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들떠 있던 증권가(街)는 막상 기업들이 4분기 실적을 발표하자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예상치를 크게 밑도는 ‘어닝 쇼크’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서다.
원화 강세로 가뜩이나 수출 여건이 악화된 마당에 일본이 엔화 가치를 적극적으로 떨어뜨리고 나서자 일본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자동차, 정보기술(IT) 등의 업종이 된서리를 맞았다. 경기 변동에 민감한 업종으로 분류되는 철강, 화학, 조선, 해운 등도 글로벌 수요 둔화가 지속된 탓에 예상보다 실적이 훨씬 좋지 않았다.
상장사들의 악화된 실적이 올 1분기에 곧바로 좋아질 것이라 보는 증시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환율은 수출이 주력인 한국 기업에 당분간 불리하게 작용할 전망이고 경기 또한 급격히 좋아지긴 힘들어 보인다. 이런 와중에도 일부 ‘깜짝 실적’을 내고 있는 기업들은 향후에도 좋은 실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돼 증권사들의 ‘러브콜’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작년 4분기 영업이익 예상치 18% 밑돌아
한국투자증권이 114개 주요 기업들의 실적 발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기업이 거둔 작년 4분기 영업이익은 총 20조6500억 원으로 작년 말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제시했던 것보다 18% 적었다. 순이익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29.8%나 밑돌았다.
업종 대부분이 ‘쇼크’ 수준의 실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소재와 산업재에 속한 기업 실적이 최악이었다. 철강금속 업종은 영업이익이 예상했던 것보다 28.2% 적었고, 화학 업종은 47.4%나 밑돌았다. 건설과 조선도 각각 50.5%와 145.1% 하회했다.
이번 실적 시즌의 충격이 더욱 컸던 것은 국내 증시를 이끌고 있는 한 축인 자동차 기업 실적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경우 영업이익을 기준으로 추정치 대비 각각 12.4%와 45.2% 밑돌았다. 자동차 업종은 예상치를 총 21.7%나 하회하며 시장 주도주 자리를 내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통상 4분기는 퇴직금이나 대손충당 같은 예상하기 힘든 일회성 비용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애널리스트 추정치보다 적었다고 해서 단순히 ‘쇼크’라고 표현하기엔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작년 4분기 실적과 2011년 4분기를 비교해 보면 이러한 지적도 설득력을 잃는다.
실적을 발표한 140개 주요 기업 가운데 분할 등으로 비교가 힘든 2개사를 제외하고 138개사를 분석한 결과, 이익이 감소한 곳은 70개사로 증가한 곳 68개사보다 많았다. 애널리스트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익이 후퇴한 경우도 과반 이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노종원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작년 4분기를 제외하고 가장 최근인 2011년 4분기와 요즘같이 엔화가 약세를 보인 2005년 4분기를 비교하면 이번이 가장 실적 충격이 컸다”고 설명했다.
‘어닝 쇼크’의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되는 것은 환율이다. 작년 4분기 본격화된 원화 강세 현상이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이 됐다. 작년 3분기 평균 1133원이던 원·달러 환율은 4분기에 1068원까지 떨어져 3개월 새 60원 이상 하락했다. 증권업계에선 원·달러 환율이 10원 내려갈 때마다 현대차는 2000억 원, 기아차는 800억 원씩 연간 매출 감소를 겪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원화 강세로 한국 기업 경쟁력 저하
원화 가치가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와 경쟁하는 품목이 많은 일본이 자국의 통화를 적극적으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게 더 큰 악재 요인이다. 최근 3개월 새 원화 가치는 약 3% 오른 반면, 엔화 가치는 9.2%나 급락했다.
환율이 한국 기업의 실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기업 실적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번 실적 시즌 ‘쇼크’ 상태인 한국 증시와 달리 일본은 엔화 가치를 떨어뜨린 뒤 ‘서프라이즈’를 만끽 중이다. 일본 증시를 대표하는 닛케이225 지수에 속한 상장사 중에서 증권사 애널리스트 예상치를 뛰어 넘은 실적을 낸 곳은 64%나 됐다. 130개 기업 중 83곳이 ‘어닝 서프라이즈’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과는 정반대의 실적 시즌을 겪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한 달 전과 비교해 향후 실적 추정치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한국과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자동차와 부품 업종만 보면 올해 연간 실적이 5~40%나 상향됐다. 일본 자동차 기업의 실적 전망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자동차업계가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는 얘기다.
이진우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반도체 등 IT 업종은 상대적으로 엔저로 인한 일본 기업들의 실적 개선 효과가 크지 않으나 자동차와 관련 부품사들은 실적 개선 기대감이 크기 때문에 국내 자동차 기업 주가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전자, 삼성생명, LG디스플레이, 한화생명, 현대위아, 유한양행, 동아제약, 한미약품 등도 작년 4분기 ‘서프라이즈’ 실적을 거두고 올 1분기 실적 기대감이 큰 종목들이다.
삼성전자 등은 실적 호조세 이어가
물론 한국의 모든 기업이 저조한 실적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증시 시가총액의 2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가 탄탄하게 버텨 주면서 전반적인 실적 하락의 ‘쓰나미’를 막아내고 있는 것은 희망적이다. 금융·제약 업종 또한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실적을 거뒀다. 워낙 적은 기업들만 실적 호조세를 이어가고 있어 증시에서 이들 기업의 희소성이 더욱 빛을 발한다.
정수헌 SK증권 연구원은 “실적이 본격적으로 둔화하기 시작한 작년 2분기 이후 깜짝 실적을 기록하고 다음 분기 실적이 상향 조정된 종목들이 좋은 주가 흐름을 보였다”면서 “이번에도 작년 4분기 실적이 예상치보다 높았고 올 1분기 기대치가 올라간 종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대표 종목은 단연 삼성전자다. 작년 4분기 실적이 예상치에 부합한 삼성전자는 올 1분기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증권사들이 예상하는 올 1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평균은 8조2720억 원으로 최근 한 달 새 5.7% 높아졌다.
이 밖에 삼성생명, LG디스플레이, 한화생명, 현대위아, 유한양행, 동아제약, 한미약품 등도 작년 4분기 ‘서프라이즈’ 실적을 거두고 올 1분기 실적 기대감이 큰 종목들이다.
대형주에 가려 상대적으로 잘 보이진 않지만 각 업종 내 실적 개선 기대감이 큰 종목을 주목하라는 분석도 있다. 하이투자증권이 올 상반기 매출, 영업이익, 순이익 증가율 예상치와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 매력 등을 따져 순위로 매긴 결과에 따르면 IT 업종 내에서 KH바텍, 옵트론텍, 아모텍, 플렉스컴, 이엘케이 등 중소형주가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또 자동차 업종 내에선 현대모비스·평화정공·현대위아 등이, 화학 업종에선 휴켐스· 한솔케미칼·이수화학이, 철강 업종에선 세아제강·포스코 등이 각각 순위에 들었다.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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