려앉지 않고 아침에 다시 올라와요. 너무 신비롭죠. 반대로 겨울에는 너무 깜깜하고요. 그래서인지 북유럽 사람들은 수줍음이 많은데 빛을 봤을 땐 무척 정열적이죠. 음악 역시 마찬가집니다. 개방적인 측면과 내성적인 면을 고루 가지고 있어요. 시벨리우스 곡을 비롯한 핀란드 음악에서는 자작나무처럼 차가운 풍경과 함께 그곳 사람들의 깊은 감정이 느껴지죠.
듣다 보니 북유럽이 대관령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정명화 맞습니다. 대관령에는 아직 망가지지 않은 땅들도 많지요. 그걸 잘 보존해서 훌륭한 콘서트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는 700m 고지에 위치한 대관령은 ‘해피 700’이라는 애칭도 있어요. 거기서 음악을 들으면 정말 ‘뿅’ 가지 않을 수 없어요. 예술은 육감으로 느끼는 겁니다. 이상적인 세팅에서 신비스러운 음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에요.
7월 25일부터 8월 4일까지 열리는 ‘저명연주가 시리즈’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죠. 특히 게리 호프만, 다비드 게링가스, 지안 왕 등 첼로 거장 3인이 한자리에 모인다니 클래식 마니아들의 기대도 큽니다.
정경화 7월 31일 열리는 특별 갈라 프로그램에서 게리 호프만, 다비드 게링가스, 지안 왕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달아 선사합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하나씩 스페셜 콘서트를 연다고 보시면 돼요. 캐릭터가 너무 다른 세 사람이 ‘음악의 아버지’ 바흐를 달리 해석하는 아주 특별한 콘서트가 될 겁니다.
정경화 감독과 케빈 케너의 듀오 리사이틀이나 정명화 감독의 이영조 세계 초연곡 등 감독들의 무대 역시 화제가 되고 있어요.
정명화 첼로는 한국 곡을 표현하기가 참 좋아요.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현을 튕기는 악기잖아요. 현대적인 감각이 있으면서도 한국 곡을 연주하기 좋죠. 첼로와 김진성의 대금과 설현주의 타악기가 어우러지는 이색 무대를 선보일 거예요. 세계 초연이니 기대해주세요.
정경화 지금이야 환상의 궁합이지만 처음엔 케빈 케너와 잘 맞지 않았어요. 그렇게 당당한 솔로이스트는 처음 봤거든요. 나는 쇼팽 스페셜리스트입니다. 그의 라이브 퍼포먼스 쇼팽 리콜딘 리코딩을 반복해서 들었어요. 순수한 것을 좋아하고 또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싶어 빠져들게 됐죠. 지금은 예순네 살에 하나님이 떨어뜨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잘 맞아요.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가을에는 중국에서 연주할 예정입니다.
절대 놓치면 안 될 공연을 하나씩만 꼽는다면요.
정명화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지요. 사실 프로그램 하나하나를 특별하게 짜놓았거든요. 밸런스가 좋아요. 초연 100주년을 맞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손열음과 김다솔이 투 피아노 버전으로 연주하고요, 첼리스트 3인방의 무대도 유니크하죠. 바이올린, 비올라 협주곡은 굉장히 스페셜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예술가로 살고 싶어요. 첼로를 더 일찍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열한 살 때 너무 좋은 선생님을 만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최고로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있어요.”
천번을 태어나도 연주자 인생 살 것…남은 생은 후학 양성에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 자매’는 1970~80년대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대표 클래식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 이들은 각각 19세, 12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 명문 음악학교인 줄리아드에서 유학했으며, 정명화는 첼로의 거장 피아티고르스키에게, 정경화는 이반 갈리미언에게 음악을 사사했다. 거장 마에스트로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과 함께 ‘정 트리오’를 구성, 남매가 무대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는데, 그 뒤에는 어머니의 음악 사랑과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고 늘 강조해왔다.
2004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정 트리오’가 어머니에게 바친 헌정 공연은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요.
정명화·정경화 당시 어머니께서 여든여섯 되시던 해였습니다. 명훈이가 지휘하고 우리 자매가 첼로와 바이올린을 켰죠. 솔로이스트 셋이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에 어머니가 참 많이 우셨지요. 우리 어머니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음악가적인 기질이 강한 분이에요. 삼촌은 1800년도 말에 러시아에서 음악을 했고, 어머니는 피아노와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어요. 어릴 적부터 가족이 모이면 늘 찬송가 반주를 쳐주셨는데, 한번도 어머니께 왜 음악을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네요.
일평생을 클래식 음악인으로 살아왔고, 세계를 무대 삼아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내셨지요. 돌이켜보면 어떤 인생이었습니까.
정명화 운명은 바로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다시 태어나도 예술가로 살고 싶어요. 첼로를 더 일찍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열한 살 때 너무 좋은 선생님을 만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최고로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있어요. 이제는 돌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경화 백번 태어나도 바이올린을 하고 싶어요. 이 선율은요, 말할 수 없이 신비롭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어릴 때 피아노를 포기했다는 거예요. 피아노의 중요성을 쉰이 넘어서야 깨달았는데 그때 다시 하려니까 체력이 안 되더군요. 다 때가 있는 법이구나 싶었어요.
‘아시아의 암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무대에서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정경화 선생님께서는 손가락 부상으로 긴 시간 휴식을 취해야 했습니다. 평단은 그 이후로 확실히 여유로워졌다는 말을 하더군요.
정경화 많은 분들이 연주에서 인간 내음이 난다고 해요. 나이가 들면서 정신적으로 감화한다고 할까. 나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불교 교리도 많이 읽습니다. 깨달음의 아홉 단계 중 마지막이 ‘무(無)’지요. 나이 들면서 마음을 비우는 게 목표가 됐습니다.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 그래야 내 연주도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지요.
한 분야의 거장으로 세계 정상에 오르고, 또 머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정명화 오래 참음, 인내. 그것이 전부입니다. 인내라는 게 말이 쉽지요. 무슨 일이든 인내심이 없으면 할 수 없어요. 어머님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길러주셨어요. 우리가 좋아하고 원하는 방향을 찾아주었고요, 그것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결국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오래도록 하는 것이 성공, 그리고 행복의 비결 같습니다.
정경화 매일매일 작은 꿈을 꾸고 실천했지요. 그 성실하게 뗀 한 걸음이 큰 미래를 만들어 줬다고 믿어요. 옆에 저만큼 걸어간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비교하는 순간 인생은 불행해지니까요. 또 기회가 생겨 조금 앞섰다고 해서 교만하면 안 되죠. 빨리 가면 더 열심히 채워야 하는 법이에요. 결국 모든 단계를 천천히 꾹꾹 밟는 것만이 진리가 아닐까요.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장소 비앙에트르 02-720-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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