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BALANCE
5월 10일 오전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도시락 브랜드 ‘한솥’ 본사. 이영덕 대표가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많이 마셨다”며 인터뷰 장소로 들어선다. 그런데 웬걸? 마주 앉은 그에게선 알코올 냄새가 아니라 향긋한 커피 내음이 풍겼다. 1960년대 초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커피의 매력에 눈떠 최근 ‘찬차마요’로 커피사업에 뛰어들기까지 50여 년이 걸렸지만 이 대표의 지난 세월에는 늘 친구처럼 커피가 함께 했다. 그는 말한다. 커피가 없었더라면 인생이 지금처럼 즐겁지 않았을 것이라고.“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일본에서 클래식 다방과 커피 마니아들이 찾는 소규모 커피전문점이 유행했어요. 저도 이름난 커피숍을 찾아다니며 드립커피 마시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향기로움에 취했던 것 같아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으로 올 때도 맛있는 일본의 인스턴트커피를 가지고 와 하숙집에서 타먹곤 했죠.”
이영덕 한솥 대표가 5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렸다. 입에는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머금은 채였다. 이따금씩 그는 눈을 감고 풍미를 느끼는 듯 보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커피가 기호식품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지만 이 대표의 커피 사랑은 유난스러울 정도였다.
재일교포인 그는 20년 전 일본의 도시락 문화를 한국식으로 해석한 테이크아웃 도시락 전문점 ‘한솥’을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1963년 종로구청 앞에 문을 연 26.4㎡(8평)짜리 ‘한솥도시락’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돼 현재 가맹점이 630여 개에 이른다. 좋은 식재료로 만든 따끈한 도시락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이념으로 고객 신뢰를 쌓아온 덕분에 어느덧 ‘한솥’은 도시락의 고유명사가 됐다.
“이것저것 사업 하다 마흔 넘어서 외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제가 ‘일본의 부엌’이라고 불리는 교토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맛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거든요. 미식가의 재능을 살려 도시락 사업을 하니 능률도 오르고 보람도 느낄 수 있었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진정 즐거운 일을 했더니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죠. 돈을 좇아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대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지난해 커피 브랜드 ‘찬차마요’를 론칭, 카페형 매장에서 도시락과 커피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그는 “‘찬차마요’를 통해 한솥이 ‘착한 기업’이란 타이틀을 얻은 동시에 ‘커피사업’이라는 꿈도 실현했다”고 말한다.
남미 최초 한인 시장(市長)인 정흥원 페루 찬차마요(Chancha mayo)시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커피사업의 계기가 됐다. 이 대표는 ‘빈민의 대부’로 불리며 전 재산을 찬차마요 시민을 위해 사용하다 시민의 추대로 ‘빈민의 시장’이 된 정 시장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찬차마요시에 남몰래 기부해 왔다.
커피 수출로 찬차마요시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정 시장의 꿈을 알게 된 후 커피사업에 직접 뛰어들기로 했다. 한솥은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거래(direct trade) 하는 방법을 택해 영세한 현지 농민들도 돕고 소비자에게도 저렴한 커피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한솥은 찬차마요시 해발 1500~2000m 고지대에서 재배된 최상급 원두를 제 값의 50%를 더한 가격으로 수입하는데, 그 값의 일부는 시의 발전기금으로 사용된다.
찬차마요 농민들이 전통 방법으로 재배하는 원두는 첫 모금에서 마지막까지 다양한 맛의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가 워낙 커피를 즐기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커피를 저렴하게 제공하고 싶었어요. 우리나라는 식후 커피 타임이 생길 정도로 커피 문화가 확산됐지만 여전히 가격은 너무 비싸죠. 여기에 착안해 식사와 커피를 함께 착한 가격에 제공하는 모델을 생각했습니다. 한국 소비자들은 고품질 커피를 저렴하게 마시고 페루 농민도 도울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지요.” 한솥 20주년 착한 커피 ‘찬차마요’ 론칭…행복 나누고파
이 대표는 그러나 커피사업을 하면서도 따로 가맹점을 모집하지 않았다. 수익 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해 프랜차이즈화할 수 있었지만 커피는 기존 한솥 매장 내에서만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점주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다.
“저는 프랜차이즈를 ‘행복사업’이라고 말합니다. 본사와 점주, 협력업체와 소비자 모두가 행복한 선순환 구조를 구축한 게 ‘한솥’ 20년의 비결이기도 하고요. 보통 기존 브랜드가 포화상태에 이르면 본사는 세컨드 브랜드를 론칭해 사세를 확장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좋은 브랜드가 있으면 한솥도시락과 연계해 기존 가맹점의 매출을 늘리도록 해줘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는 협력업체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식자재를 공급하는 협력업체 역시 꾸준한 신뢰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20년 동안 물가가 올라도 도시락 가격은 크게 비싸지지 않았다. 이것이 곧 소비자의 행복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커피가 회사 경영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른 아침 커피 향을 맡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온몸 구석구석에 행복감이 전해진다. 아이디어를 내거나 업무를 하는 동안에도 활력을 준단다. 그러니 커피 없는 인생은 생각하기도 힘들다.
이토록 예찬하는 커피, 하루에 얼마나 마시는지 궁금했다.
“중독까지는 아니에요.(웃음) 건강을 위해 하루 세 잔 정도 마셔요. 출근길에 한 잔 마시고 사무실에 있는 이탈리안 커피 머신에 원두를 내려 우유와 설탕을 약간 넣어 마셔요. 요즘엔 ‘찬차마요’ 아메리카노에 푹 빠졌고요.”
이 대표는 독특하게 ‘핫(hot)’도 ‘아이스(ice)’도 아닌 ‘약간 식은’ 채로 마시는 커피를 최고로 친다. 신선하고 좋은 원두일수록 식었을 때도 맛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떤 사람들은 분위기에 반하고 혹자는 향에 취한다고 하지요. 저는 맛있어서 먹어요. 커피는 굉장한 맛이에요. 언젠가 프랑스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파리의 한 호텔에 조식을 먹으러 갔더니 크로아상 굽는 냄새와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겁니다. 맛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때의 기억이 온몸에 각인됐는지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세상에 커피가 없었다면 인생이 지금처럼 즐겁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30~40% 정도는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결국 그가 커피사업을 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을 공유하기 위해서일 테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찾아 20년 전 외식사업에 뛰어들었다면 이제 맛있는 도시락과 그윽한 커피 향기로 만인의 식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고자 한다. 수년 내에 카페형 한솥 매장을 미국에 열고 가맹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까지 손에서 커피 잔을 놓지 않는 그. ‘식어서 더 맛있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찬차마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눈빛을 반짝인다. “우아하고 품격 있는 블랙커피. 언제 어디서나 좋은 향기를 남기는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
이윤경 기자 ramji@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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