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윤효간
고졸 출신에 피아노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외국 유학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지만 윤효간은 모두가 인정하는 아티스트이자 훌륭한 피아니스트다. 기존 피아노 콘서트의 고정관념을 허문 ‘피아노와 이빨’ 공연으로 8년째 1400여 회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고 있으며, 남다른 인생 궤적과 성과로 중학교 교과서에도 이름을 올린 그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그이니 나눔과 소통의 방식도 다를 수밖에. 그건 일종의 ‘혁명’이다. 피아니스트 윤효간이라는 이름을 관통하는 코드는 ‘다름’과 ‘다양성’이다. 피아노를 시작한 꼬마 시절부터 악보대로 치는 것을 당당히 거부했던 그는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편한 길을 놔두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힘든 길을 걸었다. 해외유학은커녕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최장수 인기 피아노 공연인 ‘피아노와 이빨’을 8년째 하고 있는 것도 신념과 철학, 그리고 열정이 빚어낸 결과물이다.전국은 물론 해외 투어까지 섭렵하며 최근 1398회라는 기록을 세운 ‘피아노와 이빨’은 그 독특한 명칭만큼이나 남다른 스토리로 수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피아노와 이야기가 어우러진 일종의 토크 콘서트지만, 피아노도 토크도 일반이 생각하는 형식에서 벗어난다. 클래식에서 동요까지 넘나드는 레퍼토리도, 자유롭기만 한 연주 스타일도, 초대되는 게스트도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꿈과 희망,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나누다
김현식, 조영남, 패티김 등 유명 대중가수들의 세션으로, 또 KBS 관현악단 소속 단원으로 얼마든지 안주할 수 있었던 삶을 버리고 선택한 ‘피아노와 이빨’은 그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자 나눔의 장이다. 투어버스에 피아노를 싣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이나 군부대 등을 찾아다니며 꿈과 희망을 나누고 있고, 지난해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피아노와 이빨-스쿨드림콘서트’를 통해서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미래를 열어주고 있다. 스쿨드림콘서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작년에 부산에서 먼저 시작했어요. 제 고향이 부산인데 부산 지역에 있는 아이들에게 좀 다른 기부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 사회가 너무 경직돼 있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진로 문제로 고민이 많잖아요. 모두가 똑같은 길, 성공의 방식만을 요구하고 있는데, 저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도 있다는 걸, 얼마든지 뜻 있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지난해 부산에서 10개 학교를 돌았는데 반응이 정말 폭발적이었어요. 그걸 본 부산시 교육감이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겠다며 적극 나섰고 부산에서만 40개 학교를 진행했어요. 그 후 대구에서도 요청이 와서 10개 학교에서 콘서트를 했고, 최근엔 광주 지역 7개 학교를 돌았어요.”
뭔가 윤효간만의 남다름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식인가요.
“스쿨드림콘서트를 여는 목적은 우리 아이들이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콘서트의 내용도 거기에 맞췄죠. 먼저 콘서트가 열리는 강당이나 운동장에는 ‘상상해보시지요’란 제목으로 전시를 설치해요. 제 캐릭터가 ‘가니’인데 얘는 눈만 뜨면 어디를 가는 애거든요. 그리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상상을 해요. 가니를 활용해 꿈의 공간,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고 체험하는 내용의 전시를 하는 겁니다. 음악적 콘텐츠도 달라요.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영상도 들어가고 불후의 명곡에서부터 동요까지 레퍼토리도 정말 다양하게 꾸미죠. 아이들은 제 공연을 보면서 ‘피아노도 저런 스타일로 칠 수 있구나’, ‘피아니스트라는 사람이 저런 일도 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면서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는 겁니다.” 실제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요.
“제가 중점적으로 가는 곳이 중학교인데 그 이유는 중학교 시절에 인성이 형성되고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시기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인지 ‘중2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나씩 문제를 갖고 있죠. 그 때문에 중학생을 대상으로 공연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힘든 공연이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아이돌도 아닌 저에게 대단히 열광하더군요. 아마 아이들이 제게 동질감을 갖는 건 제 이력 때문이겠죠. 중학교 시절부터 가출한 경험이 있는, 사회가 제시한 길대로 가지 않은 반항아였다는 점 말이에요. 아마 제가 명문대 출신이거나 유학파였다면 상황이 달랐을지도 몰라요. 아이들에겐 제가 하나의 상징적 인물인 거죠.”
원래 교육에 관심이 많았나요.
“운 좋게도 집안 환경이 좋아 어릴 때부터 고급 교육을 받고 피아노를 배웠지만, 열아홉 살에 집을 나오고부터 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됐어요. 그 이후 시련도 많이 겪고 아픔도 겪으며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돌아보면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늘이 그런 시련을 준 게 아닌가 싶어요. 개인적으로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살았으면 더 풍족하게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공익적인 삶을 추구하는 게 스스로는 더 행복해요.”
나눔이 일상화된 다른 분들처럼 ‘중독’이 된 거군요.
“그냥 제 스스로 기뻐요. 예술이라는 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존재 가치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가치를 제시해야 하죠. 저는 재능 기부 그 자체도 좋지만 그저 공연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고 몰랐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그런 나눔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미래지향적인 나눔인 셈이죠.”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서도 계속 콘서트를 하고 있죠.
“저는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그 또한 꿈을 나누기 위한 거예요. 더불어 이 사회를 밑바닥부터 굳건히 다지고 있는 분들에게 공연을 통해 개인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싶었고요. 지금 하고 있는 건 군인과 군인 가족들을 찾아가는 ‘필승드림콘서트’인데, 작년과 재작년 현대차그룹과 힘을 합쳐 100번 정도 진행했죠. 올해는 백혈병 소아암을 앓는 환우와 가족들을 위한 콘서트도 기획 중이고, 소방대원들과 가족들을 위한 ‘119드림콘서트’ 등도 생각 중이에요.”
‘선택받은’ 삶 버리고 도전하는 인생에서 희열
윤효간이 스쿨드림콘서트를 시작하게 된 건 자신의 인생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 누구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의 루트를 통하지 않고서도 인정받으며 의미 있고 즐겁기까지 한 삶을 살고 있는 그 스스로가 어쩌면 ‘답’인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고생을 ‘사서’ 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팔각성냥’으로 유명한 기업 유엔성냥의 막내아들로, 평탄한 길을 걸었더라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터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죠.
“아홉 살쯤으로 기억하는데 피아노 악보를 보면 ‘크게’, ‘작게’ 등 악상 기호가 있잖아요. 그때 제가 피아노 선생님에게 크게 치라는 데서 작게 치면 안 되느냐고 물었어요. 요즘 같은 시절도 아니고 그 시절에 그런 질문을 했으니 말이 안 되는 거죠. 선생님, 부모님과 엄청난 갈등이 있었지만 저는 그냥 제 스타일을 고수했어요. 그리곤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무일푼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가출인 거죠.”
고생이 대단했겠네요. 이후는 어떻게 생활했나요.
“10년 동안 클럽 등에서 공연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학교에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걸 저는 길에서, 사람에게서 배운 거죠. 그래서 현장형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고, 20대 시절부터 이미자 선생 등 최고의 가수들과 음악을 하고 KBS 관현악단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정도면 명성도 있고 안정된 생활이 가능했을 텐데, 박차고 나온 이유가 뭔가요.
“한참 일이 잘 풀릴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그게 내 인생의 전부일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 예술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한 거죠. 그래서 시작한 게 ‘피아노와 이빨’이었어요.”
“재능 기부 그 자체도 좋지만 그저 공연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고 몰랐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그런 나눔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미래지향적인 나눔인 셈이죠.”
처음부터 성공적이지는 않았을 텐데요.
“2005년에 서울 압구정동의 한 소극장에서 시작했어요. 그땐 이름도 없었고 마케팅을 할 능력도 없었고, 그래서 일단 장기 공연의 역사를 써보자고 덤볐어요. 역사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게 2년 6개월 동안 2시간짜리 공연을 700회나 했어요. 결과적으론 성공이었고 이후 국립극장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가장 힘든 건 경제적인 문제였어요. 공연장 한 달 임대료만 3000만 원이었으니 말 다했죠. 그런데 참 묘하더군요. 제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은 어느 기업 관계자가 초청 공연을 제안하는 등 결정적인 순간에 공연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들이 생겨나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부모님 반응이 어떤가요.
“몇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1년 전에야 인정해주셨어요. 작년에 제가 낸 책을 보신 후 당신의 아들을 비로소 이해하셨다면서 마음 아파하셨어요.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참 존경스럽네’라고.”
40년 가까이 피아노를 쳤는데 피아노가 인생에 어떤 의미인가요.
“나이에 따라 다른데 요즘 드는 생각은 그래요. 피아노가 나를 한 인간으로서 품격 있게 해줬고 깊이 있게 해줬고 착하게 해준 것 같아요. 피아노를 통해 아름다움을 전파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저는 어릴 때 음악가들이 아닌 혁명가들의 전기를 많이 읽었어요. 피아노를 통해 혁명을 하고 싶었고 지금 문화혁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의 가치,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나눌 수 있는 삶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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