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제주라는 환경 자체가 그랬고, 그의 그림이 주는 따뜻하고도 기분 좋은 느낌이 그랬고, 거기에 ‘10년간 그림 값이 가장 많이 뛴 작가’라는 다소 속물적인 수식어도 그랬다. 설렘으로 시작된 만남은 ‘여백의 미’로 남았다. 알려진 대로 이왈종 화백은 그다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함축된 언어로, 표정으로 때론 말과 말 사이의 침묵으로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는 수 없이 돌리는 발걸음은 아쉽기만 했고, 진심으로 그의 그림이 더욱 좋아졌더랬다.
[ARTIST] ‘서귀포 왈종’ 이왈종 화백 “제주의 꽃과 새가 나를 만들었다”
오락가락하는 제주의 날씨는 그날도 여전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서울과 달리 청명하기만 하던 제주의 하늘은 제주시를 벗어나자마자 짙은 안개와 회색빛 구름을 오갔다. 그렇게 달리기를 1시간, 이미 여러 차례 가본 적이 있는 정방폭포 입구 바로 앞에 목적지가 있었다. 독특한 외관에 관한 사전 정보가 없었다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왈종미술관’은 우아한 자태로 서 있었다. 입구에 서 있는 영국 조각가 앤서니 곰리(Anthony Gormley)의 강철 자소상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그때 모자를 푹 눌러쓴, 영락없는 시골 아저씨인 화백이 일행을 마중하러 나왔다. 미술관 앞으로 펼쳐진, 각종 채소에서 옥수수까지 심어진 텃밭과 어우러져 화백의 모습은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림과 생활의 조합이 화백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고나 할까.

아닌 게 아니라 왈종미술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의 개념을 넘어선다. 미술관이 있던 자리가 원래 화백의 집터였다는 사실도 그렇고, 미술관 3층에 위치한 화백의 작업실 겸 집도 여느 미술관과 다른 지점이다.

이 화백이 사비를 털어 만든 미술관은 그의 고민과 손길이 많이 닿아 있다. 스위스 건축가 다비드 머큘러(David Macculo)와 국내 건축가 한만원이 공동 설계한 조선시대 백자 찻잔을 닮은 건물도 오랜 시간 이 화백이 고민해온 결과물이었다. 그가 워낙 차를 좋아하는 탓도 있겠지만, 제주의 푸른 바다가 넘실대며 찻잔 모양의 건물에 담긴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 구상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 건축이 이뤄진 1년여 동안 그림을 그리는 대신 건축 현장으로 출근해 인부들과 함께 작업을 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다시 말해 왈종미술관은 이 화백의 또 다른 작품인 셈이다. 실제로 왈종미술관 1층 바닥을 밟는 순간부터가 작품의 체험이다. 바닥에 직접 써넣은 ‘일체유심조 심외무법(一切唯心造 心外無法: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고, 마음이 곧 법이다)’이라는 생활신조가 그것.

2층에서 본격 시작되는 전시는 보는 이를 행복하게 했다. 입구에 걸린, 화백의 작품들로 이뤄진 대형 미디어아트에서는 분홍 꽃잎이 끝도 없이 흩날리고 있었고, 제주의 꽃과 풍경, 그리고 생활이 담긴 그림들과 각종 구조물, 그리고 ‘19세 출입금지’ 구역에 전시된 찻잔 속 춘화까지 재밌고 행복한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왈종미술관 외관. 앞으로는 제주 특유의 밭을 그대로 축소한 텃밭이 있다.
왈종미술관 외관. 앞으로는 제주 특유의 밭을 그대로 축소한 텃밭이 있다.
제주살이 24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감상을 뒤로 하고 이 화백의 작업실이 있는 3층에 들어서니 ‘백미’가 따로 있었다. 건물 외벽을 따라 둥글게 처리된 테라스에서 바라본 제주 바다의 풍경은 이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섰다. 그가 제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1979년부터 추계예술대 교수로 재직했던 이 화백은 1990년 교수직도 내놓고 제주 서귀포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덧 서귀포에서 24년째. 제주에서의 삶은 많은 걸 바꿔놓았다. 그가 굳이 그림 끝에 ‘서귀포 왈종’이라고 써넣을 만큼 그의 시대는 서귀포 전과 후로 나뉜다. 화풍이 달라졌고 삶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재밌게도 화백은 서귀포에 들어와 살며 물욕을 비워냈는데, 오히려 이름값은 더 높아졌다. 그는 말한다. 지금의 자신을 만든 건 제주도의 꽃과 자연이라고.
‘제주 생활의 중도’, 2006년, 목조 위에 혼합, 50×87×4.5cm
‘제주 생활의 중도’, 2006년, 목조 위에 혼합, 50×87×4.5cm
미술관 건립은 언제부터 계획하신 건가요.
“처음에는 천장이 높은 작업실을 갖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일이 크게 벌어진 겁니다. 이곳이 문화재 보호구역이다 보니 건축 제약도 많고 개인 용도로는 쓸 수 없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 터를 개인이 소유해선 안 된다는 생각도 하긴 했었어요. 보다시피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해서 사회에 환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재단을 만들어 미술관을 짓게 됐지요.”



이 화백은 2011년 8월 왈종후연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380여 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그간 컬렉션한 작품들이 주를 이뤘고 자신의 작품도 일부 포함됐다. 당연히 미술관 소유도 재단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그의 인생철학의 실천인 셈이다.
미술관 내부. 이왈종 화백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 내부. 이왈종 화백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재단은 어떤 활동을 하게 되나요.
“개관에 맞춰 다문화가정 돕기 판화전을 했는데 한 3000만 원의 수익금을 기부했어요. 작년엔 유니세프에도 3000만 원 정도 기부했고요. 내년에는 소년소녀가장 돕기 목적으로 해볼까도 생각 중이에요.”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왈종미술관 1층에도 어린이미술교실이 있던데.
“저는 어린이 인성교육을 중시 여겨요. 지난 10년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무료 강의를 해오면서 그림만 잘 그리면 소용없다, 어쨌든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 미술관에 있는 어린이미술교실은 소질도 소질이지만 반듯하게 커가는 데 중점을 두고 교육해요. 부모 중 한 명과 반드시 같이 오는 조건으로 하는 것도 부모가 아이들을 지켜보고 매일 관찰일기를 쓰면서 함께 교육받고 변해가는 과정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무료 강의도 재능기부였던 셈인데, 평소 나눔 활동도 많이 해오셨죠.
“사람이 능력이 좀 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나야 비교적 그림으로 밥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으니 내가 사는 동안까지는 도우며 살아야지요. 그동안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빚을 많이 진 셈이지요. 이제 돌려줘야 해요.”


이 화백님을 두고 ‘10년간 그림 값이 가장 많이 뛴 작가’라고들 합니다.
“아휴, 그거야 뭐…. 처음 제주에 올 때 내 목표는 하루 세 끼 밥 먹고 그림만 그릴 수 있는 환경만 조성되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이었어요.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지요. 한편으론 대학에 있으면서 그림 그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있었어요. 실제로 대학에서 보직을 맡으면 작업을 할 수가 없어요. 여름방학엔 대학 미술전 준비를 해야 하고, 겨울방학엔 입시 준비를 해야 하니 작품 활동에 지장이 많았지요. 출퇴근 안 하고 그림만 그릴 수 있게 된 것도 행복했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줬으니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었죠.”


연고도 없는데 굳이 제주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현실적으로는, 살다 보면 경조사가 참 많잖아요. 거길 가야 사람 노릇을 하는 건데 제주에 있으면 안 가도 덜 미안하잖아요. 그런 측면도 있었고, 작품적으로는 여기가 사계절 꽃이 많으니 꽃을 주제로 그려보자 했던 겁니다. 겨울에도 여기는 동백, 수선, 매화, 감국 같은 꽃들이 12월에서 3, 4월 추울 때도 꽃을 피우거든요. 1년 사시사철 꽃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인 거지요. 미술관 오픈할 때도 했던 말이지만 이 미술관은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제주도의 꽃과 새들이 만들어준 겁니다. 내가 주로 매화, 동백, 수선 등을 그리고 그것들이 잘 팔리니까 맞는 말이지요.”


여기 오신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신 건가요.
“처음엔 서울 생각이 많이 나서 못 견디게 힘들었어요.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혼자 내려와 있으려니 더 그랬지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노동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붓을 다 꺾어버리고 몸을 쓰는 구조작업, 조각에 매달린 겁니다. 한 6개월은 그랬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작품의 폭도 넓혔고 서울 생각도 빨리 잊어버렸지요.”
‘제주 생활의 중도(동백나무)’, 2009년, 한지 위에 혼합, 131×162cm
‘제주 생활의 중도(동백나무)’, 2009년, 한지 위에 혼합, 131×162cm
이후에도 혼자인 건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외롭지는 않으셨어요.
“그 시기가 지나고 나니 생각이 사람에서 자연으로 이동하더군요. 밤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풀벌레 수천 마리가 울어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지요, 정말 기가 막혀요. 아마 녹음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훌륭한 오케스트라 저리 가라일 겁니다. 이 미술관 짓기 전에도 텃밭이 있었는데 내가 농약도 안 치고 내버려뒀더니 그랬던 게지요. 그러다 보니 심지어 장마철엔 뱀, 지네, 지렁이 같은 게 집 안으로 들어오곤 했어요. 지네한테 물려보기도 했는데 정말 혼이 났지요. 그래도 그 덕분에 반딧불이도 봤으니, 누리는 게 있으면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제주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이 질문에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답은 충분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특히 바다, 태풍이 기다려져요. 말도 못하게 무서운데, 그게 하나의 질서이고, 지구의 몸부림이니까…. 그런 걸 보면서 삶 자체가, 인간이 참으로 하잘 것 없구나라고 깨닫게 돼요.”
‘제주 생활의 중도(도라지꽃)’, 2011년, 한지 위에 혼합, 45×53cm
‘제주 생활의 중도(도라지꽃)’, 2011년, 한지 위에 혼합, 45×53cm
중도와 연기, 그리고 골프와 해학
서귀포에 온 이후 이 화백은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라는 주제로 연작을 하고 있다. ‘생활 속에서’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생활의 중도’란 주제로 전환했고, 제주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제주 생활의 중도’로 바뀌었다. 시리즈명은 그렇지만 명제로 보면 ‘중도와 연기(緣起)’다. 여기서 연기란 스스로 하지 않으려 해도 계절에 따라 또는 조건에 따라 생활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변하는 것은 연기의 작용에 의한 지극히 자연스럽고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이렇듯 삶을 둘러싼 환경은 달라져도 일상이라는 화두는 늘 중심에 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데는 그렇듯 희로애락을 오가는 우리네 인생사가 담겨서는 아닐까. 희(喜)와 락(樂)뿐만 아니라 노(怒)와 애(哀)마저도 기꺼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게 바로 이 화백 작품의 힘은 아닐지.


이 화백님이 말하는 ‘중도’란 뭔가요.
“중도라는 게 결국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양극단으로 가면 고통이 와요. 쾌락도 고통이에요. 쾌락 뒤엔 반드시 고통이 따르거든요. 그렇게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남과 비교하는 쓸데없는 생각들, 중도는 그런 마음을 들여다보고 중심을 잡는 겁니다. 내가 행복해질 방법, 그 모든 건 마음의 조작이거든요. 마음을 관리하는 방법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내가 행복한 마음을 가지면 그건 예술성을 떠나는 겁니다. 내가 작품을 그리는 것도 당연 이를 통해 남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생각에서지요.”
“내가 행복한 마음을 가지면 그건 예술성을 떠나는 겁니다. 내가 작품을 그리는 것도 당연 이를 통해 남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생각에서지요.”
원래부터 욕심이 없으셨어요.
“어려서 너무 가난했어요. 미제 구호품, 우유, 학용품 등을 받아서 공부했지요. 그땐 우리나라 전체가 가난했어요. 전쟁 직후니까.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내가 그때에 비해 너무 화려한 겁니다. 화려함이 지나치면 화를 부르고 그로 인해 다치잖아요.”


그래서 중도의 철학이 작품에 등장하게 된 건가요.
“생각과 실천은 좀 다른 게, 사실 젊을 때는 생각은 했어도 실천을 못했지요. 중도는 알다시피 불교 용어인데 학교 그만두기 전에 종교 서적들을 많이 봤었어요. 그중에서도 불교 서적이 보다 근본적인 것을 많이 다루고 있어 마음을 편하게 해주더군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결국 보이는 현상은 다 변하게 돼 있다는 것인데 그 자체가 기가 막힌 ‘화론(畵論)’인 거예요. ‘그림을 똑같이 그릴 필요도 없다,’ ‘아무렇게나 그리면 된다’, 그리 생각하고 별렀다가 후에 실천하게 된 것이지요. 내 작품에 아이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것도 그림은 꼭 재주가 있어야 그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나름의 개성을 살리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잘 그리려고 의식하는 데서 부화가 생겨요. 내가 행복하게 그려야 남도 행복하지 않겠어요.”


그림을 그리는 건 당연 보는 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럼요. 내가 행복한 마음을 가지면 그건 예술성을 떠나는 겁니다. 내가 작품을 그리는 것도 당연 이를 통해 남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생각에서지요. 그림은 부적과 거의 같은 속성을 갖고 있어요. 해골 그림을 붙여두면 음산한 기분이 들고, 밝은 그림을 보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지요.”


누구에겐 여행인 서귀포가 이제 일상이 됐는데 어떻게 보내세요.
“보통 9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운동 좀 하다가 밥 먹고 내내 그림만 그려요. 오후 5시 반이 될 때까진 아무도 안 만나지요. 그게 참 중요해요. 사람을 만나면 리듬이 끊어져서 작품이 안돼요. 제주에 내려오면서부터 ‘하늘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철저히 지키고 있어요. 사람 만나는 건 5시 반 이후부터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충분합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작업했는데 지금은 체력이 떨어져서 절반으로 줄어든 겁니다.”


제주에선 누구를 만나시는데요.
“골프 치는 사람만 만나요. 내 작품 중 50%가 골프와 관련된 것인데, 그건 골프가 나를 먹여 살리기 때문에 그래요. 200호, 300호짜리 작품들이 골프장에 많이 들어가 있지요.”


골프와 인연을 맺은 것도 제주에서 살기 시작하면서죠.
“그랬죠. 제주 핀크스골프클럽 김홍주 전 회장이 골프장에 걸 그림을 부탁해서 그려줬더니 회원권하고 골프채를 선물로 주더군요. 그래서 시작한 골프 때문에 엄청나게 돈을 잃었어요. 그러다가 처자식도 어린데 이러면 안 된다 싶어 골프를 치면서 먹고 살 방법을 생각한 게 골프 그림이었고, 그게 적중했지요. 그 후 갤러리 현대에서 전시를 하게 됐어요. 골프 그림만 잔뜩 가져갔더니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이 왜 이런 걸 그려왔느냐며 핀잔을 주더군요. 헌데 그게 전부 절품된 겁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세계에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게 태반인데, 시대의 요청에 의해 선보인 그림이 적중한 거였죠.”


골프 그림도 그렇고 이 화백님 그림 속 해학이 인기 비결 아닐까요.
“내 그림은 조선시대 민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 민화가 해학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지요. 해학성이 제일 중요해요. 남자보다 여자를 그림에서 더 크게 그리는 것도 요즘 여자들의 발언권이 세지고 경제권도 다 가져가니 그런 거지요.(웃음)”



이 화백은 내년이면 고희(古稀)를 맞는다. 대화 내내 나이가 느껴지지 않아서였는지 고희 얘기를 꺼내놓고도 어색했다. 아직 기념 전시 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게 그의 대답. 해도 좋겠고, 하지 않아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전자의 이유야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고, 후자는 굳이 그의 나이를 상기시킬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서다. 언제나 그래왔듯 아이처럼, 소년처럼 그러할 테니.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