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간 갈등은 남녀의 다른 감성 언어 시스템에 기인한다. 외형적으론 같은 종족이지만 심리 반응에 있어서는 다른 종족, 심리적 이종(異種)이다. 이처럼 남녀가 너무 다르기에 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필수. 마음의 위안은 내 곁에 함께 해주는 동행이 있을 때 일어난다. 공감이란 동행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성 에너지의 힐링 프로세스다.

[HEALING MESSAGE] 동행(同行), 가끔은 옆을 돌아보세요
지인이 다섯 살 된 늦둥이 아들로 재미가 쏠쏠하다며 자랑이다. 자전거 전용 유아용 시트까지 구매해 자전거에 태우고 한강 자전거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시쳇말로 ‘짱’이라 한다. 그런데 몇 주 후 부인에 대한 불만을 하소연한다. 여자들을 잘 이해 못하겠단다.

무슨 일인가 들어봤더니, 주말에 늦둥이랑 노는 것은 너무 좋지만 주중 사업으로 쌓인 피로를 주말에 풀어야 하는데 아이 머리 감겨주는 것이 정서 발달에 좋다는 등의 이유로 꼭 아빠인 자신에게 시킨다는 것이다. 꾹 참고 하긴 했는데 속상해서 “나도 주말에 쉬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단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족한데도 본인 취미 생활에 돈을 투자하는 것에 자꾸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브레이크를 걸어 눈치 보게 됐다는 말도 덧붙인다. 지인은 “여자가 남성화된다는데 이런 것이냐”며 질문했다.

이번엔 라디오 상담 코너에서 만난 여자 분의 사연이다. ‘남편이 아기 같다’라는 제목의 사연인데 남편이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은 월급을 받아오는 것뿐이라고 했다. 육아가 너무 힘들다고 하면 자신과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간다는 것이다. 시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니 남편은 나가 친구랑 놀든지 PC방에 가버리는데 자신은 아이한테서는 해방이 돼도 시댁이니 마음이 불편하다는 얘기였다. 마마보이는 아닌데 계속 총각처럼 자유를 누리려는 것인지 이럴 거면 자기랑 왜 결혼은 한 건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남녀는 심리적으로는 ‘다른 종족’이다

독자 분들은 앞의 두 사연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하다. 아마 대부분은 남의 일 같지 않고 공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부 갈등 문제를 상담하다 보면 같은 사건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반응이 참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한 종족이니 내 배우자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는 오해가 문제를 더 크게 증폭시킨다. 남녀는 인간으로서 모양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심리 반응의 상이함에 있어서는 다른 종족, 즉 심리적 이종이다.

남녀는 다른 감성 언어 시스템을 사용한다. 같은 언어, 한글을 사용하는데 사용하는 언어 시스템이 다르다니 의아할 것이다. 번역으로 치면 직역이라고 할까,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문자적 소통(literal communication)이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같은 문장에 자신의 감성 콘텐트를 복잡하게 섞어 넣는다. 이를 맥락적 소통(contextual communication)이라 한다. 남녀는 감성 욕구가 다르기에 같은 언어의 색깔과 뜻이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남녀 감성 언어의 상이함은 통역이 필요한 수준이다.

남자보단 여성이 맥락적 소통을 많이 사용한다. “여보, 바쁘면 이번 결혼기념일 그냥 대충해도 돼요”에 ‘나를 이해해주나 보다’ 생각하고 “고마워” 했다가는 아내에게 평생 한을 남기게 되고, 한은 잔소리로 바뀌어 남편을 괴롭히게 된다. 남편 입장에선 억울하다 할 것이다. “대충하라 해서 대충한 것인데 왜 이러는 것이냐. 여자들이 이중인격자들 아니냐”며 말이다.

남녀는 감성 욕구의 우선순위가 다르다. 여성은 누군가 나를 공감해주는 느낌, 정서적 네트워킹에 대한 욕구가 가장 높고 감성적 효율성을 중요시한다. 이에 비해 남성은 순위 및 서열에 대한 욕구가 크고 이성적 효율성을 중요시한다. 앞의 사례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육아를 함께 해주기 바라는 것은 육아의 어려움을 공유하고픈 욕구다. 문자적으로는 ‘쉬고 싶고 피곤하다’ 이야기하지만 맥락적으로 해석하면 나의 감성을 공유해달라는 아내의 메시지다. 여성은 자신의 감성적 콘텐트를 상대방이 공감해줄 때 정서적 네트워킹의 희열과 안정감을 느끼고 그 안에서 포근하게 쉴 수 있다.

앞의 사례 속 남편들이 결코 나쁜 남자들이 아니다. 문제라면 ‘그냥 남자’라는 것이다. 아내가 육아 때문에 피곤하다 하니 남편들 나름의 솔루션을 제공하려 한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고용한다거나 모친에게 손자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성적 효율성에 근거한 남자들의 전형적 접근이다. 남편들은 노동량을 줄여 주었는데도 계속 불평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도 주말에 쉬고 싶은데 아내의 잔소리가 괴롭다.

새로운 취미를 찾거나 PC방 게임으로 사이버 순위를 올리는 것은 남자들이 쉬는 방식이다. 이 쉬는 방식이 아내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사실 쉰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감성 욕구를 채우는 활동이다. 남녀가 이렇게 다르다 보니 서로의 감성적 욕구를 채우기 어렵다. 싸움도 지쳐 포기하고 지내다 보면 서로를 위로하던 부부에서 ‘엄마 아빠 동호회 모임’으로 부부관계가 바뀌게 된다. 황혼 이혼의 증가는 자녀들이 독립한 후 다시 남녀로서 만나게 되는 부부의 당혹감이 빚어낸 결과다.

아이러니는 남녀의 심리 반응이 이렇게 달라지게 된 비극의 시작이 서로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수렵 시대, 남성들이 사냥을 떠나면 마을에 남은 여성들은 힘이 약하기에 똘똘 뭉쳐 마을과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공감, 정서적 네트워킹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다. 반면 남성들은 사냥에서 일등을 해야 많은 먹을거리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공감과 전투력은 공존할 수 없다. 눈앞에 있는 짐승이 불쌍해 보이는데 어떻게 사냥을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죽이지 않으면 내 가정이 굶는 것이다. 여성에게 한심하게 보이는 남자의 공감 능력 부족은 사실은 여성에 대한 사랑에 충실했던 남자의 ‘진화 합병증’이다.

동행은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생존과 성취를 위해 앞만 보고 뛸 때는 옆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위안은 내 곁에 함께 해주는 동행이 있을 때 일어난다. 공감이란 동행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성 에너지의 힐링 프로세스다.

남녀가 너무 다르기에 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든든한 동행자로 인생의 슬픔과 허무를 위로할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 부부만의 시간을 갖기를 권하고 싶다. 엄마 아빠가 아닌 남녀로서 만남을 갖는 것이다. 그날만은 자녀 이야기도 하지 말아라. 그러다 보면 상대방의 감성 언어에 대한 이해가 쌓이게 된다. 생각보다 행복은 가까운 데 있다.


글·사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