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범의 Mystic Art Story
세상을 꼭 정해진 규칙대로 바라봐야 할까. 때로는 나무가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고 사람 얼굴이 호박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위험하다. 요즘이라면 몰라도 고루한 관념이 지배하던 전통사회에서 그런 시도는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일 수도 있다.그런 점에서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라는 이탈리아 화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만남은 천운이었다. 아르침볼도는 밀라노에서 비아지오라는 잘나가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밀라노대성당의 내부 장식을 수주할 정도로 유명했는데 아르침볼도는 아버지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레 손재주를 익혔다.
남아 있는 기록이 별로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일찍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것 같다. 1562년 3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제지인 빈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가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그가 그린 그림들은 전통 화법을 충실히 계승한 기독교 성화들이 주류를 이뤘다.
막시밀리안 2세와 만남 이후 새로운 화풍 선보여
아르침볼도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기발한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호기심 많은 군주 막시밀리안 2세(재위 1564~1576)의 궁정에서 자유로운 공기를 흡입한 덕분이었다. 그는 첨단 과학기구를 비롯해 희귀한 동식물의 표본 등 전 세계의 진기한 물건들을 수집, 궁궐 내에 보관했는데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위세를 전 유럽에 과시하는 역할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궁정이 새로운 예술의 중심이 되길 원했다. 르네상스를 연 이탈리아 미술과는 다른 합스부르크만의 트레이드마크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황제의 의중을 간파한 아르침볼도는 그의 권위를 빌어 그간 억눌러왔던 자신의 끼를 발산하기로 결심한다. 1569년 1월 1일 그는 새해맞이 기념으로 황제에게 두 세트의 기발한 인물화를 선물한다. 봄·여름·가을·겨울로 이루어진 ‘4계절’, 공기·불·땅·흙으로 구성된 ‘4원소’ 등 모두 여덟 점이었다. 그림을 받아든 황제는 궁정이 떠나갈 정도로 폭소를 터트린다. 대체 무엇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추상같이 호령하던 대제국 황제의 얼어붙은 마음을 무장해제시킨 것일까.
‘4계절’에서 화가는 각각의 계절에 걸맞은 각종 식물들을 조합해 유쾌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봄’은 갖가지 꽃들로, 여름은 과일과 채소의 열매로, 가을은 포도와 곡식의 낟알로, 겨울은 잎사귀가 떨어진 나목으로 표현됐다.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물을 표현한 ‘4원소’에서는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을 조합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공기’를 보면 갖가지 새를 조합해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는데 입과 수염이 난 턱은 닭으로, 몸은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로 표현해 그 절묘한 착상과 재치에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황제가 크게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실을 전위미술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는 데 아르침볼도만큼 적당한 인물은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아르침볼도의 생각을 높이 샀다. 특히 화가의 유쾌함이 맘에 들었다. 황제는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축제 때 그림 속 인물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내친김에 황제는 그를 아예 궁정에 보관할 진기한 물건 구매 담당책으로 임명한다. 피카소·마르셀 뒤샹 등에 영향 끼쳐
막시밀리안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루돌프 2세(재위 1576~1612)도 아버지 못지않은 호기심 덩어리였다. 정치적으로는 무능했지만 그의 프라하 궁정에는 천문학자 케플러, 티고 브라헤 등 혁신적인 이론을 내세운 과학자를 비롯, 한스 폰 아헨 등 전위적인 화가들이 터를 잡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루돌프 황제 역시 아르침볼도를 지극히 아껴 심지어 자신의 초상화마저 그의 독특한 인물화법에 따라 그리게 했다. 계절의 신인 ‘베르트무스’라고 명명된 이 초상화는 황제를 계절의 신에 비유함으로써 전지전능한 지배자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강낭콩 눈썹, 서양배 코, 사과 볼따구니, 옥수수 귀를 한 베르트무스의 얼굴은 그가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다양한 수확물들로 구성돼 있다. 자신을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리도록 허용한 황제나 자신의 기발한 생각으로 황제의 얼굴을 왜곡한 화가의 자유로운 정신은 르네상스 시대의 개방 정신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아르침볼도는 단순히 대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때때로 작품에 치열한 비판의식을 담기도 했다. ‘장서가’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려는 귀족과 부유층의 허식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물론 ‘유머’라는 양념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책장을 펼친 모습으로 묘사된 머리카락이나 책갈피로 표현된 손가락은 보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게 만든다.
그의 파격적인 작품이 당대인에게 던진 충격파는 대단했다. 그의 희한한 그림을 보고서 사람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이런 기벽을 추구한 사람은 아르침볼도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밀라노 궁정에서 활약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기형적인 인체와 동물을 찾아다니며 스케치북에 담았다. 매너리스트로 불리는 피렌체의 화가들도 왜곡된 신체의 사람들을 비현실적인 공간속에 배치하기도 했다. 볼록 거울 위에 비친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재현한 파르미지아니노는 그 대표적인 예다. 안타깝게도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1648년 신교와 구교가 맞붙은 30년 전쟁 때 스웨덴 군대에 의해 약탈당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이 재능 많은 화가는 300여 년 동안 망각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의 존재가 뒤늦게 알려진 것은 작품들이 문화의 ‘변방’에 흩어져 그 존재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진가를 처음으로 재발견한 사람은 피카소, 달리 같은 20세기 전위 미술가들이었다. 자전거 핸들과 안장을 조합해 ‘황소’라고 이름 붙인 피카소나 남자용 소변기에 ‘샘’이라고 이름붙인 마르셀 뒤샹이나 그 근본 정신은 아르침볼도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가시적인 세계를 해체해서 또 다른 맥락으로 새롭게 조합한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퓨전이 대세인 오늘날 아르침볼도가 던지는 메시지를 마냥 가볍게 웃으면서 바라볼 수만 없는 이유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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