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우리들, 일하는 곳에서 멀리 떠나가 쉬고 싶다. 그러나 쉼은 뇌의 스위치를 끄는 회피가 아니다. 치열한 삶에서 잠시 나와 이완의 자유를 느낄 때 얻어지는 삶의 가치 재충전이다. 삶의 진짜 바캉스는 내 마음의 쉼이 있는 ‘바로 여기, 지금 당장’에 있다. “선생님, 다 때려치우고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습니다.” 잘나가는 40대 후반 대기업 임원이 필자에게 한 말이다. 어디로 멀리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삶에 지친 현대인의 가슴에 농축된 ‘탈출 환상’이다. 시골에 내려가서 진짜 쉼을 찾을 수 있다면 무리해서 1년짜리 휴직을 위한 진단서라도 발급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진실은 내려간들 쉼이 없다는 것. 멀리 가고픈 마음은 지친 삶을 해결할 솔루션이 아닌 뇌 피로증상이기 때문이다. 멀리 간들 사실 더 피곤하기만 하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픈 마음의 증상을 심리적 회피 반응이라고 한다. 삶의 고통과 통증에 대한 회피는 정상적인 심리 반응이다. 일시적인 회피는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회피가 장기화되고 고착되면 삶의 행복이 사라진다. 삶의 고통과 행복의 콘텐츠는 동전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명 ‘건어물녀 신드롬’은 심리적 회피 반응을 슬프면서도 재미있게 표현한다. 일본 만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인데 회사에선 매력 만점인 멋진 20대 미혼 여성이 집에만 오면 허름한 운동복을 입고 건어물 안주에 맥주만 마신다는 내용이다. 주말에도 남자와 데이트도 않고 건어물과 맥주만 몇 년 먹다 보니 만화 속 여주인공의 몸이 진짜 건어물로 바뀌어 간다는 이야기다. 마음의 감성이 건어물처럼 건조하게 말라 가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사랑에 크게 실연한 여성이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남자로 인해 속상할 일도 없겠지만,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인간 최고의 쾌감도 느낄 수 없게 된다. 회피는 행복을 향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내일의 바캉스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라
불안, 우울 등 심리 문제가 기업 생산성을 떨어뜨리기에 정신의학자나 심리학자를 동원해 직원들의 마음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것이 외국 기업에서는 일반화됐고 국내 기업도 도입하는 추세다. 그런데 불안, 우울 등의 증상을 치료해도 직원들이 과거만큼 회사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빙빙 도는 경향이 남아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보니 이 또한 심리적 회피 반응이 문제였다. 고착화된 행동이 증상 호전 후에도 습관처럼 남아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이다. 일도 사랑과 마찬가지다. 업무 스트레스로 일에 몰입하는 것을 회피하게 되면 성취의 쾌감 또한 반감하게 된다. 재미없는 대충의 인생을 살게 만드는 것, 심리적 회피 반응의 절대 가볍지 않은 합병증이다.
7월, 바캉스 시즌이 시작됐다. 그냥 놀고 쉰다는 뜻 아닐까 생각했던 바캉스의 라틴어 어원이 ‘자유를 찾는다’라고 한다. 쾌락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ouros)는 인간 행복의 3요소를 우정, 자유, 사색이라 했다. 그런 측면에서 바캉스는 단순한 삶의 휴식 시간이 아닌 본질적인 행복 활동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바캉스 준비 모습을 엿보면 서글프기까지 하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바캉스 시즌이 오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패키지여행 상품을 고르고 숨 가쁘게 휴가를 다녀온다.
필자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파리에 가고 싶을 때 항공사 사이트에 들어가 표를 예매한다. 그리고 파리가 잘 그려진, 예를 들면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처럼 현대와 과거의 파리가 함께 나오는 영화를 본다. 그리고는 항공사에는 미안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예매한 표를 취소한다. 살짝 미친(?) 사람 같은가. 우리 감성 시스템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실제 파리에 간 것보다 파리가 잘 그려진 영화에 몰입할 때 바캉스 효과는 더 클 수 있다. 패션을 좋아하는 아들, 기대에 차서 파리에 갔다. 그러나 다녀와서 하는 말, “쇼핑하기도 한국보다 안 좋고 걸어 다니느라 힘들고 실망이야”라고 한다. 상당한 노하우 없인 슬쩍 간 남의 도시를 잘 즐기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영화는 걸어 다닐 필요도 없이 우리 눈에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쏙쏙 비추어 준다.
자유는 회피가 아닌 몰입에서 찾아온다. 행동활성화 기법은 심리적 회피 반응을 위한 솔루션이다. 오늘의 삶이 무료하고 지칠 때 과거의 기억에 행복했던 일들을 목록화하고 한 가지씩 실행해 보는 것이다. 그 실행이 정교한 복기일 필요는 전혀 없다. 얼마나 같은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몰입의 정도가 중요하다. 디지털 세상에 만년필이 버티고 있고 다시 바늘로 듣는 레코드판이 유행인 것은 우리의 행복 기억을 그 물건들이 활성화시키고 몰입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내일의 바캉스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인생은 미래의 합산이 아닌 오늘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일과 사랑, 그 자체를 바캉스의 콘텐츠로 활용해야 한다. 성공의 콘텐츠를 얻는 것과 그것을 즐기는 것은 다른 프로세스다. 점심시간, 잠시 짬을 내어 맘에 드는 책을 10분이라도 읽어 보자. 그 내용에 몰입할 때 현실에서 빠져 나와 자유인이 돼 오전에 내가 보낸 시간들이 과거가 되고, 내 감성 기억에 가치 있게 되새겨지며 기억된다. 반년에 한 번쯤은 스마트폰을 던져 버리고 혼자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당일치기 국내 여행을 가보자. 창문 너머 지나치는 풍경을 멍하니 보는 것만으로 뇌의 치열한 전투 시스템은 이완된다. 그 이완이 자유이고 자유를 느낄 때 최근 수개월 자신의 인생들이 감성의 언어로 펼쳐지며 삶의 진정한 쉼을 준다.
쉼은 뇌의 스위치를 끄는 회피가 아니다. 치열한 삶에서 잠시 나와 이완의 자유를 느낄 때 얻어지는 내 살아온 삶의 가치 재충전이다.
글·사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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