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행간 같은 곳, 세상사 내려놓고 나를 만나는 시간,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마법 같은 곳.’ 이미 치유는 시작되고 있었다. 성심, 감사, 사랑, 긍정, 정화, 에너지, 평온, 그리고 느림과 모름. ‘행복하소서’를 외치는 행복전도사 정덕희 씨와의 두 시간 남짓 대화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된 단어들이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모름지기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들일진대 가만 보니 ‘품’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들이기도 하다. 공간과 그 공간을 대표하는 누군가가 이처럼 기막히게 닮은꼴이라니, 그것만으로도 터의 기운이 강하게 다가왔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인근에 위치한 품은 짐작대로 그가 주인장이다. 설립 목적이 ‘잠깐, 멈춤’인 마인드 힐링 센터가 품의 정체성. 품은 진정한 휴식을 위한 자연의 품이자,‘빠름, 빠름’을 외치는 현대에서 천천히 느리게 가는 복고의 품, 언제라도 달려가 안기고 싶은 어머니의 품,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는 상처를 사랑으로 안아주고 싶다는 ‘정덕희의 품’을 상징한다. 치유의 땅과 운명처럼 만나다
지난해 9월 문을 열고 이제 첫 겨울을 나고 있는 그곳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완성하지 못한 채 사람을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계속 손길이 더해지고 더해지며, 오가는 이들의 소소한 아이디어들이 반영돼 품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말하자면 품은 정체된 곳이 아닌 늘 현재진행형인 곳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정덕희 대표가 있다. 품이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기까지 걸린 1년여 동안 그는 직접 곳곳에 손길을 더했다. 그 자체로 일이 아닌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을 안아주고 대접하기 위해 만든 공간에 성심을 담아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본격적인 공사 기간은 1년여이지만 그가 이 땅과 만난 건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60년 된 사찰이 있었던 그곳은 마을 사람들이 ‘치유의 터’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 땅을 밟게 된 그는 마치 어머니의 태반처럼 마음의 안정을 주는 그곳의 기운에 강한 끌림을 받았다. 그가 품과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제가 땅을 고른 것이 아니라 땅이 저를 불러들였다고 하는 게 맞아요. 원래 사회사업을 하기 위해 사들였는데 뭔가 더 의미 있게 활용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생각한 게 지난 20년간 제가 넘치게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는 터전으로 삼아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늘 ‘행복하소서’라고 외치지만 사람들이 진짜 행복할 수 있도록 잠시라도 안아주고 싶었던 거죠.”
결국 품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누구나 한 가지 이상 고통을 안고 산다지만, 아프고 상처받는 이들을 보며 안쓰럽고 안타까웠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첫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딸이었다.
현재 품의 기획과 운영 등을 맡고 있는 딸 이승민(32) 씨는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대기업에 다니다 사표를 던지고 품에 합류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힘들어하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는 여느 엄마들과 달리 “그만두라”고 충고했다. 딸의 운명 또한 ‘품’의 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권유가 있긴 했지만 실은 제가 필요해서 운명처럼 이곳으로 온 것 같아요. 제 또래들이 할 수 없는 인생 공부를 여기 와서 하고 있죠. 솔직히 너무 평온하다 보니 예전의 그 치열함도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언제까지 품에서 일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더라도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을 커다란 깨달음이죠.” 엄마의 넘치는 열정과 아이디어에 딸의 감각이 더해지면서 품은 정갈하고 아름답게 재탄생했다. 이부자리에서 소품 하나까지 대충이란 없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 여느 한옥들과 차별화했고, ‘덕희하고 나하고 1박 2일’, ‘꿈틀꿈틀 품속 꿈틀 학교’ 등 정규 프로그램과 시기별 비정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품에서만 줄 수 있는 위로와 치유를 극대화했다.
“여기는 펜션이 아니에요. 리조트나 호텔도 아니죠. 힘든 삶 속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 내 갈 길이 어디인가 고민하는 젊은이들, 평생을 바쳤던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인생 후반 공허함에 시달리는 5060세대 등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에요. 실제로 병원에 다니며 아픈 마음을 치유하던 한 청소년이 여기 와서 달라져 가기도 했고, 모녀지간인 분들이 와서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고 좋은 기운을 받아 가기도 했어요.
여기는 전화도 안 터지고 인터넷도 안 되고 TV도 없잖아요. ‘적절한 불편함’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힐링은 누가 대신해주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자가 치유 능력이 있다고 하잖아요. 품은 그 환경이 돼줄 뿐 결국은 스스로 또 같이 치유해가는 거죠.” 사람에 대한 사랑, 인생 이모작의 현실화 터전
품은 경제적인 이유로 운영하는 곳이 아니다. 솔직히 돈을 벌 목적이라면 ‘정덕희’라는 브랜드를 내세우면 이득일 터.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게 이곳의 존재 이유임에도 괜히 그의 이름값에 기대감을 품고 왔다가 실망하는 이들이 있을까 오히려 조심스럽다고 했다. 다만, 품이 그에게 주는 개인적 의미가 있다면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고 현실화하는 공간, 딱 그 정도다.
“저는 이제 돈은 필요 없어요. 저희 남편이 말하기를 ‘노력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하늘에서 많은 걸 주셨다’고 표현하는데 그 말이 맞아요. 아무것도 없던 사람이 이만큼 가졌으면 너무 감사한 일이죠. 이제는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 그게 중요해요. 젊어서 열심히 돈 벌었으니 늙어서는 부가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곳을 가꾸며 사람들을 대접하다 보면 외로울 틈이 없을 테니 괜찮은 인생 후반이 아닐까요.”
사실 그의 더 큰 미래는 따로 있다. 그에 비하면 품은 그 꿈을 위한 정류장 정도의 의미다. 어릴 적부터 나보다는 남을 위한 기도에 익숙했던 그는 품의 원래 목적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사업에 대한 꿈을 차근차근 현실화하고 있다. 품이 활성화되면 어머니재단을 설립해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자 마지막으로 머무를 장소다. “엄마는 저희가 어릴 때부터 입버릇처럼 ‘재산은 다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희들은 남들이 학자금 대출로 공부할 때 엄마가 준 돈으로 공부하고 이만큼 자랐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웃는 모습이 꼭 닮고 마음씨마저 쏙 빼닮은 모녀가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팍팍 전해주고 있는 품의 기운이 유독 따스하게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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