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lesse Oblige

‘힘든 길이라도 스스로 더 행복하다면 당연히 그 길을 가는 게 맞다.’ 머리로는 너무나 이해되는 말이지만 막상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허락된 사람이라면 더욱 쉽지 않을 터다. 세상 기준이 아닌 그저 자신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길로 들어선 지 10년째. 어느덧 공익변호사의 표본이 된 염형국 변호사 얘기다.

염형국 변호사는…제43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3기 수료.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국가인권위원회 정신장애인전문위원회 전문위원. 현 장애인 차별금지추진연대 법제위원·대한변협 법률구조재단 감사·민변 소수자인권위원회 위원장·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상임이사 겸 사무총장.
염형국 변호사는…제43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3기 수료.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국가인권위원회 정신장애인전문위원회 전문위원. 현 장애인 차별금지추진연대 법제위원·대한변협 법률구조재단 감사·민변 소수자인권위원회 위원장·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상임이사 겸 사무총장.
염형국 변호사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을 찾아가는 길, 어느 번듯한 건물 앞에서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근처’임을 알려왔다. ‘이렇게 번듯한 건물일 리가 없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차’ 싶었다. 모두를 위해 희생이 요구되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일수록 보란 듯이 더 번듯한 생활을 해야 하는데, 나눔에 대해 보통 사람 이상의 인식을 하고 있는 기자조차 편견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순간, 혼자 얼굴이 붉어지며 미안한 마음이 깊어진다.

아닌 게 아니라 ‘공감’ 사무실은 편견이 작용한 그 예상대로 오래된 건물, 좁은 공간이었다. 변호사 7명과 간사 3명, 대학생 인턴들로 북적거리는 그곳은 지금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2003년 아름다운 재단 산하 공익변호사 그룹으로 출발한 ‘공감’이 지난해 12월 공익인권법재단으로 독립한 것. 활동 10년째이자 새로이 창립해 첫 발걸음을 뗀 올해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물론 공감의 모든 구성원들, 공감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러하겠지만, 지난 2003년 아름다운 재단에서 ‘공감’이 탄생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께해오고 있는 염 변호사에겐 그 감회가 더욱 남다르다.



공익변호사로 출발, 10년이 흐른 뒤

사법연수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아름다운 재단 내 ‘공감’에서 근무를 시작한 염 변호사는 그러니까 수임료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변호사다. 얼마든지 더 나은 지위와 경제적 수준을 보장받을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그 길’을 택한 데는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만남이 한몫한다. 그가 연수원 시절, 강의를 온 박원순 당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는 ‘돈 버는 것만 포기하면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엄청나게 많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고, 평소 그런 삶을 꿈꿨던 염 변호사는 그 일을 계기로 ‘공감’의 첫 변호사가 됐다.


그 후 십년이 지났네요. 올해는 독립법인으로 새 출발하는 의미까지 더해 감회가 새롭겠어요.
“아름다운 재단 산하에서 만 9년을 활동하다가 별도 재단으로 독립할 수 있을 만큼 자립 기반이 만들어졌다는 차원에서 감회가 남달라요. 10년째 공익인권법 단체를 유지하고 조금이나마 발전해왔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자평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10년 동안 계속 이곳에서 일을 할 줄 몰랐는데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도 들고요. 옛날 생각이 날수록 나이 먹어간다는 징조라던데 요새는 더 되돌아보게 되네요.(웃음)”


공감이 출범하기 전 시민단체에도 지원했던 걸로 압니다. 법을 공부할 때부터 공익변호사의 길을 염두에 두었던 건가요.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어요. 연수원 시절 다들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게 되는데 그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살았던 사회보다 내 자식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도록 밑거름을 만드는 데 동참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공감 출범 당시 표어가 ‘낮은 곳에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린다’였죠. 그 표어처럼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무모함’이었을 수도 있고요.

“글쎄요, 굳이 표현하면 ‘소박한 용기’죠.(웃음)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반대도 크게 없었어요. 물론 이 길을 택하면서 감수해야 할 부분도 분명 있고 항상 행복하지 않을 순 있는데, 비교하자면 굳이 돈을 잘 버는 변호사의 길보다 지금의 길이 저 개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좀 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수임료 받는’ 변호사를 하면서도 공익 활동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지금에 와서 결과론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프로보노(pro bono) 차원에서 공익 활동을 하는 것이 성과 면에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주로 자기 돈벌이나 삶에 시간 대부분을 투여하고 나머지를 쓰는 거잖아요. 좀 덜 먹고 덜 쓰면 이렇게 전업으로 할 수 있는데 굳이 돈에 연연하고 싶진 않았어요. 제가 돈에 욕심이 별로 없어서인지 후회를 한다거나 다른 길을 모색한다거나 그런 적은 지난 10년간 없었어요.”


돈이 주는 행복보다 마음이 느끼는 행복이 먼저군요.

“제 삶의 수준에 만족하는 거죠. 물론 제가 아이들이 셋인데 그 아이들이 학원도 다녀야 하고 대학도 가고 하면 좀 더 경제적인 부분에서 고민은 되겠죠. 제 행복 때문에 아이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되니까요. 그저 아이들이 원하는 교육을 받고 자립하는 전 단계까지 지원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벌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론 막연한 낙관도 있어요. 좋은 일을 하면 다 잘 될 거라는 낙관 말이죠.(웃음)”
염형국 변호사는 그간 10년의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 2월 대한변호사협회와 변협 인권재단이 공동 제정한 제1회 변호사 공익대상 수상자 개인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염형국 변호사는 그간 10년의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 2월 대한변호사협회와 변협 인권재단이 공동 제정한 제1회 변호사 공익대상 수상자 개인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예비 법조인들 보며 더 큰 ‘희망’ 발견

언젠가 염 변호사는 말했다. 법 자체가 공익과 인권을 위한 것인데 ‘공익인권법’이라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사회적 약자를 지키고 대변해야 한다고 ‘믿는’ 법이 권력이 되고 그로 인한 온갖 문제들로 세상이 떠들썩해지는 상황을 숱하게 지켜보면서 그는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공익과 인권, 그리고 법, 지향점이 같은데 참 다르게 들립니다.

“물론 우리는 법의 틀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공익과 인권은 꼭 법에 한정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우리가 공익 소송보다 제도 개선 쪽에 많은 활동을 하는 이유가 법의 범위를 넓혀가야 공익의 영역이 넓어진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공감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법에 한정되는 걸 경계해온 측면이 있어요. 법이라는 게 인권과 공익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측면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공익변호사라는 표현도 어쩐지 공익과 변호사라는 단어가 마치 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변호사가 생각하는 공익과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변호사의 역할에 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일반인들은 변호사가 사회적 책임과 공익을 위한 책무를 다하기 바라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질시하죠. 변호사는 업무 자체가 공익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커요. 누군가의 법적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공익을 실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부분에 있어선 변호사들이 일반인들의 시각에 맞춰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긍정적인 건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좀 더 성숙해졌고 사회의 눈높이에 다가가려고 하는 변화들이 도모되고 있다는 점이죠.”


어떤 변화들을 느끼나요.

“일단 로펌들이 나서서 변하고 있죠. 태평양도 공익재단법인을 설립해 의욕적으로 하고 있고, 김앤장도 사회공헌위원회를 꾸려 본격적으로 도모하고 있죠. 다른 로펌들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고요.”


거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게 공감 아닌가요.

“결정적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렵고, 일부 자극은 됐을 것 같아요. 자문을 해주거나 외곽에서 지원하는 정도로 도움을 주기도 했고요.”


10년 전에 이런 변화를 꿈꿨던 건 아닌가요.

“전혀 아니에요. 언젠가 박원순 시장이 ‘처음 아름다운 재단을 시작했을 때 지금의 모습을 상상 못했는데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도모해보니 어느 순간 이렇게 변화돼 있더라’라고 인터뷰한 것을 봤는데 그 느낌과 비슷해요. 공감이 첫 출발은 미미했지만 지금은 법조인들 대부분은 알고 공익에 관심 있는 로스쿨이나 사법연수원생들이 롤 모델로 생각하기도 한다니 대단한 변화죠.”


특히 예비 법조인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데서 더 큰 희망을 보겠네요.

“맞습니다. 그간 변호사 수가 늘긴 했는데 그에 비례해 공익변호사가 늘지는 않았거든요. 지금 25개 대학 로스쿨에는 모두 공익인권법학회가 있고 학회별로 보통 20~30명 이상 활동하고 있어요. 적어도 공익에 대한 인식이나 감수성은 이전과는 훨씬 비교가 안 되죠. 그런 이들이 법조계에 진출할수록 좀 더 사회가 희망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변화 뒤 여전한 ‘벽’ 실감

공감은 여성, 장애, 이주·난민, 빈곤·복지, 국제 인권, 취약 노동, 성소수자, 공익법 일반, 공익법 교육·중개 등 사회적 약자의 상황을 크게 9개 항목으로 분리해 변호사들이 담당하고 있다. 이 중 염 변호사의 주된 분야는 장애인 관련 활동이다. 지난 10년간 쉽지 않은 싸움을 하면서 의미 있는 많은 변화와 성과를 이끌어냈지만, 그럴 때마다 커다란 벽을 실감하기도 했다.



어떤 성과가 가장 눈에 띄나요.

“난민법 제정에 역할을 하기도 했고, 입양아동의 권리를 보장한 입양특례법, 또 도가니 사건을 계기로 사회복지법인에 대한 공공성 강화 등의 제도적 성과가 있었죠. 물론 우리 공감만의 성과는 아니고 해당 인권 단체와의 협력이 있어서 가능한 것들이었어요. 소송에 있어서도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에서 의미 있는 결정을 받아내기도 했고요.”


반대로 어떤 순간에 ‘벽’의 높이를 실감했나요.

“장애인 차별금지법이나 난민법 등 제도적 개선이 있어 왔지만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따라가질 못하는 게 가장 큰 벽이죠. 가령 차별금지법의 경우도 법안을 발휘한 의원들이 보수단체 등에 밀려 스스로 철회하기도 했어요. 차별금지법은 문명국가에선 당연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또 현재 존재하는 법도 경찰이나 사법부에서 쫓아가지 못하는 측면이 많아서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좌절되거나 벽을 실감하는 상황이 종종 있죠. 큰 틀에서 보면 인권의식 수준은 한 나라의 수준을 보여주는 건데, 그런 걸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싶어요. 먼 장래를 보고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겠죠.”


공감 이후 다른 공익변호사 그룹들도 많이 생겨났죠. 후배들에게 공익변호사의 길을 가라고 자신 있게 발언할 때 그 바탕엔 뭐가 있나요.

“사실 자신 있게 가라고 말하지 못해요.(웃음) 쉬운 길은 아니에요. 공감은 아름다운 재단 틀 안에서 비교적 편하게 출발한 측면이 있지만 실은 그러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을 때 공익 활동을 마음에 품었다면, 그걸 펼쳐보지 못했을 때의 후회보다 좀 희생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서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희는 공익변호사 양성 기금을 마련하고 있어요. 공익단체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거죠. 한 2~3년 지원을 받으며 자리를 잡으면 자생력이 생길 테고, 공익변호사로서 계속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상태에서 공감이 목표하는 바는 무엇이고, 또 그 안에서 염 변호사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공감이 좀 더 오래갈 수 있는 단체로 만들기 위해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게 사무총장인 제 역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변호사 그룹이라고 하니 부유한 단체라는 편견이 있는데, 기부자들의 도움이 아니면 운영하기 어렵거든요. 다행히 공감의 활동에 많은 분들이 지지를 해주면서 지금은 개인 기부자들이 많이 늘었어요. 처음 공감이 출범할 때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2004년 말 기준으로 개인 기부자가 40여 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전체 재정의 70% 이상을 개인 기부자들의 기부로 충당하고 있죠. 나머지 30%는 로펌이나 기업의 지원을 받고 있고요. 또 하나는 공익변호사계의 중추 역할을 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해야겠죠. 처음 공익변호사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공감을 통해 정보를 얻고 전문 지식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중계센터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국제인권 분야에 있어서도 중점적 센터 역할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에요.”



끝으로 그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그는 스스로의 인권을 보장받고 있는지.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위해 나의 인권은 희생되는 측면이 불가피하다’였다. 공감 창립 기념집에서 이사회 일원인 신경숙 작가가 쓴 표현이 떠올랐다. “내가 보기엔 절대 쉽지 않은 일을 너무 행복하게 해내고 있다”는.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