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28’로 서점가 돌풍 정유정 작가
예정대로 화려한 컴백이었다. 전작 ‘7년의 밤’이 대히트를 친 후 정유정 작가에게는 ‘괴물 작가’, ‘혜성같이 등장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마흔을 목전에 둔 등단이었으니 ‘혜성같이’는 아니었지만, 등단을 기점으로 네 번째 작품이자 두 번째 장르 소설인 ‘28’을 통해 또 한 번 독자들을 거침없이 빨아들이고 있으니 괴물 작가의 면모가 발휘되는 시점이다. 정유정 작가에 대한 신뢰가, 그리고 신작에 대한 기다림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2년 전 ‘7년의 밤’을 읽으며 단순히 재밌는 소설의 발견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낀 게 어디 기자뿐일까. 이미 30만 부라는 경이로운 판매부수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니 두 말 하면 잔소리. 마치 독자가 직접 현장에 있는 것처럼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장면들, 도대체 어디로 흐를지 짐작되지 않는 궁금함과 호기심, 하나씩 베일을 벗는 과정에서 끝까지 몰아붙이는 극한의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모든 정체가 드러났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까지. 과연 ‘괴물 작가의 등장’이라는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7년의 밤’의 충격으로부터 2년 3개월이 지난 후, 신작 ‘28’(은행나무)을 내놓았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정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을 소재로 한 ‘28’은 ‘불볕’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화양’에서 28일간 벌어지는 죽음과의 사투이자 생명의 근원에 대한 질문, 그리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얘기한다.
오래 기다린 독자들이 많습니다.
“예상보다 6개월쯤 더 늦은 것 같아요. 실은 작년에 슬럼프가 있었어요. 등단 후 처음으로 이 소설을 못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죠.”
그래서 어떻게 극복하신 건가요.
“짐 싸들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거기서 해결을 본 거죠. 해발 700m,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암자에 머물렀는데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절과 마을을 둘러싼 8km의 산길을 걸었어요. 완전히 안개에 둘러싸여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그 길을 걸으며 내가 왜 처음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 하는 문제를 생각해봤어요. 그랬더니 제가 ‘문학’을 하려고 했더라고요.” 문학을 하려고 했다?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내용이 소설에 엄청 투여가 됐고,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인간의 이야기가 쪼그라들었는데 거기다 철학적 메시지, 계몽적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던 거예요. 당연히 내 이야기도 아니고 재밌지도 않았던 거죠. 그래서 다 버리고 새로 쓰기 시작했어요.”
출간 직후 반응이 굉장합니다. 하루키와 경쟁하시던데요.
“하루키 팬들이 들으면 욕하겠어요.(웃음) 영광이죠. 실은 ‘28’이 출간된 후 독자들 반응을 보고 감동했어요. 책이 나오기 얼마 전부터 불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전작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는 말을 들어야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슬프잖아요. 헌데 사인회나 독자와의 만남 등에서 독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고 정말 울 뻔했어요. 제가 독자들에게 그런 말을 했어요.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 박혀 있는 2년간 외롭고 힘들 때가 많을 텐데 그럴 때 여러분을 기억하겠다고.”
바이러스라는 소재의 진부함을 두고 걱정하는 목소리에 대해 ‘자신 있다’고 발언했었죠.
“그간 전염병에 관한 TV 드라마, 영화 등이 많이 떴죠. 그런데 인수 공통 전염병 이야기는 없어서 ‘이건 내거야’ 하고 2011년 5월에 한 인터뷰를 통해 미리 예고를 해버렸어요. 사실 그게 참 위험한 건데 저는 똑같은 이야기를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 있었어요. 왜 전염병 스토리에 문법이 있잖아요.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어렵게 백신을 찾아내고 그 와중에 가족애도 있는. 그 문법대로 쓸 거라면 아예 이 소재를 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눈 먼 자들의 도시’와도 비교하는데 분명 또 다른 이야기거든요. 특히 저는 보통 작가들보다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베이스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 험악한 이야기를 어떻게 끝까지 읽게 할 수 있느냐만 생각했어요. 이야기는 ‘무엇을’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도 중요하거든요.”
정 작가가 말하는 ‘베이스’란 바로 간호사 출신이라는 이력이다. 그의 생생한 묘사가 철저한 자료 조사를 기반으로 한다는 건 이미 알려진 얘기. ‘28’에서는 병원은 물론 대학병원 수의학과, 공수부대 특전사, 119 구조대 등 전작보다 더 광범위하고 치밀한 자료 조사가 필요했다. 이 부분에서 지금은 소방학교에 근무 중이지만 119 구조대원 출신인 남편의 역할도 한몫했다. 여기에 5명의 인물과 개 링고 등 6개의 시점이 교차하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공부까지 더해졌다. 그것은 정 작가가 바이러스를 소재로 택하게 된 계기와도 맞물린다. 구제역이 창궐했을 때 소와 돼지가 생매장 당하는 모습을 뉴스 화면으로 접한 그는 그날 밤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28’의 첫 출발점이었다.
원래 장르 소설을 좋아하세요.
“문학 공부를 할 때 스티븐 킹(Stephen King)과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를 스승으로 삼았어요. 스릴러와 공포 소설의 대가들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작가로 활동하려면 등단을 해야 하니 공모전을 통해 등단했는데(정 작가는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2009년 ‘내 심장을 쏴라’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쓰고 싶었던 건 이쪽 장르였어요. 저는 작가라는 말보다 소설가라는 말이 좋고, 그보다는 이야기꾼이란 말이 더 좋아요. 이야기 자체가 장르 소설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전 소설의 본질이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은 메탈이에요. 호불호가 심하죠.”
그러기엔 이미 너무 대중적인 인기 작가가 됐는데요. ‘괴물 작가’라는 반응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작가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정말 좋아요.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이 구사해온 섬세함, 풍부한 감수성, 내면의 예리함 같은 게 아니라 뭉툭한 칼자루를 휘두르듯이 둘러버리니까, 그래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아닐까요. 전 제 소설의 세계에선 독재자예요. 파리 한 마리도 자기 맘대로 날아다닐 수 없죠. 작가란 인물이 되고 배우가 돼 이야기를 끌어가기도 하지만 감독 역할도 해야 해요. 그러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어떨 땐 벽에다 머리를 찧어요.(웃음) 하지만 제가 그 길을 택했으니 어쩔 수 없죠.”
‘혜성같이 등장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사실은 다르죠.
“간호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들어서면서 사실 소설가로 세상에 나가는 데 시간이 걸리면 얼마나 걸리겠나 싶은 맘도 있었어요. 등단 전에 이미 세 권의 소설도 냈었으니까요. 그런데 등단을 위해 공모전에 응모하고 무려 11번을 떨어지면서 패배주의에 빠졌어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절감했죠. 그런데 제가 또 한 ‘오기’ 하거든요. 하루를 끙끙 앓고는 벌떡 일어났어요.”
듣다 보니 등단하기까지도 그렇고 등단 후에도 가족들의 희생이 컸겠어요.
“대학생 아들이 일본에서 유학 중인데 초등학교 졸업식에 딱 한 번 학교에 가봤어요. 다행히 그 빈자리를 ‘아들 바보’인 남편이 많이 채워줬죠. 살림도 거의 남편이 해요. 경제적으로도 남편이 뒷바라지를 해줬죠. 직장 그만두고 6년간 무명일 때 혼자 벌어 가정 살림 꾸리고 제 책 값까지 다 대줬으니까요. 그래서 세계청소년문학상 상금으로 받은 5000만 원은 다 남편을 줬어요. 그랬더니 세계문학상 당선 소식 들은 후 상금 1억 원을 다 줄 줄 알고 벌써 계산기 두드리고 있더라고요.(웃음) 지금은 인세도 모두 관리해요. 전라도 광주 집으로 돌아가 다음 작품 쓰기에 돌입하면 또 남편 뒷바라지를 받아야죠. 다음 작품은 2년 안에 내도록 노력할게요.”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한 권’ 그리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역, 민음사
한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주인공 맥머피가 ‘콤바인’으로 상징되는 무시무시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그린 작품.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작가의 스토리 정유정 작가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한 권의 책이자 ‘왜 작가가 됐나’라는 질문에 답과 같은 소설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동생과 함께 하숙을 하고 있었던 열다섯 살의 정 작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총소리가 무서워 잠을 청하고자 옆 대학생 오빠의 방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조금만 읽으면 잠들 것 같아 선택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니 어느새 새벽, 멈춰 있는 총소리는 시민군이 진압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감정이 교차하며 울음이 터진 그 뜨거운 새벽을 후에 작가가 되면 독자들에게도 안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 외 추천 도서>
‘스탠 바이 미’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역, 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자전적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성장 소설.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라고 물었을 때 단연 영향을 끼친 소설로 꼽는 작품이다. ‘소년, 남자가 되다’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에겐 그야말로 매력적인 이야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역, 민음사
영화 ‘일 포스티노’로 더 유명한 이 소설은 시인과 우편배달부 마리오를 통해 한 편의 시가 새로운 삶과 사랑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악인’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역, 은행나무
‘악인’은 재미있으면서도 가슴이 아픈 작품. ‘살인’이라고 하는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어진 여러 사람들의 감정을 서스펜스적인 필치로 그려낸 소설로 정 작가가 “스릴러를 읽다가 그렇게 울어보긴 처음”이라고 덧붙인 작품이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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